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의 시간, 그리고 1084번의 법 위반
지난 2025년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태안화력발전본부 근로감독 결과를 보고 참담함을 넘어 깊은 분노를 느꼈습니다. 지난 2018년 고 김용균 노동자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을 때 적발된 법 위반이 1029건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났는데, 이번에 고 김충현 동지의 사고 이후 돌아온 성적표는 1084건의 법 위반과 7억 3천만 원의 과태료였습니다.

▲"빛을 만드는 노동자".태안화력 故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영결식 ⓒ 공공운수노조
지난 6년 동안 한국서부발전은 엄청난 예산을 들여 안전 조직을 만들고 문화를 바꿨다고 자랑해 왔습니다. 하지만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현장은 바뀐 게 없고, 안전은 오히려 뒷걸음질 쳤다고 봅니다. 공기업으로서 책임감 있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그 대가는 고스란히 하청 노동자의 목숨으로 치러지고 있습니다.
상생을 약속했던 '태안TF', 그러나
원래 '태안TF'는 이렇게 허망하게 끝날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지난해 8월 19일, 김충현 대책위는 고용노동부 서산출장소에 한전KPS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의 안전한 현장 복귀를 촉구했습니다. 현장의 위험 요인을 개선하고, 노사 합동 점검과 안전보건 관리체계 개선, 그리고 구체적인 복귀 프로그램을 마련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이를 위해 노동자 측(한전KPS 비정규직지회, 김충현 대책위)과 회사 측(서부발전, 한전KPS), 그리고 정부(고용노동부)가 모두 참여하는 '노·사·정 TF'를 공식 출범시켰던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다시는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터로 돌아갈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대자는 최소한의 사회적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2월 12일에 열린 회의에서 원청인 한전KPS가 들고 나온 '안전보건개선계획서'는 이 약속을 정면으로 배신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계획서에서 정말 중요한 조치 사항들은 대부분 '본사 판단 사항', '발주처 소관', '협력업체 몫'이라며 담당자 이름과 조치 결과 칸을 비워뒀습니다. 동료가 목숨을 잃은 현장을 앞에 두고, 원청 및 발주처는 서로에게 안전 책임을 떠넘기는 '핑퐁 게임'에 다름 없습니다.
심지어 한전KPS는 표결로라도 이 부실한 계획서를 강행 처리하겠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현장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TF를 자신들의 면피용 통과의례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위험의 외주화를 끝내는 길, '직접 고용'뿐입니다
왜 이런 비극이 매번 반복되는 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김용균 특조위에서 가장 먼저 권고했던 핵심 사항, "연료·환경설비 운전 및 경상정비 노동자의 직접고용 정규직화"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험한 일은 여전히 외주화되어 있고, 2차 하청 노동자들은 여전히 안전 울타리 밖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먼지 가득한 현장에서 마스크 한 장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 문제만 생기면 "우리 소관이 아니다"라며 고개를 돌리는 원청. 이 거대하고 기형적인 다단계 구조가 결국 김충현이라는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1호기 폐쇄와 2호기 중단, 그 문턱에서 느끼는 배신감
지금 현장 상황은 한층 더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태안화력 1호기는 문을 닫았고, 이제 2호기마저 가동 중단을 앞둔 상황입니다. '에너지 전환'이라는 거창한 말 속에 기계는 하나둘 멈추고 있지만, 정작 현장 노동자들에게 했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정규직화 약속은 흐지부지되었고, 우리 노동자들은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고용 불안과 언제 다칠지 모른다는 현장의 위험 속에서 이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설비가 완전히 문을 닫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저 쓰고 버려지는 '소모품' 신세일 뿐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건 최소한의 대화 창구마저 닫혀버렸다는 사실입니다. 한전KPS는 논의를 끝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존권이 걸린 정규직 전환을 논의하기 위한 '노사정 협의체' 또한 사실상 멈춰 서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회의 몇 번 거부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김충현 동지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위험의 외주화'를 끊어낼 유일한 통로인 정규직 전환 논의 자체가 막힐 수 있는 사안입니다. 원청과의 대화가 끊기는 한, 현장의 안전은 절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김충현의 1주기, 거꾸로 흐르는 시계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김충현 동지가 떠난 지 1년이 되는 지금, 한전KPS는 진정성 있게 대화에 나서야 합니다. 멈춰버린 정규직 전환의 시간을 다시 돌리고, 노동자가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떠나간 동지 앞에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이자 상식입니다. 더 이상 외주화된 위험 앞에 노동자들이 무력하게 내몰려서는 안 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전KPS비정규직지회 정철희 태안분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