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에는 아주 맛난 음식이 많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가지 맛난 것. 진주비빔밥. 그 밥을 진주사람들은 꽃밥이라고 불렀다. 색색의 갖은 나물에다가 육회를 고명으로 올리는 그 음식이 하도 보기가 좋아서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 허수경산문집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중에서

▲진주여성민우회 생애사 쓰기 모임 첫 문학기행진주여성민우회 생애사 쓰기 모임 첫 문학기행 ⓒ 박보현
해외 유명 시인들의 작품은 널리 읽히고 인용되지만, 정작 우리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인들은 점차 잊혀지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지역 문학의 결을 다시 읽고 삶의 흔적을 되짚어보기 위해 진주에서 나고 자란 고(故) 허수경 시인이 지나온 진주의 공간들을 따라가는 문학기행이 열렸다.
진주여성민우회 생애사 쓰기 모임 참가자들은 지난 28일 진주성 촉석루에 모여 고(故) 허수경 시인의 시집을 펼치고 작품을 함께 낭독하며 그의 문학 세계와 삶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행사는 그동안 허 시인의 지인 중심 추모에서 벗어나 시민들이 직접 참여한 대중형 추모·낭독 프로그램으로 진행됐다.
이날 강사로 나선 김지율 시인은 "허수경 시인의 가장 원초적인 정서는 태어나고 자란 진주, 특히 남강과 깊이 연결돼 있다"며 "그의 시 세계는 개인적 경험을 넘어 지역의 기억과 역사까지 포괄한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그동안 지인들을 중심으로 소규모 추모가 이어져 왔지만 시민들과 함께 시를 읽고 공유하는 자리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시인을 기리고 그의 작품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또한 "문학, 특히 시인의 작품은 더 자주 읽히고 이야기 돼야 한다"며 "지역에서부터 이러한 기억과 해석이 확장될 때 시인의 세계도 더 넓게 살아난다"고 강조했다.
이날 현장에는 허수경 시인의 동생 허훈씨도 참석했다. 허씨는 "한 사람을 기억하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이 각자의 삶 속에서 이어지고 확장되길 바란다"며 "누군가에게는 그 기억이 글을 쓰고 자신을 표현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허수경 시인의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시집 초판본허수경 시인의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시집 초판본 ⓒ 박보현
성순옥씨는 허 시인의 대학 후배로서 개인적 인연을 언급하며 그의 시 세계를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다고 말했다. 순옥씨는 "대학 시절 선배가 문단에 데뷔한 이후 그의 시를 삶의 기준처럼 삼아왔다"며 "진주 남강과 지역의 역사, 농민운동과 형평운동 등 현실을 담아낸 시들이 깊게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순옥씨는 또 "진주에서의 허 시인의 추모 활동이 소규모로 이어져 왔고, 코로나19 시기에는 온라인 릴레이 낭독으로 확장되기도 했다"며 "이후 오프라인 중심의 추모가 다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러한 활동은 개인 추모를 넘어 지역의 문학과 기억을 이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김 시인은 "문학 연구자 입장에서도 시인의 작품이 꾸준히 읽히고 논의되는 것이 중요하다"며 "최근 허수경 시인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많이 늘고 있다며 등 학계에서도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몇 년 사이 연구 성과가 증가하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라며 "이 흐름이 이어지면 시인의 문학 세계는 더 넓게 확장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날 참가자들은 촉석루에서 시집을 펼쳐 들고 대표 시편을 낭독하며 시인의 문장을 되새겼다. 일부 참가자들은 "시를 읽는 순간 개인의 기억과 감정이 함께 떠올랐다"고 소감을 전했다.
김지율 시인은 "허수경 시인의 시 세계에서 '진주'는 단순한 고향을 넘어 기억과 상처, 생명력과 비애가 교차하는 근원적 장소로 기능한다"며 "유년의 공간들은 개인의 경험을 넘어 공동체의 역사와 고통을 연결하는 매개로 작동하며 시인의 정서적·문학적 기반을 형성한다"고 짚었다.
그는 이어 "대표적으로 남강을 유년의 기억과 분리된 삶의 출발점이자 시적 상상력의 원천으로 제시한다"며 시 '강'에서 남강이 "탯줄을 띄워 보낸 강"으로 묘사되는 대목을 들어 "개인의 기억과 존재의 기원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확장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두 번째 공간으로 옛 진주역을 제시했다. 진주역은 허수경 시인이 어린 시절 "먼 곳으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찾아갔던 장소로, 그의 산문 <너 없이 걸었다>에도 등장한다.
김 교수는 "사람들이 봇짐을 이고 여행 가방을 끌며 기차표를 보여주고 역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어린 허수경은 오래 바라보곤 했다"며 "기차표가 없었던 시인은 표를 가진 어른들의 등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먼 도시라고 믿었던 삼척을 상상했다"고 설명하며 "진주역은 단순한 교통 공간이 아니라 떠남과 이동, 그리고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 시작된 장소였다"며 "훗날 독일로 떠나 평생 이방인처럼 살아갔던 그의 삶과도 연결되는 상징적 공간"이라고 말했다.

▲김지율 시인은 진주경찰서에 대해 “허수경 시인이 대학 시절 사회과학 공부를 하던 중 누군가의 밀고로 연행돼 조사를 받았던 경험이 남아 있는 공간”이라며 “국가 권력과 개인의 충돌이 각인된 트라우마의 장소로 읽힌다”고 설명했다. ⓒ 박보현
또한 진주경찰서에 대해서는 대학 시절 연행과 조사 과정을 경험했던 장소로 언급하며 "국가 권력과 개인의 충돌이 각인된 트라우마의 공간"이라고 해석했다. 김 교수는 이어 "이 경험은 이후 허수경 시인이 죽음과 전쟁, 평화, 인간의 폭력성 등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고고학 연구로까지 나아가게 만든 원초적 트라우마의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허수경 시인의 가난했던 유년의 기억이 남아 있는 중앙시장과 관련해서는 "1971년부터 약 40년간 거주했던 생활의 중심 공간으로, 생계와 공동체의 기억이 축적된 장소"라고 설명했다. 이어 "중앙시장은 물산과 사람, 노동과 삶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시인의 기억공동체를 형성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이처럼 진주의 장소들은 그의 시 세계에서 과거와 현재, 상실과 회복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사유의 무대로 기능한다"며 "결국 고향은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시인의 문학적 원형이자 정서적 귀환의 장소로 자리한다"고 덧붙였다.

▲허수경 시인이 가난했던 유년 시절을 보냈던 집 앞에서.허수경 시인이 가난했던 유년 시절을 보냈던 집 앞에서. ⓒ 박보현

▲진주 논개시장 내 진양탕고 허수경 시인의 모친이 운영했던 진주 논개시장 내 진양 목욕탕의 모습. ⓒ 박보현
참가자들은 진주 원도심과 중앙시장 일대를 찾아 시인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공간을 따라 걸으며 그의 삶의 흔적을 되짚었다. 이들은 진주중앙시장과 논개시장, 남강 일대를 둘러보며 시인의 시 세계와 연결된 장소적 기억을 공유했다.
진주여성민우회 <여성생애사 글쓰기> 멘토인 조세인씨는 "시인의 삶과 시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도시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이어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며 "지역 곳곳의 공간을 따라가며 문학적 인물을 다시 상상해보는 이런 방식의 문학 기행이 더 확산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후 참가자들은 답사를 마친 뒤 중앙시장 인근에서 진주비빔밥을 함께 나누며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들은 "시인의 삶과 작품을 단순한 추모를 넘어 지역의 문화 기억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단디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