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이든 결국 연기 지침서로 읽어버리는 배우들의 독서모임 이야기.
"얘들아, 우리 독서모임 안 할래?"
먼저 말을 꺼낸 건 오십 대에 들어선 나였다. 흔쾌했는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여준 건 MZ세대 연기자 후배들이었다. 사실 또래들과 모임을 만들 수도 있었다. 비슷한 시간을 걸어온 사람들끼리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익숙한 안정감 대신, 낯섦이 주는 기분 좋은 긴장감을 택했다.
나이 먹었다고 모임을 '이끌'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묻어갈' 참이었다. "날 그냥 그림자처럼 취급해줘." 손사래치며 던진 말은 허세가 아니라 절박한 고백이었다. 최근 들어 책 읽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었고, 사두기만 한 책들은 점점 쌓여갔다. 뇌가 점점 얕아지는 기분이었다.
SNS의 짧은 영상들은 집중력을 잘게 조각냈다. 겉으로 보면 후배들을 위한 자리 같지만, 사실 나를 위한 구조 요청에 가까웠다.
무려 김영하 책인데... 안 읽힌다

▲김영하 작가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 마음에 와닿는 문장들을 오래 붙잡아두고 싶어 포스트잇으로 표시해 두었다. ⓒ 차유진
운영 규칙은 단순했다. 10명 내외의 멤버가 3주에 한 권, 책은 돌아가며 선정한다(사다리 타기로 첫 번째 순서 결정). 벌칙은 없지만 약속은 있다. 혼자서는 한 페이지 넘기기도 힘들던 책이, 모임 날짜가 잡히는 순간 반드시 해내야 할 '분량'으로 바뀌었다. 이 일 저 일을 핑계 삼아 미뤄왔던 나에게 적당한 강제성이 생겼다.
첫 책은 김영하 작가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2020년 4월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의 신간 출간)이었다. 구글 맵도, 호텔스닷컴도 없던 시절, 배 출발 시간 하나 알아보려다 하루를 통째로 허탕치기 일쑤였던 스마트폰 이전 시대의 시칠리아 여정이 담겼다. 불편했지만 헤맴의 낭만이 살아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김영하 작가는 문장의 속도감이 좋기로 유명하다. 나 역시 그의 작품을 거의 다 챙겨본 독자로서 믿음이 있었다. '김영하라면, 내 가출한 가독성을 단번에 끌어올려 주겠지!' 잔뜩 기대를 품고 책을 펼쳤다.
그런데... 역시 안 읽힌다. 유독 더 안 읽힌다. 책장 사이에 본드를 발라놓은 듯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김영하 작가님, 당신마저...!' 이쯤 되니 나 자신이 의심스러웠다. '책이 문제인가, 아니면 내가 문제인가.'
책은 섬의 한낮에 슬리퍼를 끌며 천천히 걷는 걸음처럼 느긋했다. 억지로 속도를 내보려 할수록 오히려 책에 붙잡혔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한 시칠리아의 무탈한 일상에 보폭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정해진 기간 안에 꾸역꾸역 두 번을 읽어냈다.

▲독서모임의 묘미를 느꼈던 첫날. AI생성 이미지 ⓒ 오마이뉴스
지난 4월 말경 독서모임 첫날, 분위기는 예상보다 뜨거웠다. 원성이 자자했다. "너무 안 읽혔어요", "사진 나올 때마다 감사했을 정도예요"라며 투덜대는 쪽과, "여유로운 느림이 너무 좋았다"는 쪽으로 나뉘었다. 같은 책을 두고도 반응이 이렇게까지 다르다니, 독서모임의 묘미가 슬슬 살아났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여행'으로 번졌다. 누군가에게 여행은 현실에서의 '도피'였고, 누군가에게는 '치유'였다. 어떤 이는 여행에서조차 무언가를 얻어야 한다는 보상심리에 붙들려 있었고, 어떤 이는 그저 숨을 쉬고 싶어 떠난다고 했다. 그들의 고백을 들으며 문득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누구의 이야기에도 진정한 휴식은 없었다.
"왜 이렇게 다들 쫓기면서 살까요?"
누군가 던진 질문에 공기가 잠시 멈췄다. 답은 제각각이었다. 가족, 현실 그리고 미래.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는 결국 '불안'이라는 하나의 종착역으로 모였다. 평가의 잣대 위에 늘 놓여 있는 배우라는 직업, 남들만큼은 속도를 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 그리고 존재의 가치가 타인의 시선에 쉽게 재단될 때마다 흔들리는 자존감.
불안은 삶의 방향을 비틀고, 그 비틀린 방향은 다시 멈출 수 없는 속도를 만들어낸다. 뒤처질 것 같은 두려움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데도, 좀처럼 '정지'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현대인처럼.
내면의 '어린 예술가'를 지키는 법

▲배움이나 성취보다 중요한 것은, 그 상처받기 쉬운 존재를 끝까지 지켜내고 보호하는 일. ⓒ lighttouchedphotography on Unsplash
참여자들은 특히 '내면의 어린 예술가'에 대한 문장에 깊이 머물렀다. 타인의 시선과 냉소, 경쟁과 비교 속에서 우리 안의 어린 예술가는 쉽게 훼손된다. 배움이나 성취보다 중요한 것은, 그 상처받기 쉬운 존재를 끝까지 지켜내고 보호하는 일이라는 데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참여자가 말했다. "많이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많은 것이 잘 지나가도록 자신을 열어두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 말이 낯선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가 건네준 시원한 물 한 모금처럼, 조급한 목마름을 천천히 식혀 주었다.
첫 모임을 마치고, 다음 함께 읽을 책으로 이서수 작가의 <그래도 춤을 추세요>(2025년 8월 출간)가 선정되었다. 나도 당장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었지만, 순서가 다섯 번째란다. 단톡방에서 '사다리 타기'로 이미 정했다고. 얄짤없는 MZ식 룰 앞에서 선배도 예외가 없다. 다시 책을 펼쳤다. 여전히 페이지를 넘기는 일이 물속을 걷는 것처럼 무겁다.
뇌에 배긴 딱딱한 굳은살이 말랑해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조금 느리면 어떤가. 내 안의 '어린 예술가'가 겁먹지 않고 마음껏 숨 쉴 수 있는 나만의 시속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 덕분에 타인의 삶과 생각을 통해 내 안의 '속도'를 점검할 여유가 생겼다. 독서모임, 하길 잘했다.
독서 토론일 : 4월 21일
선정도서 : 김영하 지음 <오래 준비해 온 대답>
선정자 : 최선한
참여자 : 차유진, 정다은, 최선한, 아인, 이연신, 허연주, 곽준이, 김도은, 김혜진, 이채빈, 서구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