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생성 이미지 ⓒ 오마이뉴스
"경쟁이 없으면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요?"
농촌의 한 작은 학교 교실, 수업 중 터져 나온 아이들의 항변에 교사는 말문이 막혔다. 오직 사다리 위에서의 위치만이 나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믿는 아이들. 등급과 서열 바깥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교실에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교직 경력 20년 차 교사가 한국 사회의 획일적인 능력주의와 그 속에서 숨 가쁘게 살아가는 아이들의 슬픈 자화상을 기록했다.
위로를 준비한 교사, 경쟁을 옹호하는 아이들
지도를 아무리 넓게 펼쳐보아도,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경쟁의 바깥을 체감하기는 점점 어려워 보인다. 밤이면 도시의 화려함 대신 어둠이 먼저 내려앉는 이 작은 농촌 학교에서도, 불안의 결은 서울의 학원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거대한 경쟁의 논리는 조용한 교실과 한적한 운동장까지 스며들어 아이들의 일상을 촘촘히 적신다. 농사와 생계를 책임지느라 고단한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건네는 "지금 뒤처지면 끝이다"라는 말은, 이 시대를 건너기 위한 생존법처럼 굳어 간다. 그 말이 꼭 차가워서라기보다, 그 말 말고는 아이를 지켜낼 문장을 찾지 못한 어른의 초조가 섞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국어 수업 시간, 아이들과 교과서에 수록된 '경쟁, 어떻게 받아들일까'라는 글을 함께 읽었다. '경쟁은 발전을 이끄는 힘이며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며 경쟁의 가치를 긍정하는 텍스트였다. 이 단원의 목표는 '비판적 읽기'였다. 나는 아이들이 글쓴이의 주장을 무조건 수용하기보다, 각자의 삶에 비추어 이리저리 따져 묻고 반박해 보기를 바랐다.
내심 속으로 기대한 풍경도 있었다. 아이들이 그동안 치열한 경쟁 교육 속에서 누적된 피로를 쏟아내며 글의 논리를 비판하면, 그 틈을 타 교사인 내가 "등수보다 네 삶 자체가 훨씬 소중하다"는 다정한 위로를 건넬 참이었다.
그런데 막상 토의가 시작되자, 교실의 공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경쟁이 없으면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요?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아야 안심이 돼요."
비교의 좌표가 사라질 때 찾아오는 두려움
그 말이 나오자 교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비슷한 목소리들이 이어졌다.
"경쟁이 있어야 공정한 거 아닌가요?"
"안 하면 저만 손해잖아요. 다른 애들은 다 하는데요."
"싫다면서도… 성적표 나오면 제일 먼저 친구 등급부터 보게 돼요."
놀랍게도 많은 아이가 경쟁을 옹호했다. 평소 "힘들다"고 투덜대던 아이들조차 토론의 장에 서자 경쟁을 열정적으로 변호하고 있었다. 그 순간 교실의 공기가 낯설고 서늘하게 느껴졌다. 내가 준비해 둔 위로의 문장들이, 오히려 현실을 모르는 말처럼 가벼워 보였다.
물론 아이들이 경쟁을 '좋아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어떤 아이는 공정성을, 어떤 아이는 안전감을, 어떤 아이는 '손해 보지 않기'를 말했다.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다만 여러 말의 밑바닥에서 반복되는 감각이 하나 있었다. 비교라는 좌표가 사라지면, 자기 자신을 붙잡을 손잡이도 함께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아이들에게 경쟁은 극복해야 할 억압이기 전에, 자신이 사회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표식이 되어 가고 있었다. 비교와 서열 바깥에서 자신을 상상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듯 보였다.
'누구인가' 대신 '몇 등급인가'를 묻는 사회
알랭 드 보통은 <불안(Status Anxiety)>에서 현대인의 불안이 단지 물질의 결핍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가 흔들리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타인의 애정과 인정이 나의 지위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인간은 타인의 눈을 의식하며 서열의 사다리 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 든다는 것이다. 그날 교실에서 들은 아이들의 말은, 그 통찰이 왜 설득력을 갖는지 내게 뼈아프게 겹쳐 보였다. 아이들이 경쟁을 옹호한 것은 그들이 특별히 공격적이어서가 아니다. 비교되지 않는 순간 "나"가 흐려지고, 사회적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이미 너무 이른 나이에 배워 버렸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아이들에게 '너는 누구인가'를 묻기보다, '너는 지금 사다리 위 어디에 서 있는가'를 먼저 묻는 방식에 익숙해져 왔다. 성적표의 등급, 출신 대학의 서열, 취업한 기업의 이름으로 이어지는 단일한 트랙 속에서, 아이들은 1등부터 꼴찌까지 이어진 사다리 위에서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그 앞에서 "경쟁 없는 성장"이라는 말은 현실을 모르는 낭만으로 들릴 때가 많다. 아이들이 냉소적인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삶의 안전을 실제로 보장해 주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은 아이들만의 것이 아니다. 기성세대 역시 남보다 앞서 있다는 느낌을 확인해야 겨우 안심하는 비교의 습관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최근 더 강해진 의과대학 쏠림 현상과, 점점 좁아진 '정상적 삶'의 기준은 우리가 얼마나 획일적인 서열 구조에 매달려 있는지를 드러내는 징후처럼 읽힌다. "상위권이 아니면 실패"라는 감각이 일상의 공기처럼 퍼질수록, 인간은 서로를 공존의 동반자라기보다 생존을 위협하는 경쟁자로 바라보기 쉬워진다. 누구의 성취가 누구의 패배로만 번역되는 순간, 공동체는 숨 쉴 틈을 잃는다.
사다리 바깥, 자기만의 땅을 걷는 아이들

▲AI생성 이미지 ⓒ 오마이뉴스
교직 생활 20여 년 동안 나는 수많은 아이가 이 가파른 사다리를 오르며 울고 웃는 모습을 보았다. 사다리 꼭대기를 향해 수직으로 오르는 일, 세상은 흔히 그것을 '성공'이라 부른다. 성공은 타인과의 간격을 재며 헐떡이지만, 도달하는 순간 분명한 쾌감을 준다. 문제는 그 쾌감이 자주 다음 칸을 오르기 위한 연료로만 남는다는 점이다. 잠깐의 안도는 곧 "이제는 떨어질 수 없다"는 불안으로 바뀌고, 비교의 기준은 더 촘촘해진다.
그런데 나는 교실 한구석에서 아주 드물게, '사다리'가 아닌 자기만의 '땅' 위를 걷는 아이들도 보았다. 문제집을 푸는 속도는 더디지만 몸이 불편한 친구에게 급식판을 먼저 건네던 아이, 점수는 높지 않지만 친구의 작은 표정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채던 아이, 달리기를 하다 넘어진 친구를 외면하지 못하고 속도를 늦추던 아이들. 시험지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그 장면들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삶이 무엇으로 지탱되는가'를 보았다. 삶은 끝내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는 힘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넘어지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잠깐 멈춰 서는 용기, 함께 살아도 된다는 믿음 같은 것들이 삶의 바닥을 단단하게 만든다.
세상의 기준은 그들을 '경쟁에 뒤처진 아이'로 분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진정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다. '성공'이 가파른 사다리를 누가 더 빨리 오르느냐 하는 '수직적 도달'의 문제라면, '성장'은 자신이 딛고 선 삶의 지평을 조금씩 넓혀 가는 '수평적 확장'의 과정이다. 성공만을 향해 달리는 삶은 끊임없이 누군가의 뒷모습을 기준으로 숨이 차오르지만, 성장을 향해 걷는 삶은 자기만의 호흡으로 주변의 풍경과 사람을 눈에 담을 수 있다. 그 호흡은 언젠가 사다리에서 미끄러지더라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게 하는 힘이 된다.
주저함을 거두고 질문의 방향을 틀다
과거의 나는 아이들에게 "성공보다 성장이 중요하다"고 흔쾌히 말하지 못했다. 차가운 현실의 벽을 알기에, 그 말이 자칫 아무런 방패도 쥐여주지 않은 채 아이들을 전장으로 밀어 넣는 무책임한 낭만주의가 될까 봐 주저했다. 교사인 나조차 경쟁이 주는 공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로의 말 한마디가 도움이 되기보다, 현실을 외면한 말로 남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주저함을 조금씩 거두려 한다. 타인과 비교되는 좌표 속에서만 안도감을 느끼는 아이들의 눈빛 앞에서, 어른의 유보는 결과적으로 이 사다리 게임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다리의 꼭대기에 오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그 사다리에서 언제든 내려와도 무너지지 않을 '내면의 대지'를 마련하는 일이다. '비교되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존엄하다'는 감각, 타인을 짓밟지 않고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신뢰를 되찾아 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몇 등급이야"라는 질문을 조금 늦추고 "너는 무엇을 이해했니, 무엇이 어려웠니"를 먼저 묻는 쪽으로 내 질문의 방향을 틀어본다. 수업에서도 누군가를 이기는 경험보다, 누군가와 함께 협력해 내는 경험이 아이들 기억에 소중한 자산으로 남도록 애쓰려 한다. 누군가의 성취가 누군가의 패배로만 남지 않도록, '함께 잘하는 법'을 배울 장면을 늘리려고 한다.
한 줄의 서열이 삶 전체를 덮치지 않도록
그리고 이 말이 교실 안의 좋은 기억으로만 남지 않으려면, 사회 역시 사다리에서 미끄러진 사람도 다시 숨을 고를 수 있는 땅을 더 넓혀야 한다. 우리에게는 아이들에게 사다리 말고 다른 지도를 건네줄 책임이 있다. 학교 밖에서도 '성장의 대지'가 조금이라도 넓어져야 한다. 실패했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안전망, 학벌과 스펙이 아닌 실제 역량과 태도를 더 오래 관찰하는 채용 문화 같은 것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한 줄의 서열이 삶 전체를 대표하지 않도록, 다양한 경로의 삶이 '차선'이 아니라 하나의 삶으로 존중받는 풍경이 조금 더 많아져야 한다. 사람을 한 줄로만 세우지 않기 위한 장치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사회, 그런 사회가 되어야 비로소 "성공보다 성장"이라는 말이 공허한 위로로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쟁을 무조건 없애자는 선언이 아니라, 경쟁이 '존재 확인의 유일한 언어'가 되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경쟁은 어떤 영역에서는 기준을 세우고 실력을 가늠하게 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기준이 인간의 존엄을 대신하고,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순간 삶 전체가 붕괴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면, 그 사회는 너무 많은 아이에게 너무 이른 나이부터 숨 가쁨을 강요하는 셈이다.
수직의 사다리 대신 수평의 대지를 향하여
나는 아직도 그날의 문장을 자주 떠올린다. "경쟁이 없으면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요." 그 말은 단지 한 학생의 의견이 아니라, 우리가 아이에게 건네 온 세계의 지도였다. 사다리 위에 표시된 좌표만이 '나'의 증거가 되는 지도. 그 지도 밖에서 아이들이 숨 쉬는 법을 잃어가는 지도.
하지만 나는 또한 기억한다. 급식판을 먼저 건네던 손, 넘어진 친구 곁에서 속도를 늦추던 발. 그 사소한 장면들은 사다리 바깥의 땅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성공의 꼭대기만이 삶의 목적이 되는 세계에서, 그 아이들은 잠깐씩 다른 호흡을 보여 준다.
나는 학교에서 그 호흡이 꺼지지 않도록, 그 작은 대지가 더 단단해지도록 오래도록 땅을 고르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이 누군가를 추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스스로 듣기 위해 달릴 수 있도록. 비교의 두려움에서 잠시 벗어나 고유한 존재로 숨을 쉴 수 있는 사회는, 결국 그런 단단한 땅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