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26년 국어책임관 연수 장면(4.23)
2026년 국어책임관 연수 장면(4.23) ⓒ 김슬옹

장관님, 안녕하십니까.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김슬옹입니다. 1977년 철도고 1학년 때부터 49년간 우리말글 운동과 훈민정음 연구에 몸바쳐 온 한글운동가이자 한글학자로서, 국어기본법과 국어문화원을 주관하시는 장관님께 간곡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국어기본법, 지금 이대로는 안 됩니다. 제대로 살려 주십시오.

2005년 국어기본법이 제정되었을 때, 저를 포함한 우리말글 운동가들은 환호했습니다. 우리 말글 발전과 보전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 마침내 갖추어졌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스무 해가 흘렀습니다. 장관님, 솔직히 여쭙겠습니다. 이 법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습니까?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인건비, 윤석열 정부 때 삭감된 용역 예산도 그대로

AD
먼저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전국 22개 국어문화원은 그동안 놀라운 일을 해 왔습니다. 지역 주민의 국어 상담, 공공기관 문서 감수, 쉬운 우리말 보급, 찾아가는 국어 교육, 다문화 가정 한국어 지원까지. 국민의 언어 생활 최일선에서 묵묵히 제 몫을 다해 왔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일을 턱없이 부족한 예산으로 해 왔다는 것입니다. 2006년 출발 당시 기관당 연 2000만~2500만 원이던 지원 예산은 2026년인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0년 동안 물가는 두 배 가까이 올랐고, 최저임금은 세 배 넘게 뛰었습니다. 장관님. 도대체 그 어떤 국가 예산이 20년간 동결될 수 있습니까?

장관님, 국어문화원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건비 예산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전국 국어문화원에서 일하는 연구원들은 대부분 석사·박사급 국어 전문 인력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에게 지급되는 인건비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칩니다. 국가가 국어 정책을 위탁하면서, 정작 그 일을 하는 전문 인력에게는 최소한의 예우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동 인권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국어를 사랑하는 전문가들의 헌신과 희생에 기대어 국가 정책을 굴리고 있는 것입니다. 소수의 연구원들이 낮은 처우를 감내하며 버티고 있지만, 이런 구조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젊은 국어 전문 인력이 국어문화원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윤석열 정부 시절 국어문화원 기본 용역 예산이 40%나 삭감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나마 턱걸이로 유지하던 사업 예산마저 대폭 깎였습니다. R&D 예산 삭감, 예술 강사 지원 예산 전액 삭감, 해외 한국어 보급 예산 삭감 등 윤석열 정부의 문화·교육 분야 긴축 기조 속에서 국어문화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장관님, 새 정부가 출범한 지 이제 9개월을 넘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삭감된 국어문화원 용역 예산은 아직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장관님께서 취임사에서 말씀하신 '청년 문화예술인들이 마음껏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못자리 역할'이 국어 분야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까? 한류 문화, 한류 가요, 한류 드라마를 말하면서 그 모든 것의 바탕인 국어 정책은 뒷전에 두는 것이 옳습니까?

공공언어 개선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입니다

기획재정부가 예산 부족을 이유로 국어문화원 예산 증액을 거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시안적 판단입니다. 공공언어를 개선하면 오히려 엄청난 경제적 효과가 발생합니다. 국립국어원이 현대경제연구원에 의뢰한 연구에 따르면, 어려운 공공언어 사용에 따른 문제를 해결할 경우 연간 약 285억 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해외 사례는 더욱 극적입니다. 미국 국방부는 출장비 청구 양식을 쉬운 언어로 다시 쓴 결과, 오류율이 50% 감소하고 처리 시간이 15% 단축되어 연간 약 78만 달러(약 10억 원)를 절감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1982년부터 양식을 정비하여 2만7000개를 없애고 4만1000개를 재설계함으로써 2800만 달러(약 380억 원) 이상을 절약했습니다. 호주 빅토리아 주정부는 법률 문서 하나를 쉽게 고쳐 쓴 것만으로 연간 40만 달러(약 5억 원)의 인건비를 절감했습니다.(Clear Language @ Work(clearlanguageatwork.com)

공공언어가 어려우면 국민은 민원 서식을 잘못 작성하고, 공무원은 이를 처리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정책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합니다. 그 모든 비용이 국가 재정으로 돌아옵니다. 국어문화원 예산 몇십억 원을 아끼려다 수백억 원의 행정 비효율을 방치하는 것은 현명한 재정 운용이 아닙니다. 장관님, 기재부를 설득해 주십시오. 공공언어 개선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입니다.

국어책임관 제도, 예산 없는 겸직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국어기본법 제10조에 따라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에는 국어책임관을 둘 수 있습니다. 공문서와 보도자료의 국어 사용을 점검하고, 쉬운 우리말 사용을 이끄는 중요한 역할입니다. 일부 기관에서는 국어책임관이 큰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공문서 외국어 남용을 줄이고,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행정 언어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관에서 국어책임관 제도는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제도가 별도 예산 없이 일반 행정직 공무원의 겸직으로 운영된다는 점입니다. 본래 업무도 바쁜데 국어책임관 역할까지 맡으니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국어 전문가도 아니고, 국어책임관 교육에 참석할 시간도 없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국어책임관인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국어책임관 제도에도 강제성이 없습니다. 보도자료가 반드시 국어책임관을 거쳐 가는 것도 아닙니다. 연 1회 연수회가 있지만 '바빠서 못 참석했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이래서야 공공언어가 나아질 수 있겠습니까? 국어책임관 제도가 실효성을 가지려면, 전문성을 갖춘 인력 배치와 별도 예산 확보가 필수입니다.

문해력 위기 시대, 국어문화원이 유일한 해법입니다

장관님, 지금 대한민국은 문해력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심심한 사과'를 '지루한 사과'로 읽는 청년들, '사흘'이 며칠인지 모르는 학생들, 가정통신문의 '중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부모들. 이것은 단순한 어휘력 부족이 아니라 맥락 이해가 중요한 국민의 기초 언어 생활 능력이 흔들리고 있다는 심각한 신호입니다.

이 문해력 문제를 평생교육과 지역 활성화 교육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기관은 전국의 국어문화원이 유일합니다. 학교 밖 성인과 어르신, 다문화 가정, 지역 주민에게 찾아가서 국어 교육을 할 수 있는 인프라는 국어문화원밖에 없습니다. 교육부의 성인 문해교육 사업이 연간 81만 명에게 지원을 한다고 하지만, 기초 문해와 생활 국어, 공공언어 이해 교육을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곳은 국어문화원입니다.

그런데 그 국어문화원에 인건비 예산도 없고, 기본 용역 예산마저 40% 삭감된 상태라면, 문해력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국어문화원을 살리는 것이 곧 국민의 문해력을 살리는 것입니다.

상벌 없는 법, 정부조차 안 지킵니다

국어기본법의 또 다른 치명적 결함은 상벌 규정이 전무하다는 점입니다. 제14조에는 "공공기관 등은 공문서를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써야 하며,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라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어겨도 아무런 제재가 없습니다.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헛깨비법'입니다.

정부 보도자료에는 여전히 '거버넌스', '아젠다', '로드맵', '이니셔티브' 같은 외국어가 넘쳐납니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공공기관에서 외래어와 외국어에 접촉하는 비율이 2022년 36.6%에서 2023년 77.9%로 급증했습니다. 2024년 12월 기준, 전체 48개 중앙행정기관 중 15개 기관은 전문용어 표준화협의회를 아예 설치하지도 않았고, 설치한 33개 기관 중에서도 13개 기관은 회의를 단 한 번도 개최하지 않았습니다. 정부 스스로 국어기본법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국립국어원, 『2023년 공공기관 공공언어 진단 보고서』)

장관님께 다섯 가지를 요청드립니다. 첫째, 국어문화원 지원 예산을 현실화해 주십시오. 삭감된 40%의 용역 예산을 원상 회복하고, 연구원 인건비를 별도로 확보해 주십시오. 최소한 최저임금 이상의 인건비를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도리입니다. 전국 22개 국어문화원 연구원들의 헌신에 더 이상 기대지 마십시오.

둘째, 기획재정부를 설득해 주십시오. 공공언어 개선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입니다. 국내외 연구가 증명하듯, 쉬운 공공언어는 행정 비용을 절감하고 정책 효과를 높입니다. 국어문화원 예산 몇십억 원 증액이 수백억 원의 행정 효율화로 돌아온다는 논리로 기재부를 설득해 주십시오.

셋째, 국어문화원을 문해력 교육과 평생교육의 거점 기관으로 육성해 주십시오. 지역의 문해력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전문 인프라가 국어문화원입니다. 이 기관들이 지역 평생학습관, 도서관, 주민센터와 연계하여 문해력 향상 사업을 펼칠 수 있도록 제도적·재정적 기반을 마련해 주십시오.

넷째, 국어책임관 제도를 실효성 있게 개편해 주십시오. 겸직이 아닌 전담 인력 배치, 별도 예산 확보, 국어 전문성을 갖춘 인력 양성이 필요합니다. 국어책임관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해 주십시오.

다섯째, 국어기본법에 실효성 있는 제재 규정을 신설해 주십시오. 공공기관이 이 법을 어겨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는 현 체계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한 임오경 의원의 국어기본법 개정안은 작은 첫걸음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장관님, 2026년은 훈민정음 반포 580돌이자 한글날 제정 100돌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세종대왕께서는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 뜻대로 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한글을 창제·반포하셨습니다. 580년이 지난 지금, 전국의 국어문화원이 그 뜻을 이어 국민의 언어 생활을 돕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국가는 그 일을 하는 이들에게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인건비를 주고 있습니다.

한류 문화(K 문화)의 바탕은 국어입니다. 한류의 뿌리는 한글입니다. 그 뿌리를 가꾸는 국어문화원과 국어 정책에 제대로 된 투자를 해 주십시오. 국어기본법을 제대로 살려 주십시오.

49년간 우리말글 운동에 헌신해 온 사람으로서, 이 글을 쓰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국어기본법 제정을 기뻐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나 스무 해 동안 이 법이 국어문화원의 열악한 환경 하나 개선하지 못했고, 국어책임관 제도 하나 제대로 굴리지 못했으며, 공공언어의 외국어 남용 하나 제대로 규제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근본적인 쇄신이 필요합니다.

장관님의 결단을 기다리겠습니다. 국어기본법을 제대로 살려 내시어, 전국 국어문화원 연구원들의 헌신에 보답하고 국민의 문해력과 언어권을 위한 진정한 첫걸음을 떼어 주십시오. 끝으로 장관님과 문체부의 건승을 빕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어문화원#국어기본법#한류#한글#최휘영장관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훈민정음학과 세종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