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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3 11:15최종 업데이트 26.05.13 11:15

천왕봉을 포기하고 얻은 것, 멈춤이라는 용기

2박 3일 지리산 종주를 꿈꿨지만 연하천에서 멈춰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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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 지리산 연하천대피소에서 눈을 떴다. 산행 첫째 날부터 통증이 찾아왔다. 무릎은 욱신거렸고 허리는 뻣뻣했다. 담요도 없는 잠자리에서 높고 깊은 산속의 한기가 몸속까지 스며들어 다시 쉽게 잠들지 못했다.

휴대전화에서 날씨 예보를 다시 확인했다. 둘째 날은 구름이 더 많아질 뿐이었다. 하지만 천왕봉에 올라 백무동으로 하산할 셋째 날에 비 오는 시간은 새벽으로 앞당겨졌고 확률마저 높아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얇은 비옷을 비집고 들어올 빗물, 물기를 머금어 미끄러워질 하산길, 통증이 더해질 무릎에다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체력까지 경고는 분명했다.

가야 할까? 여기서 멈춰야 할까?

연하천대피소 표지판 안내표지판이 조명을 받아 빛났다. 연하천은 안개와 노을이 아름다운 연못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뜻에 어울리게 대피소는 아름답고 지리산 종주 산행을 하는 산객들에게 휴식과 숙박 공간이다.
연하천대피소 표지판안내표지판이 조명을 받아 빛났다. 연하천은 안개와 노을이 아름다운 연못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뜻에 어울리게 대피소는 아름답고 지리산 종주 산행을 하는 산객들에게 휴식과 숙박 공간이다. ⓒ 신극채

남은 생에 마지막일지 모를 지리산 종주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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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산행은 오래전부터 마음에 둔 일이었다. 더 늙기 전에 하고 싶은 목록 상단에 있는 지리산 종주다. 성삼재에서 시작해 천왕봉에 올랐다가 백무동으로 내려오는 2박 3일의 여정이다. 가볍게 떠났을 젊은 날과 달리 이제 노년의 길에 들어선 지금은 단순한 산행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 남은 생에 지리산 능선을 따라 온전히 걸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절박했다. 전날 저녁에 미리 꾸려놓은 배낭은 아침엔 더 묵직했다.

지난 10일 이른 새벽 기차로 출발해 남원에 내려 다시 택시로 성삼재 휴게소에 닿았다. 일요일인 데다 지난 1일부터 산불 통제기간이 끝나 아침인데도 등산객으로 붐볐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고지대 특유의 서늘한 공기는 청량감을 더했다.

등산화 끈을 고쳐 묶고 배낭끈을 어깨에 맞춘 뒤 허리끈도 더 조였다. 함께 온 동료는 내 배낭보다 더 무거운데도 별다른 내색이 없었다. 그는 산행 내내 앞서기보다 내 걸음에 보폭을 맞춰주었다. 사실 그가 없었다면 이번 산행을 결행하지 못했다.

노고단까지는 익숙한 길인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올 때마다 계절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주던 풍경도 길가에서 자라는 식물도 반갑고 새롭게 보였다. 좋은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찬 기운에 입었던 바람막이 점퍼를 벗고 발가락에 느껴지는 이물질을 빼려고 양말을 고쳐 신은 것 말고는 노고단휴게소까지 가뿐하게 올라왔다.

휴게소에 도착해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에게 산행 일정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이곳을 잘 아는 이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내 체력과 최근 산행 경험을 묻더니, 그렇지 않아도 37km로 짧지 않으므로 중간에 반야봉에 들르는 건 무리라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마지막 날, 12일엔 비 예보가 있어요. 그 점을 꼭 유념해야 합니다."

출발하기 하루 전 알아본 예보로는 늦은 오후에 비가 시작되었다. 그전에 산행을 마칠 것이라 예상했다. 강수량과 확률도 낮아 크게 염려되지 않을 비였다. 무엇보다 구름 한 점 없는 지금의 하늘과 운에 기대고 싶었다.

지리산 능선 노고단 고개에서 바라본 지리산, 늘 꿈과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지리산 능선노고단 고개에서 바라본 지리산, 늘 꿈과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 신극채
숙은처녀치마 잎은 뿌리에서 여러 개가 모여 나며 땅 위에 퍼진다. 숙은처녀치마는 고산지대에 자라고 처녀치마와 달리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다.
숙은처녀치마잎은 뿌리에서 여러 개가 모여 나며 땅 위에 퍼진다. 숙은처녀치마는 고산지대에 자라고 처녀치마와 달리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다. ⓒ 신극채

보랏빛 꽃과 재회, 그리고 찾아온 산의 경고

노고단 고개에서 돼지령으로 향하는 초입에서 이맘때면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던 '숙은처녀치마' 를 찾아보았다. 여전했다. 이름처럼 치마 같은 잎사귀를 널찍하게 땅에 붙이고 꽃대를 올려 고개를 숙인 채 보랏빛 꽃을 피웠다. "많이 보고 싶었다"라고 "또 보자"라고 혼잣말처럼 반가움을 낮게 건넸다. 내가 아는 자생지는 오직 여기뿐이다. 이곳이라야만 이 꽃을 만날 수 있듯이, 나 또한 지리산의 품에 들어와서야 지금의 내 형편을 제대로 마주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임걸령 샘터에서 물을 마시고 반야봉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는 노루목에서 잠시 머물렀다. 반야봉에 들르지 못한 아쉬움을 내려놓았다. 산길 양옆으로 노랑제비꽃, 개별꽃, 족두리풀이 꽃을 피웠다. 낮은 산에서는 이미 피고 졌을 꽃인데 천오백 미터에 이르는 능선길에서는 지금이 한창이었다.

예상했던 불청객이 찾아왔다. 무릎이 아팠다. 꽃구경과 걷는 재미에 잊었던 통증이 전해졌다. 무리하지 않도록 속도를 늦춰 식물 하나 풍경 하나 감상하며 걸었어도 올 것이 왔다. 점심을 먹으며 휴식 후 다시 걸으니 아픔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렇게 도착한 화개재에는 훼손지를 복원한다는 안내문이 서 있었다. 이곳은 본래 남원의 곡식과 하동의 소금이 거래되던 내륙과 해양이 만나는 곳이었다. 많은 탐방객의 야영과 취사로 훼손되어 복원 중이었다. 옛 장터의 활기는 사라지고 등산객의 쉼터였던 역할도 내려놓고 회복을 위해 쉬고 있었다. 화개재가 쉼의 시간을 갖듯 무릎을 위해 속도를 늦추고 멈추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토끼봉을 지나 명선봉으로 가는 길에서는 걷다 쉬다를 반복했다. 성삼재에서 출발하여 이곳에 이르면 체력이 소모되어 지치는 구간이라는 말이 체감되었다. 한 걸음마다 무거웠다. 오늘 밤을 보내기로 한 연하천대피소에서 전화가 왔다. 어디쯤 오고 있는지 확인하면서 가급적 6시까지 도착해 달라는 당부였다.

사실 이 구간은 발밑으로는 보랏빛 얼레지꽃이 능선에 가득하고 눈높이에는 연분홍 철쭉꽃이 화려했다. 하지만 전화 이후로는 고운 꽃을 눈과 카메라에 담을 여유가 없어졌다. 시간 내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거운 발을 옮겼다.

지리산 능선에 핀 봄꽃 1. 얼레지는 지리산 능선을 따라 연이어 피었고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었다. 2. 철쭉은 연분홍꽃을 피워 연달래라고도 부른다. 이처럼 흰색에 가까운 꽃도 간혹 피었다. 3. 노랑제비꽃은 우리나라에 40여 종에 이르는 제비꽃 중에서 유일하게 노란색 꽃이 핀다. 일정 높이의 산에서 자란다. 4. 동의나물은 습기가 많은 곳을 좋아하며 연하천대피소 주변에 가득했다. 독성이 강하므로 곰취로 오인하여 나물로 먹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리산 능선에 핀 봄꽃1. 얼레지는 지리산 능선을 따라 연이어 피었고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었다. 2. 철쭉은 연분홍꽃을 피워 연달래라고도 부른다. 이처럼 흰색에 가까운 꽃도 간혹 피었다. 3. 노랑제비꽃은 우리나라에 40여 종에 이르는 제비꽃 중에서 유일하게 노란색 꽃이 핀다. 일정 높이의 산에서 자란다. 4. 동의나물은 습기가 많은 곳을 좋아하며 연하천대피소 주변에 가득했다. 독성이 강하므로 곰취로 오인하여 나물로 먹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신극채

비 예보와 바닥난 체력, 작아지는 종주의 꿈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도착한 연하천 대피소는 평온하고 고요했다. 샘터로 갔다. 철철 쏟아지는 물을 받아 발을 적시고 무릎도 물수건으로 닦았다. 목을 축이기보다 여기까지 나를 데려온 다리를 먼저 어루만졌다. 잠자리를 배정받았다. 그러자 밤을 안전하고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겠다는 안도와 함께 허기가 찾아왔다.

어둠은 산 아래 세상보다 깊고 빠르게 찾아왔다. 어둠만큼 별들은 더 밝아 손에 잡힐 듯했다. 산짐승과 풀벌레는 숨을 죽였다. 산의 밤은 움직임도 소리도 없이 정적에 잠겼다. 구상나무 푸른 가지를 스쳐온 차가운 산바람이 어서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대피소 안의 난방은 시늉에 가까웠고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담요 지급도 사라졌다. 침낭 대신 챙겨 온 옷만으로 한기를 막기엔 부족했다. 쌀쌀한 기운 속에서도 피로 때문에 잠은 쉽게 찾아왔다. 하지만 추위는 단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번 깨진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비 예보는 급했고 무릎 통증은 심해지면서 머릿속까지 복잡해졌다. 다시 찾아오지 않을 종주의 기회를 접어야 할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새벽 5시쯤 어둠이 물러가자 동료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만 내려가자고. 그럴듯한 말로 포장했다. 여기서 멈춤이 포기가 아닌 또 다른 선택이자 용기라는 멋쩍은 말로 설득했다. 그는 이번에도 이해해 주었다. 천왕봉에 올라 종주하고픈 마음이 컸을 텐데도 헤아려주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였다.

천왕봉 대신 택한 하산길, 포기가 아닌 멈춤

천왕봉이 아닌 음정마을로 내려가는 길 위에 섰다. 이곳 연하천 이름에 걸맞게 주변에 가득했던 안개도 어느새 걷혔다. 하산길은 전날 걸었던 길보다 짧았다. 짧다고 쉬운 길은 아니었다. 일부 1km 정도는 매우 가파른 바윗길이었다. 무릎을 달래며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가파른 구간을 지나 임도에 다다랐다. 이제 끝이라는 안도가 들었다. 하지만 완만한 비포장 길도 지친 다리로는 길고도 힘들었다.

평소라면 가벼운 산책길이었을 음정마을로 가는 숲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젊었을 때는 정상만 보고 걸었다. 끝까지 가는 것이 산행이라고 믿었다. 이제는 조금 다르다. 몸의 한계를 인정하고 순리에 따르는 산행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대로라면 오늘 천왕봉에 오르고 빗속에 분투했겠지만, 따뜻한 집에서 늦잠을 자고 이번 산행을 돌아보고 있다. 무릎과 허리에는 통증이 남았어도 고장 난 것 같지는 않다.

지리산 종주라는 목록에 밑줄을 긋지는 못했다. 앞으로도 다른 산의 종주도 꿈꾸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이번 산행을 실패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다음 산을 다시 찾을 힘을 남겨 왔다. 멈춘 덕분에 앞으로도 산에서 살아가는 풀과 나무와 바람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지리산 등산지도 이번 산행에 함께한 지도다. 봄철 산불조심기간 통제 구간을 안내하는 지도로 구간 거리와 소요 시간은 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믿음직한 안내자였다. 지리산 종주의 꿈은 멀어졌지만 언제까지 간직하고 싶은 지도다.
지리산 등산지도이번 산행에 함께한 지도다. 봄철 산불조심기간 통제 구간을 안내하는 지도로 구간 거리와 소요 시간은 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믿음직한 안내자였다. 지리산 종주의 꿈은 멀어졌지만 언제까지 간직하고 싶은 지도다. ⓒ 신극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지리산#지리산종주#노년#노년의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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