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를 '위인'으로 추앙하는 게 맞을까?"
뜬금없는 질문에 아이들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책장에 꽂힌 세계 위인전마다 빠짐없이 등장하고, 그것도 맨 앞자리 차지인 그의 업적을 은근히 폄훼하는 질문이어서다. 콜럼버스라고 하면 세계사에서 우리에게도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에 버금갈 만큼 우러르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 뒤엔 어김없이 '신대륙의 발견'을 떠올리고, 대항해 시대를 열어젖힌 선구자로 각인되어 있다. 전 세계에 그의 이름을 딴 도시들이 숱하고, 콜롬비아 등 국가나 주의 명칭으로 쓰인 사례도 많다.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의 이름은 차라리 '보통명사'다.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개척으로 점철된 유럽의 역사에서 그의 위상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약탈당했던 식민지 원주민의 관점에서 보면 그를 존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기존의 '신대륙의 발견'은 '신항로의 개척'이라는 표현으로 이미 대체됐다.
그런데도 문명의 교류 관점에서 콜럼버스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고 반론을 펴는 아이도 적지 않다. 넓게 보면 지금의 '대서양 시대'의 물꼬를 튼 역사적 사건 아니냐는 거다.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의 원주민 학살과 약탈은 불가피한 충돌이라며, 그에게 책임을 묻긴 어렵다고 했다.
어릴 적 읽었던 위인전의 힘일까.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관행적 역사 인식은 고래 심줄보다 질기다. 여전히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표현을 더 익숙해하고, 유럽인들과 신대륙 원주민을 '문명'과 '야만'의 관계로 이해하려 든다.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에 경도되어 있는 셈이다.
"콜럼버스의 공을 높이 산다면, 이토 히로부미도 '위인'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유럽인의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고 자신을 강자와 동일시하는 아이들의 왜곡된 사고방식을 성찰하기 위해선 '충격 요법'이 필요했다. 콜럼버스와 이토 히로부미를 동일 선상에 두고 비교해 보도록 했다. 대번 아이들은 두 인물을 비교하는 게 가당키나 하느냐며 성토했다.
해마다 통계로도 확인되듯, 청소년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 인물 순위에서 안중근 의사가 5등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다.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한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침략의 원흉이자 우리 민족의 철천지원수로 믿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그는 가장 '유명한' 일본인이다.
콜럼버스와 이토 히로부미의 차이라면, 피해자가 '남'이냐 '우리'냐 뿐이다. 우리와 상관이 없는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다면 '위인'이 될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유럽이 아메리카를 노략질한 것과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건 엄연히 다르다는 거다.
"만약 우리가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면, 이토 히로부미가 '위인'이 되고 콜럼버스가 '원흉'으로 낙인찍히지 않았을까?"
마지막 질문에 아이들 다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관행적 역사 인식에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엔 동의했다. 콜럼버스를 '비범한 탐험가' 정도로 규정하기로 했다.
해초가 '무모'하고 '불가능'하다던 일을 시도한 이유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구호선단에 탑승한 한국인 활동가 '해초(28, 김아현)'와 한국계 미국인 활동가 '승준(26, 조나단 승준 리)'이 지난 2일 <오마이뉴스>에 전달해 온 사진. ⓒ 승준 제공
부러 먼 길을 돌아왔다. 평화운동가 해초(본명 김아현)의 활동에 대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꺼낸 화두였다. 지난해부터 지중해 공해상에서 이스라엘군에 의해 두 차례나 나포되어 억류됐다는 소식에 몇몇 아이들조차 그를 '트러블 메이커'라고 조롱했다.
그에 대한 아이들의 맹목적인 편견을 어떻게든 바루어주고 싶었다. 그의 인도주의적 실천에는 '무모하다'거나 '순진하다'는 수식어가 바늘과 실처럼 따라붙곤 한다.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봉쇄를 뚫고 구호물자를 전달하려는 건 애초 불가능한 일이라는 지적이다.
오죽하면 돛단배에 몸을 싣고 지중해를 건너겠느냐는 호의적인 반응도 더러 있지만, 가자 지구의 고립을 해소할 수 있는 실효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이들이 훨씬 많았다. 남의 나라 전쟁에 개입해서 좋을 것 하나 없다는 현실론도 비등했다. 강대국에 치여 사는 팔레스타인의 숙명이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평화를 염원하고 인도주의를 실천하는 그의 확고한 신념에는 공감하지만, 그의 '불법 행위'에 대해선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여행을 금지하는 지역에 들어가는 건 엄연한 불법이라는 거다. 그의 여권을 즉각 무효화한 정부의 대응이 적절했다는 반응이다.
만약 정부가 그의 행위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공정성 논란에 휘말릴 수 있다고 아이들은 우려했다. 개신교 신자들이 선교를 목적으로 여행 금지 국가에 들어가는 경우 등을 예로 든 셈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공정성은 지고지선의 가치다. 정치적, 사회적 맥락은 그다음 문제다.
그의 행위가 이스라엘과의 외교적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미국과의 관계를 껄끄럽게 만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개인의 신념이 국익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이구동성 이스라엘의 반인권적 폭력을 지적했지만, 약육강식의 냉혹한 국제 질서는 어쩔 수 없다고도 했다.
"비유컨대, 100여 년 전이라면 우리가 팔레스타인이고 지금의 이스라엘이 일제였다. 다른 나라 사람이 생존의 위기에 직면한 우리를 돕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가로질러 오는데, 일제가 나포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벌어진 거다. 이때 남의 나랏일에 개입하지 말라고, 약소국의 숙명이라고, 국익을 위해 인도주의 신념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매조지듯 던진 질문에 콜럼버스와 이토 히로부미를 비교할 때와 흡사한 반응을 보였다. 이스라엘의 시각으로 전황을 이해하고 자신을 강자와 동일시하는 건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았다. 또, 한 세기 전과 지금의 국제 질서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는 건 온당치 않다고 얼버무렸다.
자발적으로 콜럼버스와 이스라엘의 입장에 서는 아이들의 관점을 뒤집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어릴 적 읽은 위인전만 핑계 삼을 일도 아니다. 언론과 교과서조차 끊임없이 강자와 주류를 대변한다. 그러면서도, 우리 편을 든 외국인에 대해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상찬한다.
예컨대, 국권 피탈 직전 일제의 침략에 맞서 조선인의 저항을 전 세계에 알린 영국의 언론인 베델과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했던 미국인' 헐버트 목사는 우리에게 진정한 위인으로 칭송된다. 제국주의의 광풍 속에 영국과 일본이 동맹을 맺고 미국과 일본이 협약을 체결한 상태였지만, 그들은 기꺼이 약소국인 조선의 편에 섰다. 국익보다 개인의 신념을 택한 것이다.
팔레스타인 가자 주민들에게 해초의 활동은 100여 년 전 조선에서 베델과 헐버트가 벌인 그것과 다를 게 없다. 기억하고 기려야 할 인물이라며 둘의 공적을 교과서에까지 수록해 놓고선 지금의 해초를 비난하는 건 이율배반적이다. 인도주의보다 국익을 앞세울 때 세상은 '정글'이 된다.
"단지 가자 지구에 닿고 싶었을 뿐"

▲지난 5월 23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21회 들불상 시상식에서 평화운동가 해초가 팔레스타인 국기를 들고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 들불기념사업회
최근 해초는 제21회 들불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사단법인 들불열사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들불상은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인권 운동에 헌신한 이를 매해 선정해 수상하고 있다. 윤상원과 박기순 등 들불 야학 출신 5.18 열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그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행하고 있는 국가 폭력이 1980년 신군부가 광주 시민을 학살한 그것과 다르지 않다며,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국경을 넘어선 연대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단지 가자 지구에 닿고 싶었을 뿐"이었다는 그의 짤막한 소감이 큰 울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