
▲육당 최남선 ⓒ 위키미디어 공용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는 육당 최남선이 1908년 11월 1일 창간한 <소년>이다. 대한민국 정부는1965년 10월 20일 이날을 기념하여 '잡지의 날'로 제정하였다. 발행인 최남선은 <소년>의 창간사 "우리 대한으로 하야곰 소년의 나라도 하라"에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나는 이 잡지의 간행하난 취지에 대하야 길게 말삼하디 아니호리라.
그러나 한마뒤 간단하게 할것은
"우리 대한으로 하야곰 소년의 나라로 하라 그리하랴 하면 능히 이 책임을 감당하도록 그를 교도하여라."
이 잡지가 비록 덕으나 우리 동인은 이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야 온갖 방법으로서 힘쓰리라.
소년으로 하여곰 이를 닑게 하라. 아울너 소년을 교도하난 부형으로 하여곰도 이를 닑게 하여라.
<소년>은 창간 당시 구독자가 30~40명에 불과했다. 잡지라는 매체가 생소하고 출간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년 후에는 발행 부수가 200부 정도로 늘어났고, 국한문판과 한글판을 제작하였다.
<소년>의 발행일은 매월 1일자였다가 1910년 1월부터는 15일자로 바꾸었다. 발행 부수가 크게 신장되면서 1910년 8월 26일 조선통감부의 발행정치처분을 받고, 통권 22호로 정간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 <소년>은 일제의 탄압으로 2년여 만에 문을 닫았다. <소년> 창간호에 최남선은 최초의 신시라는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했다.
최남선은 1914년 10월 1일 <청춘>을 창간했다. 창간사 격인 "아무래도 배워야 한다"에서 강조한 내용이다.
안말 맙시다. 헛 노릇 맙시다. 배우기만 합시다. 걱정맙시다. 근심 맙시다. 배우기만 합시다.
온 힘을 배움에 들입시다. 우리는 여러기준으로 더불어 동무가 되려 합니다. 다 같이 배웁시다. 더욱 배우며 더 배웁시다.
최남선은 <소년>에 이어 <청춘>에서 조선인의 학문을 일관되게 권장하다가 1915년 10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처분을 받았다. 통권 6호가 나온 후 총독부는 정간 사유도 밝히지 않고 잡지사를 폐쇄시켰다. 최남선이 쓴 권두언 '아관(俄觀)' 때문이다. 내용의 주요 부분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모르는 체 하겠노라. 그러나 교육의 길은 모르는 체 하지 못하겠노라.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겠노라. 그러나 교육의 일은 용서하지 못하겠노라... 우리는 바야흐로 칼을 베며 삶을 만들며 알을 지어 무릇 이 길에 마장이 되고 이 길에 구점이 되는 쓰기를 마련하노니 이 또한 여러분에게 충심이 발로하는 일이다.
국권을 빼앗긴 일제강점기는 잡지의 수난기였다. 총독부가 출판법을 만들고 잡지의 출판을 통제했으며 어렵게 간행된 잡지를 엄격히 검열하여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1919년 9월 천도교청년회에서 월간 <개벽>을 창간했으나 종교문제 외에 시사문제를 다룰 수 없었다. 그나마 1926년 8월 72호로 발행금지처분을 당했다.
조선청년연합회는 기관지 <아성(我聲)>을 1921년 3월 창간하였다. 편집 겸 발행인 안확·인쇄인 최성무였다. 창간사 '천성과 지성'에서 "근래 신사조를 표방하고 신문화를 지목하여 활동하는 추세가 유유히 높을새, 결사가 별같이 널리고 잡지가 수풀같이 일어나는지라, 그 상태가 번다하고 왕성하도다. 그러나 그 뿌리가 원기와 정신에 입각하지 않으면 그 하는 것이 아무리 장대할 지라도 필경 사상누각을 면치 못할 지니, 이같이 격조가 높지 않은 때에 우리의 희망이 아닌 것이다."라 썼다.
<아성>을 겨우 4호까지 내고 종간하였다. 총독부의 탄압에 견디지 못했다.
<신천지>는 1921년 7월 백대진 주간, 오상은 사장 체제로 창간된 시사지였다. 박대진이 쓴 '신천지의 전개'라는 창간호의 권두언이다.
어시호 과거의 세계가 그대로 남아 있지 못하게 되었으며, 과거의 시대가 또한 그대로 남아 있지 못하게 되었나니 비록 시대가 춘하추동의 사시와 같이 변역되는 것은 아니로되 일관한 생명 하에 있던 시대를 그림자나마 잡지 못할까. 과연 오인의 안전에는 신시대의 기원이 확정되려하며 신천지의 페이지가 전개되려 하는 도다.
<신천지>는 계몽적인 글을 많이 싣고 필리핀의 독립운동을 소개하는가 하면, 조선인의 참정권이나 내정독립을 주장하는 기사로 1922년 8월 폐간되었다.
장도빈을 발행 겸 편집인으로 하여 1922년 11월 창간된 시사지 <조선지광>은 한 달에 한 번 꼴의 필화를 당하고, 1932년 7월 폐간되었다. 창간호에 실린 '우리의 주의 주장'이다.
본사는 조선 민족 또는 세계를 위하여 좌의 3개 주장을 세움.
-. 조선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하여 정의와 지식과 모든 문명을 설립함.
-. 조선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하여 조선인의 교육·식생·행동을 고취함.
-. 이상의 주장을 관찰하여 조선민족의 권리와 행복을 옹호하여 나아가 세계문화에 공함을 기도할 것.
천도교 계열의 조선농민사가 1925년 12월에 창간한 <조선농민>은 최초의 농민을 위한 잡지였다. 편집 겸 발행인 이돈화는 <개벽>, <신여성>, <어린이>를 발행한 이 분야 전문가이다.
이돈화에 이어 <조선농민>의 발행을 이끈 이승환이 쓴 창간사다.
반만 년 동안을 짓밟히고, 쥐 몰리고, 눌리고, 쓸려서 항상 큰 불안과 공포와 안전에 결박되어 살아오던 전 조선 인구의 9할이나 되는 농업대중의 인격적 해방을 위하여, 급전진하고 막 다름질 하여 황폐·파멸의 맨 밑바닥 구렁텅이로 쓸려 들어가는 조선 농촌의 그 참담한 경제적 현실을 구제하기 위하여, 더욱이 중대한 사명을 다하는 데에 오롯이 되며, 또 기둥이 되는 필전 조선 절대 다수의 농업대중의 지식적 각성을 재촉하기 위하여, 이제 우리나라의 역사상에 새 기원으로 <조선농민사>가 세상에 나왔으며, 또 이 큰 목적을 달하는 데에 앞장섬으로써 <조선농민>이라는 봉기가 그 진용을 차리고, 이제 마두(馬頭)를 전선에 내세웠습니다.
<조선농민>은 일제의 탄압과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곧 문을 닫았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잡지 창간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