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필자가 학교에 근무하며 경험한 사례들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다만, 해당 사례들이 특정되지 않도록 일부 내용을 가감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두툼한 자료집 하나를 들고 다시 찾아왔다. 직접 정리했다는 교과 참고자료였다. 책상 위에 내려놓은 자료집은 웬만한 단행본만큼 두꺼웠다. (AI생성 이미지) ⓒ 오마이뉴스
몇 년 전 일이다. 한 학부모가 담임교사를 거치지 않은 채 곧장 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시 후 호출을 받고 나도 그 자리에 갔다.
그는 앉자마자 준비해 온 요구사항을 쉼 없이 쏟아냈다. 아이의 학교생활 전반을 학교가 맞춤형으로 관리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급기야 담임교사의 수업 시간표까지 요구했다. 쉬는 시간에 상담전화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수업 시간표도 달라고 했다. 집에서 진도에 맞춰 직접 복습을 시키겠다는 말이었다.
그 뒤로도 그의 개입은 계속되었다. 교실에서 생긴 작은 찰과상은 학교의 안전관리 부실 때문이었고, 수업 시간에 아이가 조는 것은 교사의 역량 부족 탓이었다. 아이를 둘러싼 거의 모든 불편과 마찰은 결국 학교의 책임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그는 두툼한 자료집 하나를 들고 다시 찾아왔다. 직접 정리했다는 교과 참고자료였다. 책상 위에 내려놓은 자료집은 웬만한 단행본만큼 두꺼웠다.
"교과서가 편향돼 있습니다. 담당 교사에게 전달해서 수업에 참고하도록 해주세요."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전달하지 않자니 또 다른 민원이 이어질 것 같았고, 전달하자니 이제 막 교단에 선 초임 역사 교사가 받을 상처가 눈에 밟혔다. 며칠 동안 그 자료집은 내 책상 한쪽에 놓여 있었다. 결국 나는 그 자료집을 담당 교사에게 건넸다.
"교육적으로 무리한 요구입니다.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세요. 필요하면 도울게요."
젊은 교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료집을 천천히 넘겨보던 그는 깊은 한숨 끝에 조용히 말했다.
"괜히 학부모에게 휘말리고 싶지 않아요."
그 말에는 억울함보다 두려움이 먼저 배어 있었다. 그날 이후 그는 수업보다 민원을 더 걱정하기 시작했다. 교과서대로 가르쳐도 불안해했고, 그렇다고 학부모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은 더 두려워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낯선 절망감을 느꼈다. 학교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공간이 아니라, 상처 입지 않기 위해 서로 눈치를 살피는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며칠 뒤 다시 찾아온 학부모에게 나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교육에 대한 관심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교사의 전문적 판단 영역까지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는 냉소 섞인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교권이요? 발톱의 때만도 못한 교권. 흥!"
그 말을 듣는 순간 밀려온 것은 분노보다 허탈감이었다. 언제부터 학교와 교사는 이렇게까지 가벼운 존재가 되었을까. 더 두려운 것은 이런 일이 더 이상 일부 유별난 사람들의 일탈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해마다 학교 현장에는 더 많은 요구와 민원이 밀려들었고, 교실은 조금씩 교육의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응대하고 해명해야 하는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불안은 어떻게 교실을 시장으로 바꾸었나
나는 이 풍경을 단지 몇몇 학부모의 인성 문제로만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괴물 같은 장면은 어느 날 갑자기 진공 상태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오늘의 학교는 한국 사회 전체가 만들어낸 불안의 압축판에 가깝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자녀 교육은 단순한 성장 과정이 아니라 실패해서는 안 되는 생존 프로젝트가 되었다. 부모들은 극심한 경쟁 속에서 아이가 뒤쳐지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아간다.
생활기록부의 문장 하나, 수행평가의 작은 차이 하나까지 아이의 미래를 좌우할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다 보니 학교는 배움의 공간이라기보다 '입시 관리 시스템'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저출산은 이 불안을 더욱 증폭시켰다. 하나뿐인 아이에게 부모의 시간과 기대가 집중되면서 학교는 공동체적 공간이 아니라 내 아이를 위해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기관처럼 받아들여졌다.
어쩌면 많은 부모들 역시 이 경쟁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과잉 대응을 학습당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불안이 어느 순간 교육의 언어 자체를 잠식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학교를 향한 질문은 협력과 신뢰의 언어가 아니라 소비자 권리의 언어로 바뀌어갔다.
물론 학교 역시 완벽하지 않다. 부당한 일에 문제를 제기하고 항의하는 것은 학부모의 정당한 권리다. 그러나 교육적 관계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연대'가 아니라 '서비스 만족도를 평가하는 고객 관계'로 변하는 순간, 교실은 가장 먼저 병들기 시작한다.
교사는 점점 교육적 판단을 내리는 사람보다 민원을 관리해야 하는 사람으로 위축된다. 아이의 성장보다 학부모의 항의를 피하는 일이 우선되는 순간, 교육은 관계가 아니라 관리의 기술로 변질된다.
권위주의는 사라졌지만, 신뢰는 세워지지 못했다
과거 학교의 권위주의를 부정할 수는 없다. 체벌과 억압, 일방적 통제는 오랫동안 학교를 지배해 왔다. 민주화와 인권 의식의 성장은 그런 낡은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그것은 분명 필요한 변화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우리는 권위주의를 해체했지만, 그 자리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충분히 고민하지 못했다. 억압적 통제는 사라졌지만, 교육의 전문성과 공공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질서는 끝내 세워지지 못했다.
그 사이 학교에서 교육의 언어는 점점 힘을 잃고, 시장의 언어는 더욱 강해졌다. 학생과 학부모는 '고객'이 되었고, 교사는 점점 서비스 제공자처럼 취급되기 시작했다. 책임은 늘어났지만 신뢰는 줄어들었다.
2023년 서이초 사건 이후에도 학교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교사를 보호한다는 수많은 대책이 쏟아졌지만, 교실 안에서 교사는 여전히 가장 쉽게 소모되고 가장 쉽게 의심받는 존재로 남아 있다.
무너진 교실의 대가는 결국 모두에게 돌아간다

▲공교육이 약해질수록 어떤 아이들은 더 쉽게 고립되고 배제된다. (AI생성 이미지) ⓒ 오마이뉴스
우리는 이제 질문해야 한다. 교사를 전문적 권위를 지닌 교육자가 아니라 언제든 평가하고 압박할 수 있는 서비스 제공자로 대하는 사회는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 이것은 단지 교사의 자존심 문제만이 아니다. 공교육의 신뢰가 무너질 때 가장 먼저 흔들리는 것은 공동체의 기반이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정은 더 많은 사교육으로 이동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교육은 시험 대비를 도울 수는 있어도 서로 다른 배경의 아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공동체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공교육이 약해질수록 어떤 아이들은 더 쉽게 고립되고 배제된다. 교사가 민원과 갈등을 두려워해 훈육과 생활지도를 포기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보호받아야 할 약한 아이들의 자리다.
교사가 방관자로 물러나는 교실에서 아이들은 관계의 책임을 배우지 못한다. 불편함을 견디는 법도, 갈등 뒤에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다. 결국 학교는 성장의 공간이 아니라 각자의 권리만 주장하는 작은 시장으로 변해간다.
아이를 보호하는 일과 교사를 보호하는 일은 따로 존재할 수 없다. 교실이라는 공간은 그 둘이 함께 무너지고 함께 살아나는 하나의 운명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다시 세워야 할 것은 억압이 아니라 신뢰다
우리가 버려야 하는 것은 과거의 권위주의이지, 교육의 권위 자체는 아니다. 권위주의가 사람을 억누른다면 건강한 권위는 사람을 성장하게 만든다. 아이들은 두려움 속에서가 아니라 신뢰받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배움을 받아들인다.
지금 학교에 필요한 것은 체벌의 부활이나 과거로의 퇴행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교사를 잠재적 문제 인물이나 단순 서비스 노동자로 바라보는 시선을 넘어, 교육의 전문성과 공공성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학교는 시장의 매대가 아니라 공공의 광장이어야 한다. 학부모의 참여 역시 감시와 통제가 아니라 협력과 연대로 이어져야 한다.
나는 여전히 교단의 경계 위에 서 있다. 때로는 무력감을 느끼고, 깊이 지치기도 한다. 그러나 민원이라는 이름의 폭력 앞에 교실을 순순히 내어줄 수는 없다. 교실은 원래 누군가를 소비하는 곳이 아니라 함께 인간이 되어가는 자리였다.
그러나 지금의 학교는 점점 삶의 훈련장이 아니라, 즉각적인 만족과 끊임없는 응대를 요구하는 매대로 변해가고 있다.
교육의 권위는 강요로 세워지지 않는다. 교실이 더 이상 고객 응대 창구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배움터로 남을 수 있을지, 지금 우리는 그 마지막 갈림길 앞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