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 기록화. ⓒ 한국문화재재단 월간 문화재 갈무리
이인리에서 공주읍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우금치고개다.
고개가 험해서 소를 몰고는 넘을 수가 없는 고개, 즉 '우금치(牛禁峙)'의 금(禁)자가 금(金)자로 바뀐 것이라고도 하고, 이 고개에 금광맥이 묻혀 있어 소(牛)만한 금덩어리가 들어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전한다.
여기서 동학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참패함으로써 〈보국안민〉·〈척왜〉의 깃발이 찢어지고,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시산혈해를 이룬 통한의 땅이다.
그날이었는지 몰라라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무엇이 남긴 것은
그날이었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의 죽은 몸 위에 가시덤불로 피니
넘을 수 없는 무엇을 넘기 시작한 것은
옛적에는 굶주린 사내들이 들어와
소 도둑이 되었다는 좁은 고갯길
흰 옷 입은 동학군들이 죽어 산을 이루던
이곳이었는데 몰라라.(후략, 김진경 '우금치의 노래')
1894년 12월 7일 동학군과 일본군·관군 사이에 벌어진 우금치 전투는 2만 동학군이 500명으로 줄어든 참담한 패배였다. 완전무장한 일본군은 이날 새벽부터 우금치에 매복하고 있었다.
서편을 향해 일본군은 뒤쪽에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가 진격해온 동학군 쪽으로 햇볕이 눈부시게 비치자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동학군은 눈이 부셔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땅 위에 거꾸러졌다. 일본군은 1대가 총격을 가하고 물러나주면 2대가 나가 재차 기어오르는 동학농민군을 향해 쏘아댔다. 시체 위에 또 시체가 쌓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죽어갔다. 교활한 일본군은 민가를 뒤져 한복으로 갈아입고 어깨에 동학깃발을 꽂은 다음 총을 숨겨 동학농민군에 접근하였다. 우군인 줄 알고 반가와 다가가는 소박한 동학농민군들에게 일본군은 사정없이 총격을 가했다. 우리나라 전사 사상 우금치 전투만큼 처절했던 격전은 일찍이 없었다.
우금치에서 7일 동안 전투가 계속되어 하루에도 4~50 여 차례나 이 고개를 뺏고 빼앗겼으며 종내에는 2만 여 명의 동학농민군 주력이 5백 여 명밖에 남지 않을 만큼 큰 희생을 치렀다. 우금치 계곡과 봉황산 마루는 스러진 동학농민군 사체로 하얗게 덮혔고 산밑 시엿골 개천은 여러 날 동안 줄곧 핏물이 홀렀다. (조경환, <역사의 고전장>)
잘 훈련된 일본군의 신식 무기에 동학농민군이 훈련도 받은 적 없이 구식 화승총이나 칼, 창으로 대결한 이 싸움은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오직 '제폭구민(除暴救民)'의 명분과 '척왜(斥倭)'의 의기로 싸움에 나섰다가 신식 무기의 위력 앞에 일패도지, 폭풍우에 흩날리는 낙엽과 같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충청감사 박제순(朴濟純 : 나중에 외부대신으로 을사오적의 일원) 휘하의 조선 관병에게 "총부리를 왜놈들에게 겨누어라. 왜 동족을 살상하느냐"고 외쳤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빗발치는 총알뿐이었다.
역사의 통한이 서린 우금치가 현대에 소환되었다. 1973년 2월 공주대·공주교대 교수와 향토사학자 등을 중심으로 '우금치 동학혁명 전적지 성역화 추진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정부의 지원으로 이곳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원혼을 달래고자 우금치 정상에 위령탑을 세웠다.
우금치의 아픈 사력은 또 다른 모습으로 이 위령탑에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서 어용사가로 알려진 이선근의 비문 내용 때문이다. 비문의 전반부는 우금치 전투의 사력을 기술한 다음 이렇게 이어졌다.
... 님들이 가신 지 80년, 5.16혁명 아래서 신생조국이 지금 동학혁명군의 구국정신을 오늘에 되새기면서 빛나는 10월 유신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의 피어린 언덕에 잠든 그 얼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 탑을 세우노니 오가는 천만대의 후손들이여!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영원무궁토록 이어받아 힘차게 선양하라.
5.16쿠데타와 10월 유신이 동학혁명으로 이어진다는 허튼 소리를 누군가가 정으로 '5.16' '10월유신' '대통령 박정희'를 쪼아버렸다.
덧붙이는 글 |
[횃불·촛불·응원봉, 동학농민혁명]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