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말로 하는 것입니다. 정치의 90%는 말로 이뤄집니다."
2007년 가을,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장시간 인터뷰를 했다. 휴식 시간에 <오마이뉴스> 취재진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노 대통령이 한 말이다. 그 '말'에는 주장, 대화, 소통, 토론, 논쟁, 협의 등 복합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고, 무엇보다 '정치인은 본인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하고,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는 언행일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대변인이 대통령의 말을 대신 전한다고 한다면, 연설비서관실은 대통령이 직접 할 말을 글로 준비한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연설비서관실에서 '막내 필사'로 일했던 장훈 전 행정관이 최근 책을 펴냈다. 제목은 <리더의 글쓰기>(담담). 부제는 '노무현 대통령부터 김민석 국무총리까지 리더의 필사 장훈의 실전 글쓰기 전략. 그는 노 대통령 외에도 국무총리, 도지사, 시장의 '고스트 라이터'로 활동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연설비서관실에서 '막내 필사'로 일했던 장훈 전 행정관이 최근 <리더의 글쓰기>(담담)라는 책을 펴냈다. ⓒ 담담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연설문은 어떻게 준비되는가
'당신은 당신 생각의 주인입니까?'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을 한 줄로 쓰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기자로 '글밥'을 30년 이상 먹은 내게도 글쓰기는 일상이다. 글쓰기는 '생각을 장악하는 힘'을 기르는 일이자, '생각의 근육'을 키워나가는 과정이다. 생각한다는 것과 그 생각을 글과 말로 적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다르다. 후자는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의 내용은 '리더의 글쓰기'라는 제목보다 더 폭넓다. 리더가 아닌 사람에게도 유용하고, 글과 말의 경계를 넘나든다. 할 말 많은 작가 덕분에 독자에게는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책이다.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말(연설문)이 어떻게 기획·준비되는지 당사자들이 아니면 모를 이야기는 흥미로우면서도 많은 깨달음을 준다.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여서 생생하다. 보고서 작성 노하우 등 실용적인 글쓰기에 대한 디테일도 담겨 있어 실전에 곧장 써먹을 수 있다.
보고서 작성과 처리 방법, 그에 따른 업무 요령에 관하여 비서실 전체의 학습계획을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2005년 7월 27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 노무현 대통령 말씀)
대통령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원칙은 다섯 가지. 첫째, 보고서의 작성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둘째, 보고서를 읽고 의문이 남지 않아야 한다. 셋째, 보고 과정에서 적절한 절차를 거쳤는지도 중요하다. 넷째, 보고서를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시간을 아낄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기본적인 보고서 형식을 통일할 필요가 있다... 청와대 내에 '보고서 품질향상 연구팀'이 구성됐고, 대통령이 직접 연구회를 챙기기도 하셨다. (60~61쪽)
(대통령의) 연설문 업무는 '3무(三無) 업종'이라고 한다. 첫째, 휴일이 없다. 글쓰는 일은 일과 휴식의 경계가 없다. 둘째, 완벽이 없다. 연설문에 마감은 있어도 완성은 없다. 셋째, 연설문 담당자는 자아가 없다. 그래서 스피치 라이팅은 고스트 라이팅(Ghostwriting)이라고도 불린다. 대통령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참모진이 대변인과 연설비서관실 사람들이다. 늘 대통령의 생각과 주파수를 맞추고, 대통령의 눈과 귀와 입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연설비서관실에서 '막내 필사'로 일했던 장훈 전 행정관. ⓒ 장훈
리더의 글쓰기에 담긴 메시지 전략
이 책은 3개의 큰 주제로 구성돼 있다. 1부는 '대통령의 말과 글로 일한다는 것'. 청와대 연설문·보고서 작성에서 지방정부에서의 메시지 작업, 대선 TV토론, '3D·3무 업종'이라 부르는 연설비서관실이 하는 일을 다룬다. 2부는 '소통하는 글쓰기, 설득하는 연설'. 글쓰기를 '소통'으로 정의한다. "나는 내 글의 독자를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기획·질문·눈높이·말하기·메시지 관리로 이어지는 단계를 짚는다. 3부는 '리더의 글쓰기 실전 전략'. 단어, 문장, 문단, 편집과 퇴고로 좁혀 들어간다. "단어의 해상도를 높여야 글의 해상도가 높아진다", "제대로 설계한 문단은 그 자체로 전략이 된다" 같은 장 제목에서부터 저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현장성'이다. 표지에 박힌 한 줄, "리더의 언어는 정교한 전략이다"는 단순한 광고 카피가 아니다. 장훈은 연설문을 "최고 명문을 쓰는 일이 아니라,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청중과 소통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대통령의 한 문장, 도지사의 메시지, 시장의 발표문, 총리의 연설문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조직의 방향과 책임을 드러내는 도구다. 그래서 리더의 글쓰기에 필요한 것은 문학적 재능이 아니라 정확한 판단, 상대에 대한 이해, 메시지의 전략이라는 게 저자의 일관된 입장이다.
장훈은 '소통형 글쓰기'는 문학적 재능이나 아름다운 문장의 기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문학이 아닌 이상, 좋은 글이란 결국 목적을 묻고, 독자를 파악하고, 핵심 메시지를 구조화하고,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과정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은 곧 좋은 기획이고, 좋은 보고이며, 좋은 의사결정이다. 이 책 3부에 등장하는 단어, 문장, 문단, 편집과 퇴고에 이르는 글쓰기의 기본 구성 요소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이 책이 갖는 또다른 장점이다. 다른 글쓰기 책에서는 통합적으로 잘 다루지 않았지만, 글쓰기의 중요한 기초이고 기본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전투에 비유하면 단어는 군수물자라 할 수 있다. 어휘라는 총알과 포탄이 없으면 전투는 어불성설이다. 문장은 전쟁을 수행할 군인이다. 군수품이 아무리 많아도 활용할 군인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문단은 부대이다. 군사가 아무리 많아도 부대로 잘 편제되어 있지 않으면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226쪽)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일을 잘 한다는 것"
단어는 점(點)이고, 문장과 문단이 선(線)이라면, 그렇게 이어져 만들어진 하나의 완결적인 글뭉치가 면(面)이라고 할 수 있다. 점(點)→선(線)→면(面)의 의미와 역할을 제대로 알게 되면, 더 탄탄한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기초 체력이 길러진다. 편집과 퇴고(推敲)는 또다른 글쓰기라고 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완성된 글쓰기는 없고, 마감만 있을 뿐'이라는 점은 글쟁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얘기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일을 잘 한다는 것"은 글머리와 일머리가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을 말해준다. 직장에서 보고서를 잘 쓴다는 것은, 내용을 제대로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쉽게 설명해 공감을 끌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연설문은 표현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소통하는 글쓰기"라는 말은 보고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높은 지위에 오르면 오를수록 문장은 더 낮아져야 한다. 높은 사람일수록 글이나 메시지의 영향력은 더 광범위하기 때문"이라는 장훈의 말을 많은 리더들이 되새겨보면 좋겠다. 그리고 AI 시대에도 왜 '인간의 글쓰기'가 필요한지는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숙제다. AI가 대신 할 수 있는 것과 대신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그러한 구분의 기준과 의미는 무엇인지부터 곰곰 따져볼 필요가 있다.
AI에게 글쓰기를 맡기고자 한다면, 그 글을 평가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역량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 특히, 세상을 이끌 리더들은 더욱 그런 역량이 필요하다. AI의 글쓰기 능력은 창조나 창의라기보다는 짜깁기 능력에 가깝다. 해 아래 새것 없다고 하지만, 기계적 짜깁기로 쓰인 글은 차갑고 공허할 때가 많다. (3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