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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서 바라 본 천왕봉 천왕봉이 우뚝 보이는 날은 기분좋은 예감이 든다
우리집에서 바라 본 천왕봉천왕봉이 우뚝 보이는 날은 기분좋은 예감이 든다 ⓒ 유상신

미세먼지가 없는 날, 장수 산골 우리 집 거실 창문을 열면 겹겹의 산능선 끝으로 지리산 하봉·중봉·천왕봉이 나란히 보인다. 지리산을 유독 좋아했던 남편은 몇 해 전 부동산 사이트에 나온 이 집을 혼자 보러 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천왕봉임을 단번에 알아봤다고 한다. 그것이 우리 부부 귀촌의 씨앗이었다.

실제로 지리산 천왕봉은 우리 집에서 꽤 먼 거리에 있지만, 창문을 열면 자주 마주하는 덕분에 심리적으로는 이웃사촌 같은 존재다.

지난 6일 아침, 창밖 천왕봉이 유난히 선명했다. 시야가 좋은 날이었다. 이런 날은 지리산 만복대에 올라 산 아랫 세상을 휘휘 내려다보면 좋겠다 싶어 남편에게 운을 띄워봤다. "여보, 우리 만복대 다녀올까요? 내려와서는 카페에서 책도 읽고요." 걷고 읽는 일은 우리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다. 남편의 대답은 예상대로 "오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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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드니 산행은 왕복 2시간 안팎이 가장 무리가 없다. 그래서 서너 해 전부터 지리산이 그리울 때마다 찾기 시작한 곳이 만복대다. 정령치에서 만복대로 이어지는 구간은 여유 있게 왕복 2시간 반 남짓. 적당히 땀 흘리며 지리산의 품을 실컷 느끼고 돌아올 수 있는 코스다.

마침 산불조심기간(11월~4월) 동안 닫혀 있던 길도 지난 5월 1일 다시 열렸다. 산 아래는 이미 초여름 날씨인데, 해발 1100m가 넘는 이곳의 계절은 이제 4월 중순이다. 5월 초 정령치 ~ 만복대 산행은 처음이라 어떤 야생화를 만나게 될지 기대하며 산을 올랐다.

등산로 초입 데크 계단을 지나 숲길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발걸음이 멈춰졌다. 예상치 못한 연보랏빛 얼레지 군락이 길 양옆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진작부터 알고 좋아하던 꽃을 이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너무 반가워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쪼그려 앉아 올려다봤다가 다시 위에서 내려다보며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꽃잎이 뒤로 훌쩍 말린 얼레지를 들여다보다 문득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 <7년 만의 외출> 속에서 지하철 송풍구 바람에 날리는 치마를 붙잡으며 환하게 웃던 배우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의 모습이다. 햇볕이 뜨거워지면 꽃잎을 바짝 말아 올리는 얼레지의 자태가 꼭 그 장면을 닮았다. 금방이라도 눈을 찡긋하며 춤추듯 내게 다가올 것만 같았다.

봄야생화, 얼레지 햇빛을 받으면 꽃잎이 뒤로 활짝 젖혀지며 말린다. 대표적인 꽃말은 '바람난 여인'
봄야생화, 얼레지햇빛을 받으면 꽃잎이 뒤로 활짝 젖혀지며 말린다. 대표적인 꽃말은 '바람난 여인' ⓒ 유상신
얼레지꽃과 나비 꽃잎이 뒤로 활짝 젖혀져 곤충들이 꿀빨아먹기 좋다
얼레지꽃과 나비꽃잎이 뒤로 활짝 젖혀져 곤충들이 꿀빨아먹기 좋다 ⓒ 유상신
얼레지 군락지 정령치에서 만복대 정상을 오르는 내내 얼레지 군락지가 펼쳐진다(5월6일 현재)
얼레지 군락지정령치에서 만복대 정상을 오르는 내내 얼레지 군락지가 펼쳐진다(5월6일 현재) ⓒ 유상신
더 흥미로운 건 영화 제목인 '7년 만의 외출'과 얼레지의 공통점이다. 얼레지는 씨앗이 떨어진 뒤 꽃을 피우기까지 무려 7년을 땅속에서 견딘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피어 있는 이 꽃들은 7년 기다림 끝에 허락된 짧고 화려한 외출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 인고의 시간을 생각하니 눈앞의 연보라 꽃들이 더욱 애틋하고 귀하게 다가왔다.

노랑제비꽃 고산지대에 서식하여 평지에서는 보기 어렵다. 5월초 정령치에서 만복대를 향해가다 보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꽃잎에 자갈색 무늬가 있다.
노랑제비꽃고산지대에 서식하여 평지에서는 보기 어렵다. 5월초 정령치에서 만복대를 향해가다 보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꽃잎에 자갈색 무늬가 있다. ⓒ 유상신
노랑제비꽃 고산지대에 주로 서식한다.꽃잎 안쪽엔 자갈색(보라색이 도는 갈색) 줄무늬로 곤충들을 유혹한다
노랑제비꽃고산지대에 주로 서식한다.꽃잎 안쪽엔 자갈색(보라색이 도는 갈색) 줄무늬로 곤충들을 유혹한다 ⓒ 유상신
한참을 얼레지와 노닐다가 시선을 돌리니 얼레지 군락 사이로 샛노란 꽃무리가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산 아래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노랑제비꽃이다. 보통 제비꽃 하면 보라색을 떠올리지만, 이 꽃은 주로 고산지대 양지바른 곳에 핀다.

향기는 거의 없는 대신 꽃잎 안쪽에 자갈색 줄무늬를 그려 넣어 곤충들에게 꿀이 있는 곳을 알려준다. 향기 대신 색으로 유혹하는 전략이다. 이 노란 등불 같은 꽃은 정상에 오를 때까지 얼레지와 나란히 길을 수놓고 있었다.

마주 내려오는 등산객들에게 부러 일일이 인사를 건네며 "얼레지랑 노랑제비꽃 꼭 보고 내려가세요" 하고 기분 좋은 오지랖을 부려봤다. 꽃이 피어 있는 줄도 모르고 걷던 사람들이 내 말에 걸음을 멈추고 환하게 웃을 때면 내 기쁨도 덩달아 커졌다. 그 순간만큼은 지리산 야생화 전도사가 된 기분이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풍경은 산 아래와 사뭇 달라졌다. 이제 막 연둣빛 새순을 틔우는 나무들 사이로, 지고 있는 진달래와 봉오리를 맺고 피기 시작하는 연분홍 산철쭉이 함께 보였다. 산 아래 마을에서는 이미 지나가는 봄과 이제 막 시작되는 봄이 이곳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갈색 능선 아래로 연두와 초록이 번져가는 풍경은 거대한 수채화 같았다.

만복대 오르는 길, 남원이 내려다 보이는 산자락 고도에 따라 갈색, 연두, 초록빛을 띄며 그라데이션을 이루고 있다
만복대 오르는 길, 남원이 내려다 보이는 산자락고도에 따라 갈색, 연두, 초록빛을 띄며 그라데이션을 이루고 있다 ⓒ 유상신
만복대가는길에 만난 연분홍 산철쭉 진달래는 지고 있고, 산철쭉은 봉우리를 맺거나 피고 있다(5월 6일 촬영)
만복대가는길에 만난 연분홍 산철쭉진달래는 지고 있고, 산철쭉은 봉우리를 맺거나 피고 있다(5월 6일 촬영) ⓒ 유상신
만복대 정상 뒤로 반야봉이 보이고 표지석 뒤 우리를 반겨준 까마귀가 보인다
만복대 정상뒤로 반야봉이 보이고 표지석 뒤 우리를 반겨준 까마귀가 보인다 ⓒ 유상신
만복대 정상부근 큰바위 만복대 오를때마다 이곳에서 산동마을 내려다 보며 차를 마시며 숨을 고르는 곳이다.
만복대 정상부근 큰바위만복대 오를때마다 이곳에서 산동마을 내려다 보며 차를 마시며 숨을 고르는 곳이다. ⓒ 유상신
만복대 정상에서 차 한잔 지리산 품에 안겨 구례 산동마을을 내려다보며 마시는 차 한잔이 그리워 이곳을 찾는지도 모른다
만복대 정상에서 차 한잔지리산 품에 안겨 구례 산동마을을 내려다보며 마시는 차 한잔이 그리워 이곳을 찾는지도 모른다 ⓒ 유상신
드디어 정상에 도착하니 검은 까마귀 한 마리가 우리 부부를 맞았다. 늘 앉던 바위에 자리를 잡고 차 한 잔을 마시며 숨을 돌렸다. 왼편으로는 지리산 능선이 길게 이어지고, 앞쪽으로는 산수유꽃으로 유명한 구례 산동마을이 내려다보였다. 오른쪽으로는 남원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만복대(萬福臺)라는 이름처럼 만 가지 복이 발아래 펼쳐지는 풍경이었다. 내려오는 길도 연보라 얼레지와 노랑제비꽃 덕분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하산 후 책읽는 즐거움 따로 또 같이 김성화의 '마음이 행복이다'(아내)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남편)를 읽는 중
하산 후 책읽는 즐거움따로 또 같이 김성화의 '마음이 행복이다'(아내)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남편)를 읽는 중 ⓒ 유상신
하산 후, 산 아래 카페에서 이어진 또 하나의 즐거움은 '따로 또 같이' 책을 읽는 시간이었다. 책장 위에 머물던 시선이 문득 창밖으로 향할 때면 산 위에서 만난 꽃들이 다시 아른거렸다. 때 마침 펼쳐 든 책 <마음이 행복이다>(김성화 저) 속 한 구절이 만복대 야생화들이 건넨 환대와 겹쳐 유독 마음 깊이 남았다.

"행복의 비결은 더 많은 것을 갖는 것이 아니라, 더 적은 것으로 즐길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이 말처럼, 발치에 핀 작은 꽃송이만으로도 충만했던 하루였다. 창문 너머 선명했던 천왕봉의 부름이 아니었다면 이 모든 환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 부부, 창밖 천왕봉을 향해 넙죽 큰절이라도 올려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얼레지의 ‘씨앗 발아 후 개화까지 약 7년’ 내용 : 산림청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및 여러 야생화 도감에 소개된 내용을 참고
*노랑 제비꽃의 생태 특징(고산지대 분포, 꽃잎의 줄무늬를 통한 곤충 유인 등)은 국립수목원·국립생물자원관 식물 정보 자료를 참고


#지리산#천왕봉#얼레지#만복대#노랑제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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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은퇴부부의 '따로 또 같이'

자연과 책과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은퇴 후 나의 하루는 내가 디자인하며 삽니다. 지금 여기에 사는 즐거움(기쁨이자 슬픔)을 글로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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