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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전화에서 읽은 것. ⓒ anniespratt on Unsplash
"큰일 났어. 빨래에서 섬유유연제 냄새가 안 나."
"어? 섬유유연제를 안 넣었겠지."
"그러니까 말이야..."
그제야 나는 아들이 전화한 의도를 알아챘다. 독립한 자취방에 섬유유연제가 떨어졌으니, 집에서 사용하는 섬유유연제를 보내 달라는 주문 전화였다. 부족한 걸 보내 달라는 얘기를 하기가 미안했던지 에둘러 표현하는 아들이 귀엽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짠했다.
아들의 독립은 이번이 세 번째다(관련 기사:
스물여섯 아들의 세 번째 독립, 방 한칸 못해줘서 미안하다). 앞선 두 번의 독립 당시 아들은 학생 신분이라 집에서 생활비를 지원 받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졸업 후 부모의 지원 없이 혼자 1인 개발자로 일을 하며 불규칙한 수입으로 월세, 공과금, 그리고 AI 이용료까지 스스로 해결하고 있다.
아들에게 AI 이용료는 가장 무거운 지출이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혼자' 해내기 위해 아들은 AI 직원을 고용했다. 언젠가 내게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팀장이고, AI가 팀원이에요. 그렇게 이해하면 돼요."
각자 맡은 일을 충실히 수행한다며 간혹 노트북 화면을 보며 "열심히 일하고 있군" 하고 혼잣말하던 아들의 모습이 스쳤다. 말은 그렇게 의젓하게 해도, 프리랜서의 불규칙한 수입으로 매달 본인 집 월세에 팀원(AI)들의 월급인 이용료는 매달 꼬박꼬박 정산해야 하는 고정 지출 경비인 셈이다. 아들은 총 세 가지 AI를 구독하고 있는데 총 월 100만 원 가량이 고정 지출로 나간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서 공간을 분리한 독립을 선택한 아들이 제 몫을 하며 AI 직원들의 월급을 감당하고 있지만, 얼마 하지 않는 섬유유연제가 떨어졌으니 사달라는 말을 빙빙 돌려 한 것이다. 사실 간혹 집에 들러 김치와 반찬들을 챙겨 가곤 하지만, 생필품을 요청한 건 처음이었다.
고단함이 묻어있던 전화 한 통
전화 받을 때는 다 큰 녀석이 투정 부리는 게 귀엽다 싶었지만, 전화를 끊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얄팍한 주머니 사정에 맞춰 빠듯하게 버텨내고 있는 자취생의 고단함이 그 전화 한 통에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막상 나가서 세 끼를 챙겨 먹으며 밤낮없이 개발 일을 하려니 말처럼 쉽지는 않을 터이다. 겉으로는 의연한 척하지만, 끼니를 대충 때우기 일쑤일 게 뻔하다.
독립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상한 음식을 먹고 장염에 걸려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온 적도 있다. 그때 며칠 동안 죽을 먹고 나서야 몸을 추스르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었다. 며칠 전에도 먹은 음식이 체했는지 급하게 집으로 와 이틀을 머물다 돌아갔다. 아파서 집에 들르더라도 아들은 늘 한결같이 말한다.
"돌아올 집이 있어서 좋아요."
아들이 대견하면서도, 아프고 힘들 때 가장 먼저 돌아올 집이 있다는 게 감사하다고 하는 녀석의 고백에 마음이 찡했다. 어쩌면 아들에게 집은 단순히 편안히 잠을 자는 곳이 아닌, 1인 개발자로 세상과 맞서 버티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충전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해 풍족하게 수익을 내지 못하는 아들의 형편을 곁에서 지켜보는 마음은 늘 안쓰럽기 그지없다. 돈 벌기가 만만치 않은데 홀로 매달 고정비용을 감당해 내는 아들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울까 싶어서다.
애써 모른 척하지만 오랜 직장 생활을 하며 숱한 일들을 겪어본 나로서는 밥벌이의 무게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더군다나 혼자서 모든 걸 책임져야 하는 1인 개발자가 얼마나 외롭고 고단할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결국 거친 세상과 맞서야 하는 건 아들 스스로여야 한다는 걸 잘 알기에, 나는 변함없이 뒤에서 응원할 수밖에 없다.

▲같은 향이 밴 에너지 충전소가 언제나 있다는 것. ⓒ blenderdesigner on Unsplash
아무리 안쓰럽고 애잔해도 엄마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본인의 인생이기에, 외롭고 힘들어도 그 길을 아들 스스로 온전히 견디며 단단해지기를 나는 바란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라는 말처럼, 지금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귀한 시간이고 일들이다. 실패해도 괜찮으니, 주저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살아보기를 엄마인 나는 늘 뒤에서 응원할 뿐이다.
지난 27일 주문한 섬유유연제 택배 상자가 29일이면 자취방 앞에 도착할 거다. 집에서 쓰던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이 좁은 아들의 방안에 퍼질 것이다. 혼자 세상과 맞서 싸우더라도 늘 돌아올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을, 같은 향이 밴 에너지 충전소가 언제나 제 자리에 있다는 것에 아들이 조금이나마 위로 받길,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길 기도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