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의 거친 바다가 요동치는 날이면 강릉 항구는 어김없이 멈춰 선다. 풍랑주의보가 내려지면 작은 정치망 어선(일정한 장소에 그물을 설치해 어구가 그물로 들어오게 만드는 조업방식)들은 출항 대신 밧줄에 몸을 맡긴 채 다음 기회를 기다린다.
그러나 강릉 정치망 어민들이 겪는 어려움은 거센 파도에만 있지 않았다. 이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바다보다 더 답답한 문제"가 있다는 불만이 이어져 왔다. 조업은 멈춰도 생계는 멈출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어민들은 "우리는 먼바다로 나가는 배도 아닌데 왜 원양어선 수준의 규제를 받아야 하느냐"고 토로하며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있었다.

▲주문진항 ⓒ 진재중
"수백만 원 장비 부담 덜었다"… 현장 목소리 반영한 규제 개선
지금까지는 '어선안전조업법'은 풍랑주의보 등 기상특보가 발효되면 일정 규모 이하 어선의 출항을 제한하고 있다. 특히 동절기인 11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는 규제가 강화돼 30톤 미만 어선의 출항이 제한된다.
예외 규정도 있다. 15톤 이상 어선이 EEZ(배타적경제수역)까지 위치 확인이 가능한 고성능 위치발신장치를 설치하고 2척 이상 선단을 구성하면 출항이 가능하다. 문제는 정치망 어장관리선에도 이 기준이 그대로 적용돼 왔다는 점이다. 정치망 관리선은 대부분 연안 1~2해리 안에서 어장 시설 점검과 관리 작업을 한다. 장거리 항해나 원양조업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현행 규정상 EEZ까지 위치추적이 가능한 고가 위성장비를 설치해야 했다.
강릉 주문진항에서 만난 한 정치망 어민은 "눈앞 어장 관리하러 나가는데 수백만 원짜리 장비를 달라고 하니 답답했다"며 "현장 상황과 맞지 않는 규제라는 생각이 많았다"고 토로했다.
실제 부담도 적지 않다. 관련 장비 설치비는 300만~350만 원 수준, 월 통신료도 8만~10만 원에 달한다. 정부 보조금 지원도 사실상 없어 영세 어업인들에겐 큰 부담이었다.
김철환 강릉시 정치망 연합회장은 "그동안 어민들은 이중, 삼중의 규제를 받는 데다 행정 절차까지 복잡해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며 "이번에 해경이 현장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듣고 어민들의 입장을 반영해줘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출항하는 어선 ⓒ 진재중
현장 반영한 규제 개선… 정치망 어장관리선 기준 완화 추진
강릉해양경찰서는 어업 현장의 의견을 반영해 적극적으로 해양수산부에 건의하여 지난 4월 24일 '어선안전조업법 시행규칙 제4조' 개정을 이끌어냈다. 이번 개정의 핵심은 정치망 어장관리선의 조업 현실을 고려해 위치발신장치 인정 범위를 확대하고 보다 실효성 있는 기준으로 개선하는 데 있다. 기존 규정은 일부 고성능 장비만 인정했지만 개정안은 '실시간 위치 확인이 가능한 장비와 무선설비'까지 인정 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EEZ까지 위치확인이 가능한 장비"라는 기준을 "실시간 위치확인이 가능한 장비" 수준으로 완화하는 셈이다.
"안전은 지키되 현실은 반영"… 현장 중심 행정으로 이어진 규제 개선
강릉해양경찰서 관계자는 "정치망 관리선은 조업 특성상 연안에서 단시간 운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현장 실정에 맞는 안전관리 체계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지속적으로 전달해 왔다"고 설명했다.
이번 개정 추진은 단순한 규제 완화를 넘어 '현장 중심 적극행정' 사례라는 평가도 나온다. 최근 기후변화로 어획량은 줄고 유류비 부담은 커진 상황에서, 어민들 입장에서는 출항 제한 규제까지 생계 압박으로 작용해 왔기 때문이다.
항구에서 만난 어민들은 "안전은 중요하지만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 어민은 "규제를 풀어달라는 게 아니라 실제 조업 환경에 맞게 조정해달라는 것이었다."며 "이번 개정이 현장의 목소리를 제도에 반영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관련법 개정으로 정치망 관리선은 보다 현실적인 기준 아래 겨울철에도 출항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어업인들은 장비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고, 행정기관 역시 현장 상황에 맞는 탄력적 안전관리 체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동해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어민들. 이번 규제 개선이 단순한 법 조문 수정에 그칠지, 아니면 현장과 제도를 잇는 변화의 시작이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