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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딸아이와 산책 중에 찍은 사진 ⓒ 장한이
주말 점심, 고3 딸과 둘이 물냉면을 먹다가 뜻밖의 말을 들었습니다.
"아빠 성격이 많이 유해진 거 같아요."
"아빠가 언제는 안 유했어?"
"호르몬 영향인가? 아빠 눈물도 많아졌잖아요."
웃으며 가볍게 넘겼지만, 이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습니다. 단순히 성격이 부드러워졌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고3인 딸아이는 중간고사를 앞두고 스터디카페 오가는 게 귀찮다며 주말에는 집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최근 아내는 주말마다 출근했고, 올해 고등학생이 된 아들은 주말에도 학원을 오가느라 바빴습니다. 자연스럽게 주말 낮을 집에서 딸과 보냈습니다.
지난 주말, 아내가 출근한 틈을 타 어수선한 아내의 방을 정리했습니다. 구석구석 먼지를 털어내고, 가구 위치도 바꿨습니다. 비어 있던 자리에 화장대를 들였습니다. 하는 김에 거실도 정리하다가 온 집안에 손을 댔습니다.
집 정리를 마치고 딸과 점심을 먹었습니다. 학교 얘기, 친구 얘기, 슬럼프가 온 것 같다는 얘기, 연애하고 싶다는 얘기까지,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조금씩 이어졌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난데없이 딸이 아빠 성격이 유해졌다고 말했습니다.
15개월 만에 집안을 가꾸기 시작했다
주말 대청소는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니고, 치우고 닦는 일은 원래 제 취미에 가깝습니다. 날이 따뜻해지니 집 안의 공기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에 정리정돈과 청소를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까지 15개월 동안, 제 공간 외에는 치우고 가꾸는 일을 멈췄습니다.
한 집에 살면서 1년이 넘도록 아내와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부부 사이의 대화가 끊기면 집안의 공기는 금방 가라앉습니다. 긴장감이 쌓이면서 가족 모두가 피로해집니다. 아이들 앞에서 불화를 티 내지 않으려 애써도 아이들은 눈치가 빠릅니다. 그저 말을 안 하고 지켜볼 뿐이죠.
대단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아이 문제로 다툼이 시작되었고, 그동안 조금씩 쌓아 올린 사소한 불만들이 그 순간 터졌을 뿐입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고립의 벽은 견고해졌습니다. 엄마 아빠가 서로를 외면하는 동안, 거실은 가족이 머무르지 않는 외딴 섬과 같은 공간이 되었습니다.
아내 방을 정리하고 거실을 가꾸기 시작한 건, 그 긴 침묵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쉽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용서 못할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었기에 지난 3월 초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덕분에 집안 분위기도 아이들 표정도 서서히 달라졌습니다(관련기사 :
15개월간 말 없던 부부에게 '이혼숙려캠프'가 큰일했습니다).
우연한 산책길, 아이들 마음을 알았다
딸아이가 아빠가 유해졌다는 말을 꺼낸 건 엄마, 아빠의 대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감정을 지켜보면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내와 다투던 중 화를 이기지 못하고 차 키를 거실 바닥에 내동댕이친 적 있습니다. 그 순간을 딸이 봤습니다.
그 이후로는 아이들 앞에서 아내와 언성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제 기억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딸의 기억 속에 그날의 잔상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며칠 동안 눈치를 보던 딸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부모의 섣부른 감정 표현은 아이 안에 그대로 쌓여 있었습니다. 더욱이 고등학생 아이들이 최근까지 마주한 부모의 긴 침묵, 이 또한 얼마나 불편하고 괴로웠을지 미안할 따름입니다.
"집중이 안 돼요. 책상에 앉아 있어도 공부 안 될 거 같아요. 산책 갈래요?"
오랜만에 딸과 함께 동네 공원을 걸었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이제 엄마(아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산책을 하다 딸에게서 남매가 그 시간이 어땠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딸은 그동안 동생과 엄마,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눴다고 했습니다. 특히 아들은 자신 때문에 싸움이 시작됐다고 생각해 자기 탓이 크다고 여긴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혼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서로에게는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부모가 자존심 싸움을 하는 동안 아이들은 그 고달픈 침묵의 시간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견디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대화를 시작한 엄마, 아빠가 아이들에게는 낯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오랜만에 찾아온 평온한 분위기에 자연스레 스며들었습니다. 부부가 냉전 중일 땐 대부분 각자의 방에 주로 머물렀는데, 요즘에는 주방 식탁과 거실 소파에 가족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족 단체대화방이 다시 생기고, 일상에 활력이 돌았습니다. 괜한 제 자존심 때문에 소중한 15개월을 날려버렸습니다.
딸아이와의 산책이 유난히 따뜻한 날이었습니다.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새로운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공원을 걸으며 가족 이야기를 나눴을 뿐입니다. 그 평범함이 참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아이들이 말한 '유해짐'의 진짜 의미

▲운전하다 눈에 띈 화원에 들어가 즉흥적으로 화초를 사 거실에 두었습니다. ⓒ 장한이
산책을 마칠 즈음 딸이 말했습니다.
"장○○(동생)이 아빠 요즘 착해졌다고 그랬어요."
"아빠가 못됐었다는 소리야? 황당하네?"
아이들이 말한 '유해졌다', '착해졌다'라는 말은, 아빠가 엄마에게 손을 내민 덕분에 가정의 긴장이 누그러졌고, 집 안의 공기도 가벼워졌다는 안도감을 표현한 말일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 입장에서 '아빠가 착하게 잘못을 뉘우쳤어'라는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내와 큰일을 겪어서인지, 뒤늦게 철이 든 건지 알 수 없습니다. 마음이 많이 편해졌습니다. 지난 20여 년의 결혼 생활을 돌이켜보면 참 예민했습니다. 부부 싸움을 하면 어떻게든 이기려고 했습니다. 의미 없이 반복되던 불화의 원인은 저였습니다.
나이 들수록 자존심보다 가정의 평화가 더 중요하다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아내와 냉전 중일 때는 몰랐는데, 요즘과 비교해 보니 그때의 저는 훨씬 예민했고, 스트레스도 컸습니다. 그 감정이 아이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전달됐을 것입니다.
마음이 평온해지니 집에 머무는 시간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에 다시 스며들었을 뿐인데, 어느 날은 저도 모르게 '아, 행복하다'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가정의 평화는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켜내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이들이 더 이상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집, 그 평범한 일상을 지키는 일은 이제 제 몫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