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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새벽 1시, 현관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남편이 퇴근했다. 평소라면 자지 않고 기다려 밥을 챙겨주며 하루 대화를 나누었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공모전에 낼 원고를 붙잡고 씨름하느라 진이 다 빠져버린 탓이다. 출력한 원고를 봉투에 담고 주소까지 쓰고 나니 기진맥진, 소파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가 남편의 목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서둘러 밥을 차려냈지만, 식탁 앞에 앉은 남편에게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우리 내일 찜질방이나 갈까?"라는 남편의 제안을 뒤로하고 나는 안방으로 직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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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창밖은 꾸무리하니 곧 비가 쏟아질 기세였다. 남편은 오전과 오후를 나누어 일하는 '겹벌이' 중이라 하루를 온전히 쉬는 날이 드물다. 그런 남편이 두 달 반 만에 통으로 쉬는 날을 맞이했다. 화창하지 않은 날씨 때문인지 그는 나들이보다는 휴식을 원했다. 내심 공부할 거리와 써야 할 원고가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남편의 천금 같은 휴무를 함께하는 것이 더 소중했다. 원고지 대신 목욕 가방을 챙겨 들었다.

우체국에 들러 전날 밤의 숙제였던 원고를 부치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찜질방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남편이 뜬금없는 고백을 했다.

"아침에 제미나이(AI)하고 좀 놀았어."
"뭐 했는데?"
"당신이 제미나이 활용을 잘하길래 나도 좀 발맞춰 보려고 ISA 계좌에 관해 물어봤지. 그런데 머리가 너무 아프네."

아침에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게 회사 업무인 줄 알았더니, 아내의 취미에 동참해 보려 애를 쓴 모양이다. 이제 우리 대화의 주인공은 아들이나 손주 이야기보다 AI나 내가 쓰는 동화가 되어가고 있다. 사실 남편은 나의 가장 열렬한 팬이자 1호 독자다. 지난번 내가 쓴 글이 라디오 '여성시대'에 소개되었을 때 나보다 더 감격하며 눈물을 훔치더니, 얼마 전 '삼강문학상' 당선 소식에는 마치 본인이 상을 받은 양 동네방네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남편은 내가 글을 쓰는 시간을 진심으로 존중해 준다. 본인에게는 낯설고 어려운 AI를 공부하려 했던 것도, 어쩌면 공부하고 글 쓰는 아내의 세계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그만의 서툰 사랑 고백이었을 것이다. 아내의 보폭에 맞춰 걷고 싶은 남편의 마음이 비 오는 날의 드라이브를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찾은 찜질방은 평일이라 한가했다. 뜨거운 가마 안에서 땀을 한바탕 빼고 나니 몸이 노곤해졌다. 어느새 옆에서 곤히 잠든 남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40년 가까이 가족의 울타리가 되어주느라 깊어진 눈가의 주름이 오늘따라 짠하게 다가왔다. 거칠어진 그의 손마디는 그동안 그가 견뎌온 성실함의 훈장일 것이다.

나는 답답함을 피해 잠시 밖으로 나갔다. 살랑이는 소나무와 대나무 사이로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삼시 세끼 동동거리며 밥상을 차리고, 공부하며, 틈틈이 글을 써서 나를 다잡아가는 일상. 그 치열한 시간 속에 이런 여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게 새삼 고맙고 행복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남편이 말간 얼굴로 나왔다. 옆에 앉은 남편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한마디 건넸다.

"당신, 오늘 엄청 예쁘네. 코도 더 작아져서 귀여운 것 같고. 얼굴에 장난기가 살살 도는 게 초등학교 때 개구쟁이였을 것 같아."

60 넘은 할미에게 이 무슨 가당치도 않은 말인가.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아직도 콩깍지가 안 벗겨진 건가 싶어 실룩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돌봐줄 아이도, 봉양해야 할 어른도 이제 없다. 오롯이 우리 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이 순간이 찜질방 바닥만큼이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평소 전신 마사지를 즐기는 나를 위해 지폐 몇 장을 살뜰히 챙겨온 남편의 마음 씀이 고마웠다. 그 투박한 손으로 건네준 마음이 전해져 코끝이 찡해졌다. 남편 덕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호강을 누리고 나니, 몸의 피로뿐 아니라 마음의 피로까지 말끔히 지워졌다. 전문 마사지 가게보다 훨씬 시원하고 가치 있었다.

앞으로도 우리 둘이 맞춰가며 살아야 할 시간이 많다. 부부란 서로의 사리사욕을 따지는 게 아니라, 서로의 평안을 위해 보폭을 맞춰가는 존재가 아닐까. 특별하진 않지만 소소한 뒹굴뒹굴함이 주는 위로를 가득 담아온 어느 비 오는 날의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찜질방나들이#남편#전신마사지#콩깍지#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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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가 좋아서 세종사이버대 문예 창작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해 정성껏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현재 브런치 작가입니다. 사는 이야기를 주로 씁니다. 가끔 음식 이야기도 씁니다. 삼강 문학상 수필 부문 신인상 당선. 2026 글로벌경제 시니어신춘문예 동화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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