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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7 19:44최종 업데이트 26.05.17 19:45

근로정신대에서 고생하고 5.18 계엄군에게 구타 당하고

일제와 신군부, 두 번의 격랑을 견딘 김혜옥 할머니의 생애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어린 소녀들이 여자정신대 깃발을 앞세우고 제복을 입은 일본인 안솔에 따라 신사참배에 동원되고 있다. 1944년 6월.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어린 소녀들이 여자정신대 깃발을 앞세우고 제복을 입은 일본인 안솔에 따라 신사참배에 동원되고 있다. 1944년 6월. ⓒ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일 먼저 손을 들었어. 속으로 무척 좋았지. 일본에 가서 여학교에 다닐 수 있다니 기회다 싶었지. 내 얘기를 듣고 따라간 사람도 많았을 거야. 나주 김 부잣집 딸도 간다고 하니까. 그땐 대부분 없는 집 애들이 많았거든."

허기도 면하기 어려운 일제 식민지 시절이었지만 장사를 크게 했던 부모 덕에 어려움이란 모르고 자랐다. 그래도 가슴 한편에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있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일본에 가면 일하면서도 여학교에도 갈 수 있다'는 일본인 교장 선생의 말은 그의 가슴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김혜옥 등 전남 나주초등학교 졸업생과 6학년 등 24명은 그렇게 여수항으로 출발하는 열차에 올랐다. 목포, 광주, 나주, 순천, 여수 등지에서 여수와 시모노세키를 운항하던 관려연락선에 몸을 실은 사람은 대략 150여 명. 일본의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던 1944년 5월 말이었다. 그의 나이 고작 겨우 열세 살.

부푼 꿈에 일본 나섰지만 비행기 공장에서 중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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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땅 시모노세키에 도착하면서도 그저 뛸 듯이 기뻤다. 이제 창창한 앞길만 남은 것 같았다. 목적지는 일본 항공기생산의 중심지였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여자근로정신대원들은 철저히 군대식 편재였다. 출신지별로 대대, 중대, 소대 등으로 편재됐고, 대원들 중에 나이가 많거나 체구가 좋은 사람을 뽑아 중대장, 소대장을 뽑아 통솔하기도 했다. 전남지역에서 간 소녀들은 1중대로 편성됐다. 뒤이어 도착한 150여 명 충남 아이들은 2중대였다.

 마름모꼴 미쓰비시 마크가 달린 모자를 쓰고 일본인 관리자가 바라보는 앞에서 선반 기계 앞에서 작업 중인 소녀들
마름모꼴 미쓰비시 마크가 달린 모자를 쓰고 일본인 관리자가 바라보는 앞에서 선반 기계 앞에서 작업 중인 소녀들 ⓒ 자료사진

기대는 금방 꺾였다. 그에게 주로 배치된 일은 비행기 부품에 국방색 페인트를 칠하는 일이었다.

"냄새가 아주 고약해. 마스크라도 주면 좋으련만 환풍기도 없고…. 머리가 아파 의식을 잃고 쓰러진 적도 두 번쯤 돼."

학교는커녕 겨우 일본 역사를 소개하고 군가 등을 외우도록 하는 정도였다. 월급이란 건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공장의 관리자들은 걸핏하면 '조센징'이라며 모멸감을 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 12월 도난카이(東南海) 대지진이 발생해 공장이 붕괴하면서 전남에서 동원된 또래 6명 아이들은 건물더비에 매몰돼 현장에서 숨졌다. 그 또한 오른쪽 어깨에 철골이 떨어져 부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갔다.

연이어 연합군 폭격으로 공장이 쑥대밭이 되자 이들은 또 다른 생산시설이 있던 도야마 공장으로 다시 옮겨갔다. 배가 고팠다. 먹을 것이 없었다. 허기를 면하느라 밤이면 친구들과 몰래 빠져나와 인근 마을 밭에 들어가 오이를 따먹기도 했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고 속임수였다.

80년 5월 광주 ... "다 내 자식 같았으니까"

어느덧 해방과 함께 그녀도 마침내 꿈에 그리던 귀국 길에 올랐다. 1945년 10월 말이었다. 철모르고 일본에 끌려가 갖은 고생 끝에 다시 고향 땅을 밟았지만, 귀국 후 고향에서의 삶도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수녀가 되고 싶었어. 그런데 수녀원에 가려고 신체검사를 했더니 폐결핵이라는 거야. 안 된대. 일본에서 독한 페인트 냄새 때문에 고생한 것 때문인지 그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

1980년 5월이었다. 인근 화순에 살던 양동시장에 물건을 사기 위해 광주로 나섰다가 금남로 한일은행 앞에서 끔찍한 상황과 맞닥뜨렸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계엄군한테 붙잡혀 구타당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휩쓸리고 말았다.

"그땐 무서운 것도 몰랐어. 다 내 자식 같았으니까. '내 아들이다. 내 아들 내놔라' 했지."

계엄군을 제지하다 구타 당한 그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말았다. 힘으로는 처음부터 안될 일이었지만, 어머니 심정에서 아들 같은 젊은이들이 당하고 있는 것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 80년 5월 광주시민들은 이렇게 분노하고, 이렇게 함께 떨쳐 일어섰다.

"당신 딸이라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일본 법정 흔들어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에 나선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 지원단체 및 변호사들과 함께 소장을 접수하기 위해 법원으로 향하는 모습. 1999년 3월 1일.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에 나선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 지원단체 및 변호사들과 함께 소장을 접수하기 위해 법원으로 향하는 모습. 1999년 3월 1일. ⓒ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원고 할머니들이 일본 지원단체가 마련한 기자회견 자리에 섰다. 마이크를 잡고 있는 분은 양금덕, 맨 오른쪽이 김혜옥 할머니. 1999년 3월 1일.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원고 할머니들이 일본 지원단체가 마련한 기자회견 자리에 섰다. 마이크를 잡고 있는 분은 양금덕, 맨 오른쪽이 김혜옥 할머니. 1999년 3월 1일. ⓒ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그후 일본을 상대로도 싸움에 나섰다. 1999년 3월 1일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동료들과 함께 손해배상 소송에 나선 것이다. 그의 나이 이미 69세였다.

소송이 시작되면서부터 그는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과 함께 종횡무진 활약했다. 특히 2001년 2월에는 아픈 발을 끌면서 목포 초등학교를 수소문한 끝에 산정초등학교에서 지진에 숨진 6명 중 유일하게 그때까지 실명이 확인되지 않고 있던 오길애의 학적부를 발견한 뒤, 이를 근거로 신안군청을 통해 제적등본까지 확인함으로써 마침내 그 유족을 찾아냈다. 그의 집념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어 2002년 3월에는 충남 출신 근로정신대 동원 피해자를 수소문하기 위해 '나고야소송지원회' 관계자와 함께 대전에 언론사를 찾아다니며 호소하는 등 갖은 애를 써보기도 했다.

작은 체구에도 투사적 기질을 가진 그는 일본 법정에서 누구보다 당당했다.

"나는 일본 때문에 송두리째 내 인생을 도둑맞았다. 당신한테도 귀여운 자식이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 딸이 이런 경우라면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이겠느냐?"

2003년 11월 27일 나고야 지방재판소에서 열린 두 번째 구두변론에서 그녀는 일본 담당 재판관을 향해 격정을 쏟아 놓으며 법정을 흔들어 놓았다.

역사의 질곡과 격랑... 못 다 이룬 '나고야의 한'

그러나 오랫동안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던 것은 큰아들과 원만치 않았던 관계 문제였다. 사춘기 시절 자신의 어머니가 일본군 '위안부'라고 여겼던 아들은 종종 평정심을 찾지 못했다.

"위안부 갔다 왔다고 처음에는 나한테도 제 '엄마' 소리도 안 했어. 재판 때문에 일본만 갔다 오면 죽을란다고 칼 들고 난리를 치길래 그 칼을 빼앗으려다가 손을 다치기도 했고."

뒤늦게 아들은 역사적 진실과 어머니의 외롭고 고단한 투쟁을 모두 이해하게 됐다. 2003년 5월 일본 지원단체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가 주최한 연극 '봉선화-조선여자근로정신대' 공연이 계기였다.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던 어머니를 따라 동행하게 되었는데, 공연을 통해 비로소 뒤틀린 역사의 굴곡을 다시 인식하게 된 것. 아들은 돌아오는 내내 어머니의 손을 꼭 쥐었다.

"그동안 여러 날을 모진 세월을 견뎌왔다. 오늘 이 자리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김 할머니는 나고야 공항을 빠져 나오면서 그동안 애써 준 일본 지원단체에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2008년 5월 뒤늦게 나주초등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수상한 양금덕 할머니를 축하하기 위해 동행한 지인들. 고이데 유타카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 사무국장 부부도 참석했다.
2008년 5월 뒤늦게 나주초등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수상한 양금덕 할머니를 축하하기 위해 동행한 지인들. 고이데 유타카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 사무국장 부부도 참석했다. ⓒ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양금덕 할머니의 나주초등학교 명예졸업장 수여식에 참석한 고 김혜옥 할머니의 모습. 2008년 5월.
양금덕 할머니의 나주초등학교 명예졸업장 수여식에 참석한 고 김혜옥 할머니의 모습. 2008년 5월. ⓒ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일본 소송은 1심, 2심에 이어 2008년 11월 11일 일본 최고재판소마저 기각하면서 끝내 패소했다. 생전 전 억울한 한을 풀어보고자 하는 그의 바람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광주의 한 영구 임대 아파트에 살면서 병마와 사투를 벌이던 김 할머니는 일본 소송에서 패소한 이듬해 2009년 7월 25일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10년 동안 후생연금 가입 사실 여부 확인을 외면해 오던 일본 정부는 2009년 12월 뒤늦게 후생연금 탈퇴수당이라며 '99엔'을 지급해 그의 사후 또 다른 파장을 불러왔다.

일제강점기에는 '여자근로정신대'로, 1980년 5월에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인생의 큰 격랑을 두 번이나 겪어야 했던 김혜옥 할머니. 국립 5.18 민주묘지 1묘역 6구역 67번에 안장된 김혜옥 할머니의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역사의 질곡과 사회의 격랑에서 언제나 따뜻한 인정과 정의로운 정신으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못 이룬 <나고야의 한>이 하늘나라에서 이뤄지기를 기원합니다."

 고 김혜옥 할머니의 묘비 뒷면
고 김혜옥 할머니의 묘비 뒷면 ⓒ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 다카하시 마코토 대표가 김혜옥 할머니 묘소를 찾아 깊이 머리 숙여 절을 올리고 있다. 2017년 5월 20일.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 다카하시 마코토 대표가 김혜옥 할머니 묘소를 찾아 깊이 머리 숙여 절을 올리고 있다. 2017년 5월 20일. ⓒ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김혜옥#근로정신대#518#나주초등학교#나고야소송지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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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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