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0일부터 13일까지 다녀온 3박 4일 일본 여행기.
아침부터 든든하게 챙겨 먹었다. 호텔 조식인데도 밥맛이 집밥처럼 편안했다. 다양한 메뉴가 입에 딱 맞았다. 특히, 싱싱한 야채와 윤기 흐르는 하얀 쌀밥을 김에 싸 먹으니 짭조름한 감칠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오늘은 긴 코스라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해야 하니 아침을 넉넉히 먹어두라는 아내의 다정한 권유에 맛나게 그릇을 싹 비웠다. 여행길에서는 든든한 아침 한 끼가 하루의 힘이 된다. 버스 창 너머 밖으로 보이는 일본의 아침은 참 맑고 깨끗하다.
"일본의 알프스 비경 알펜루트를 탐방하는데 이번엔 정말 날씨 복을 받았네! 오늘 설벽은 얼마나 눈부실까?"
나는 이번이 세 번째 일본 여행인데, 이토록 청명한 적은 드물었다. 하늘은 티 하나 없이 푸르고, 멀리 펼쳐진 설산은 병풍처럼 이어졌다. 우리가 가는 길은 일본 북알프스의 절경을 가로지르는 알펜루트. 총길이 86km는 오오기사와에서 출발하여 다테야마까지 산맥을 관통하는 대장정이다.
전기버스를 타고 구로베댐으로
오전 10시, 오오기사와 역에서 드디어 대장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역에 도착하니 바람이 제법 매섭다. 출발지 산 아래와는 전혀 다른 공기에 우리는 서둘러 겨울 파카를 꺼내 입었다. 옷장을 열어 겨울을 입는 기분, 이제 정말 설산의 품으로 들어간다는 실감이 났다.
오오기사와 역에서 가장 먼저 탄 전기버스는 배기가스 하나 없이 조용히 긴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터널을 빠져나와 마주한 거대한 구로베댐은 탄성을 자아냈다.
"세상에나! 이 높은 곳에 있는 호수의 저 물빛 좀 봐!"
에메랄드빛 물이 넘실거리고, 양옆으로는 잔설이 남은 산들이 댐을 호위하듯 서 있었다. 171명의 희생과 수많은 이들의 땀으로 일궈낸 인간 의지의 산물을 지나, 우리는 더 깊은 설산의 심장부로 향했다.

▲거대한 위용을 드러낸 구로베댐과 에메랄드빛 호수. 인간의 강인한 의지와 대자연이 빚어낸 경이로운 조화가 탄성을 자아낸다. ⓒ 전갑남
댐 전망대를 오르내리면서 넓은 댐 위를 걷다 보니 어느새 이마와 등에 땀이 흥건하다.
"덥다 싶으면 찬 바람이 불어주니 참 좋네. 이런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5분 여를 오르는 동안, 창틈으로 스며드는 서늘한 기운이 기분 좋게 땀을 식혀주었다. 붉은 케이블카는 가파른 산비탈을 거의 직각에 가깝게 치고 올라갔다. 정상부 매점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오니 발아래로 하얀 눈이 끝없이 펼쳐졌다. 설산 골짜기는 녹아내린 눈물이 은빛 물줄기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하늘 위를 날아 신선의 세계로

▲푸른 하늘과 하얀 잔설 사이를 가로지르며 다이칸보로 향하는 붉은 로프웨이. 허공을 지나는 순간은 마치 신선이 된 듯 아찔하고 강렬하다. ⓒ 전갑남
이제는 로프웨이로 갈아타고 공중을 가로지르니, 아래로는 까마득한 계곡이 펼쳐졌다.
"어머나, 당신 이것 봐요! 우리 지금 구름 위를 둥둥 날아가는 것 같아!"
마치 신선이 된 기분으로 도착한 해발 2,316m의 다이칸보. 이곳 옥상 전망대에서 보는 에메랄드빛 호수와 손에 잡듯 가까운 설산은 환상적이었다. 옆 설산의 저 아찔한 경사면에서 스키를 즐기는 이들을 보며 아내가 한 마디 거든다.
"어휴, 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저 사람들은 참 대단하네!"
하얀 은세계 속을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그들의 질주에서, 대자연에 도전하는 인간의 뜨거운 활력이 옥상 위 우리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무로도에서 알펜루트의 정점을 찍다

▲해발 2,450m 무로도 평원에 내려앉은 하얀 만년설과 대형 버스들이 가득한 터미널 전경. ⓒ 전갑남
해발 2,450m 무로도에 도착하니 허기가 밀려왔다. 기다리던 점심 메뉴는 정갈하게 담긴 장어밥 도시락이었다. 뚜껑을 열자 달큰하고 짭조름한 장어 양념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부드러운 장어 한 점을 밥 위에 얹어 입에 넣으니 여정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드디어 하이라이트인 '눈의 협곡'으로 향했다. 엄청난 인파와 그보다 더 압도적인 눈의 장벽이 우리를 맞이했다. 내친김에 설벽 제일 아래쪽까지 내려가 보았다. 가까이서 마주한 설벽의 최대 높이는 무려 11m. 곁을 지나는 대형 버스가 마치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무로도 ‘눈의 협곡’ 하이라이트인 11m 최고지점 설벽. 거대한 시간의 벽 앞에 선 인간의 존재가 작고 소박하게 느껴진다. ⓒ 전갑남
가까이서 본 설벽의 단면은 무척 경이로웠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눈이 층층이 쌓여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한 번의 눈이 내리고 다시 그 위에 다른 눈이 쌓이며 만들어진 저 결들은, 지난겨울 다테야마가 견뎌온 시간의 기록이자 지층 같았다. 인간이 깎아낸 그 거대한 시간의 벽 앞에서 자연의 위엄을 다시금 실감했다.
"추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포근하네?"

▲지난겨울이 견뎌온 눈의 결을 온몸으로 느껴보는 여행자. 하얀 설벽 앞에서 아이처럼 설레어 하는 모습이 봄날의 꽃처럼 화사하다. ⓒ 전갑남
아내의 말처럼 차가운 눈의 벽 사이로 살갗을 스치는 공기엔 묘하게 부드러운 온기가 섞여 있었다. 하얀 만년설이 산을 덮고 설벽이 길을 막아선들, 계절은 여기서도 봄인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아내와 친구분은 아이처럼 좋아하며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봄과 여름, 겨울을 한꺼번에 맛보는 색다른 여행이 믿기지 않는다며 환하게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이 인파 속에서도 꽃처럼 피어났다.
다테야마로 가는 길, 소묘폭포를 만나다

▲한참을 내려오려면서도 눈의 나라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 전갑남
하산하는 길, 정점을 찍었던 설벽의 높이가 고도가 낮아짐에 따라 차츰 낮아지기 시작했다. 낮아진 설벽의 꼬리는 마치 거대한 흰 뱀의 몸통처럼 구불구불 휘어지며 끝없이 이어졌다. 설원 끝까지 맥을 이어가는 그 유연한 곡선을 따라 한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운전기사님이 차를 멈춰 세운다.
"자, 오른쪽을 보세요. 저게 바로 소묘폭포예요. 기가 막히죠?"
기사님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일본에서 가장 낙차가 크다는 명성답게 그 위용이 대단했다. 설산의 눈이 녹아 만들어진 그 힘찬 물줄기는 마치 대지가 내뿜는 거친 숨소리처럼 들렸다. 하산길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그 장엄한 풍경에 우리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다시 따스한 봄으로
길을 재촉하자 흰 눈은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싱그러운 초록 숲이 우리를 반겼다. 은빛 설원을 지나 산 아래로 내려올수록 계절의 색깔이 마법처럼 바뀌기 시작했다. 하얗게 얼어붙었던 세상이 어느새 싱그러운 연초록빛으로 물들어가는 풍경을 보며 아내가 환하게 웃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겨울을 지나 다시 진짜 봄으로 돌아왔네요."

▲산 아래 다테야마 역 근처에서 올려다본 풍경. 봄날의 싱그러운 초록 수목과 눈부시게 푸른 하늘 너머로, 방금 전 우리가 지나온 하얀 북알프스의 설산이 아스라한 잔상처럼 서 있다. 겨울과 봄이 한 폭의 그림처럼 교차하는 순간이다. ⓒ 전갑남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과 평화로운 마을들을 지나 도착한 다테야마 역의 햇살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오늘 우리는 단순히 산을 넘은 것이 아니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인간의 시간에서 자연의 시간으로 잠시 건너갔다 돌아온 듯했다.
설산과 하늘, 폭포와 인간이 함께 지나가는 이 거대한 자연의 길, 그 여운은 오랫동안 가슴속에 만년설처럼 남아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