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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가는 날. 서둘러 밥을 해 먹고 집을 나섰다. 평소 같으면 드라마나 예능을 한 편 보면서 느긋하게 저녁 시간을 보내지만, 그렇게 늑장을 부릴 시간이 없다. 지난번 밭에 갈 때 여유를 부리다 해가 넘어가고 주위가 어둑 해지는 바람에 물 조리개를 들고 뛰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캄캄해지기 전에 일을 다 마치는 게 목표다(관련 기사 :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도시 농부 부부가 해 질 때까지 한 일).

▲등산 가방이 텃밭 가방으로남편의 등산 짝꿍이 텃밭 도우미로 변신 ⓒ 김효숙
설거지는 딸에게 넘겨주고 겉옷을 걸치자마자 현관으로 내달렸다. 남편은 배낭을 지고 나는 장바구니를 둘러멨다. 20년 가까이 남편의 등산 단짝이던 배낭이 이제는 텃밭 가방으로 변신했다. 가방에는 모종삽과 호미 장갑 등 밭일 도구와 잎채소 담을 봉지가 늘 대기하고 있다.
우리는 목을 빼고 기다릴 텃밭 채소들 생각에 잰 발걸음으로 밭을 향했다. 생각보다 해가 길어진 탓인지 햇살이 꽤 따가웠다. 이제 "더워 더워" 할 날들만 남았나 보다. 우리는 걸음을 서두르면서도 종일 있었던 얘기를 나누었다. 집에 있을 땐 밥 먹을 때 빼고는 각자 자기 공간에 박혀 지내지만, 집을 나서면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하하 호호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모든 게 신기한 초보 농부

▲잘 자란 잎채소들텃밭에서 쑥쑥 자라는 상추와 로메인 겨잣잎 ⓒ 김효숙
멀리 텃밭이 보인다. 밭에는 잡초를 뽑고 물을 주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녀석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해서 돌계단을 겅중겅중 뛰어오른다. 첫 아이를 낳고 모든 게 궁금하고 놀랍던 그때처럼 밭에 올 때마다 우리가 심은 작물들이 자라는 게 그렇게 신기하고 예쁠 수가 없다.
3월에 심은 상추 모종은 뿌리를 튼튼하게 내렸는지 풍성한 잎을 매번 선물로 내어준다. 지난달에 심은 로메인과 아삭이상추, 겨잣잎도 솎아낼 만큼 자랐다. 상추에는 갖가지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다. 날마다 햇살을 충분히 받으며 자란 상추 덕인지 요즘은 잠들면 깨지 않고 새벽녘까지 잔다. 효자가 따로 없다.
고추와 파프리카, 가지 모종은 잎채소들과 달리 심은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했는지 심을 때보다 별로 자라지 않았다. 파프리카는 잎이 자꾸 누렇게 변하고 가지는 줄기가 말라 보였다. 초보 농부는 자꾸 한숨이 나온다. 도대체 뭘 잘못한 건지 모르겠다. 옆의 밭에서 물 주던 이가 슬며시 거들었다.
"거름 주셨어요? 웃거름을 줘야 잘 자라요."
농사는 역시 어렵다. 때 맞춰 영양분도 공급해 줘야 하는 걸 모르고 그저 물만 잔뜩 주었다.
대파 모종이 결국 쓰러지다
그런데 우리 밭에 골칫거리는 따로 있었다. 바로 대파 모종이다. 심을 때는 실파처럼 가늘었지만 한 달만 지나면 손가락 마디만큼 굵어질 거라 믿었다. 보름 전까지는 그럭저럭 크는 것 같더니 지난주부터 하나둘 픽픽 쓰러졌다. 급기야 이날은 모두 말라 죽어있었다. 한숨이 푹푹 쏟아져 나왔다.
지난번에 왔을 때, 쓰러진 대파를 보고 안쓰러워 AI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대답은 간단했다. 물을 많이 주거나, 날씨가 춥거나, 비료를 너무 많이 주면, 대파가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고 했다. 풀리다 못해 여름 날씨를 방불케 하니 날씨 때문은 아닐 거라 여겼다. 구청에서 준 비료를 땅에 골고루 섞지 못했던 것일까? 물을 너무 많이 주었나? 남편과 나는 파밭에는 물을 덜 주고 상태가 좋아지기를 기다렸지만, 결국 모두 다 처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말라 쓰러진 대파 모종모조리 말라 버린 텃밭의 대파 ⓒ 김효숙
"세상에나!"
우리는 막연히 잘될 거라 기대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걸 후회했지만 이젠 방법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대파를 살려낼 방법은 없다며 남편은 서둘러 대파를 걷어냈다. 호미로 흙을 뒤적여 다시 밭을 일구더니 묵은 무씨를 뿌렸다. 나는 자꾸 쓰러진 파 모종에 눈길이 갔지만 애써 외면하고 상추와 로메인, 겨잣잎을 솎았다. 울긋불긋 상춧잎과 푸릇푸릇한 로메인 잎이 가져간 봉지에 가득 찼다. 시무룩했던 내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고개를 끄덕이게 한 지혜
양손 가득 잎채소를 들고 오면서도 쓰러진 대파 모종과 힘없는 고추와 가지가 눈에 아른거렸다. 남편은 집에 돌아와 곧바로 어머님께 전화를 걸었다. 밭 한가운데에서 말라 죽은 파 모종 사진을 보여 드리며 걱정을 쏟아 냈다.
"엄마, 대파가 다 말라 죽었어요."
"아이고, 밭 가장자리에 뉘어서 심어야 하는데, 똑바로 심으면 파가 힘들어해."
우리는 대파 모종을 사다가 두어 뿌리씩 줄지어 똑바로 세워서 심었던 일이 후회스러웠다.

▲텃밭 상추와 로메인텃밭에서 햇살을 받고 잘 자란 잎채소들 ⓒ 김효숙
"고추 모종은 잎을 따줘야 키가 커요?"
"잎도 그렇지만 곁가지가 나면 잘라주어야 원 줄기가 위로 뻗는다. 그리고 웃거름도 줘야 해."
구순(九旬)을 사신 어머님은 켜켜이 쌓인 당신의 농사 지식을 아낌없이 나눠주셨다. 초보 농부는 텃밭 채소들에 무척 미안했다. 첫날 구청에서 나눠준 비료를 주고는 할 일 다 했다고 두 손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정성을 들이지 않고 왜 이렇게 자라지 않냐고 모종들만 타박했다. 모르면 물어서라도 제대로 알아보고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그저 남들 하는 양을 곁눈질하고 아는 척했던 게 화근이었다.
초보 농부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다음번에 갈 때는 좋은 비료를 구해서 웃거름을 주리라. 그리고 곁가지도 잘 쳐서 쑥쑥 자라게 해주리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카카오 브런치와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