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실 소충사 숭의문 ⓒ 이완우
지난 20일 아침, 임실 성수면의 국가 보훈시설인 소충사에 오수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 10여 명이 도착하였다. 이들은 '섬진강 역사교실'의 내 고장 현장 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기자는 이날 소충사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했다.
임실 소충사는 대한제국 시기(1907년~1908년)의 대한의병장 이석용(1878∼1914)과 순국한 28 의병의 호국 넋을 기리는 현충 시설로 제례와 참배의 성역이다. 홍살문, 숭의문, 소충사(본당)와 묘역의 사우(祠宇, 사당) 시설이 산비탈의 경사를 차례로 올라가면서 건축 되었다. 기념과 전시 공간으로 기념관, 의병 행렬 동상과 유적비군(遺蹟碑群)이 시설 되었다.
소충사는 보훈시설의 사우이므로 이동에 예법을 지키면 좋다. 삼문(三門)의 출입문은 동입서출(東入西出)하고, 계단은 연보(連步)하여 오르고 내린다. 연보는 계단을 오를 때는 오른발을 한 계단 위로 올리고, 왼발을 오른발 옆에 올려놓는 반복된 동작이다. 학생들을 안내하여 홍살문(紅箭門)으로 올라갔다. 돌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신성한 구역임을 알리는 홍살문 앞에서 마음이 절로 경건해진다.
숭의문(崇義門)은 정면 삼간(三間)의 형태이다. 소충사에 모셔진 대한의병장과 의병들의 숭고한 의로운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의 삼문(三門)이다. 중문(中門)에는 커다란 태극 문양이 선명하다. 중문은 신문(神門)으로 소충사에 모셔진 호국의 혼령들의 출입을 상징하는 문이다. 오른쪽의 동문(東門)을 오른발을 올려 문지방을 밟지 않고 넘어갔다. 마음을 추스르며 발을 모으고 천천히 움직이는 동작으로 학생들은 차분해지고 경건해진 표정이었다.
산기슭의 나무들이 연두색 새싹을 틔우고 봄꽃에 못지않게 유난히 선명했다. 4월 중순의 상수리나무와 단풍나무 신록은 나무마다 지닌 생명의 숨결 만큼 층층이 푸르고 다채로웠다.
햑생들과 함께 오른 31단의 계단

▲임실 소충사 본당 ⓒ 이완우
소충사 본당(사우)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31단이었다. 계단을 모두 오르니 한 학생이 "어, 31계단이네. 31이면, 3.1절 만세인가봐"라고 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임실 오수보통학교(오수초등학교 전신) 학생들이 보통학교 학생으로서는 단체로 전국에서 처음으로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다.
소충사 본당은 전면 3칸의 건물인데, 중문과 동문, 서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소충사 본당은 대한제국 시기에 순국한 대한의병들을 배향하며 제례를 올리는 사우이다. 중앙에 순국 의병장의 사진과 위패가 놓였고, 양쪽에는 14위 순국 의병들의 위패가 정갈하고 엄숙하게 줄지어 있었다.
동문 앞 섬돌에서 신발을 벗고 차례로 소충사 본당으로 들어갔다. 소충사의 위패 앞에 학생들이 스스로 무릎을 꿇고 가지런히 앉았다. 어린 학생들이 스스로 갖춘 경건한 마음과 행동이 대견 하였다.
햇살이 비껴 드는 본당 내부의 어둠 속에서 29위의 검은 위패들이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평소 보아온 화려한 박물관의 전시물과는 결이 다름을 느꼈는지 숙연한 정적 앞에서 숨을 조용히 고르고 있었다. 엄숙하게 묵념을 올렸다. 본당 서문으로 나와서, 동문 앞 섬돌 아래에 있는 신발을 옮겨다 신었다.

▲임실 소충사 대한의병의 묘소 ⓒ 이완우

▲임실 소충사 대한의병장의 묘소 ⓒ 이완우
소충사 본당에서 순국한 대한의병 28위의 합동 묘역으로 올라갔다. 이곳 계단도 31단이었다. 합동 묘소 앞에 정렬하여 묵념으로 예를 올렸다. 이곳에서 소충사 앞의 너른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한의병장의 묘소 앞에서 멀리 임실의 고덕산, 삼봉산, 운현고개와 진안의 내동산 등 성수지맥 줄기의 산들이 펼쳐져 있었다. 풍경의 가운데 보이는 삼봉산은 이석용 의병장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삼봉산 아래에 왼쪽 고덕산 방향으로 대밭마을에는 이석용 의병장 생가터가 있다. 대밭마을에서 작은 고개 하나 넘은 삼봉산 도화동(桃花洞)에는 의병장이 어린 시절부터 다녔던 서당이 있다(관련 기사:
소년이 항일 의병 되기까지... 때를 기다린 사연).

▲임실 소충사 묘역에서 본 풍경 ⓒ 이완우
삼봉산 아래의 선비 이석용은 29세인 대한제국 1907년에 정미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임실, 진안, 장수, 완주, 순창, 남원, 정읍, 장성, 함양 등에서 의병 전쟁을 수행하였다. 소충사 앞에 펼쳐진 고덕산, 삼봉산, 운현고개와 내동산 등 평화로운 풍경은 120년 전에 대한의병들이 이들 산속을 행군하던 전쟁터 현장이었다.
소충사 묘역을 내려왔다. 학생들은 올라왔던 동편 계단이 아니라 서편 계단으로 내려오면서, 이제는 왼발을 먼저 내딛는 연보를 잊지 않았다. 비탈과 석축 사이에 노란 민들레와 붉디붉은 영산홍이 꽃밭을 이루었다.

▲임실 소충사 비석군 ⓒ 이완우

▲임실 소충사 대한의병의 비 ⓒ 이완우
유적비군에는 조의단비, 28의사기적비, 호남창의동맹단비가 엄숙하였다. 이석용 의병장의 비석과 28의병의 비석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다.
유적비군의 맞은편에 기념관이 있었다. 기념관에는 이석용 의병장의 유품, 의병 활동의 자료와 여러 문헌과 일제의 재판 기록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의병 부대가 일본 군경과 맞서 싸우는 전투 현장을 디오라마로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임실 소충사 기념관 ⓒ 이완우

▲임실 소충사 기념관 대한의병 전투 장면 디오라마 ⓒ 이완우
기념관의 재판 기록을 살펴보았다. 일제는 의병들을 체포하면 폭도(暴徒)라는 굴레를 씌워 형사법을 적용했다. 의병들의 보급 투쟁(식량 확보 등)과 소지한 무기는 불법물로 간주하여 강도 혐의의 근거로 삼았다. 일본군경 및 친일파 처단과 전투 중 발생한 화재는 살인 및 방화 등으로 기소하였다. 일제의 재판을 받는 의병들은 주장하였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려 한 것이다. 이 재판은 불법이다."
의병들은 외국 영사관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들은 대한의 군대이므로 교전단체 인정을 요구했다. 당시 국제법(헤이그 협약 등)에 따르면 의병 부대는 교전단체로 인정될 수 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일제는 국제법을 철저히 무시하였다. 의병들을 비도덕적인 범죄자로 몰았고, 의병장에게는 내란 혐의를 적용하였다.

▲임실 소충사 대한의병 행진 동상 ⓒ 이완우

▲임실 소충사 대한의병 행진 동상 ⓒ 이완우
대한의병 정신이 산천 곳곳에 숨 쉬길
소충사 기념관 아래에 의병 행진 동상이 있다. 이곳은 결의와 기백이 충천한 대한의병을 마주하는 공간이었다. 의병들이 행진 하는 동상은 일본 군경을 상대로 유격 전술을 펼치는 장면을 형상화하였다.
의병 부대는 적의 추격과 삼엄한 감시, 그리고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르는 밀고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한 곳에 머물 수 없었다. 적이 예측할 수 없는 험준한 산세를 따라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던 의병들에게 '길'은 곧 생존이자 투쟁의 현장이었다.
의병들은 통상적으로 하루 평균 30km 정도 행군했고, 일본 군경의 추격 때는 45km 정도까지 행군했다고 한다. 평지 아닌 산악 지대는 더 체력 소모가 심하기 마련이었다. 산속에서 새우잠을 자고 이슬 맞으며 밤을 새우는 생활은 기본이었다.
의병 행진 동상 앞에서 김민기 작사·작곡의 '늙은 군인의 노래'의 동영상을 아이패드로 들려준 뒤, 기자가 직접 개사한 '대한 의병의 노래'를 불러보았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대한 의병의 노래'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차분히 들려주었다.
우리는 태어나고 자란 고향 강산에서 의병이 되었다. 대한국 지키는 일편단심으로 바람 불고 눈 내린 산야 수만 리를 걸었다. 대한 독립을 위하여, 일제 군경과 싸웠다. 우리의 청춘은 푸른 옷에 실려 갔고, 우리의 목숨은 고향 산천에 꽃으로 피어났다. 아들아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러운 대한 의병의 아들딸이다.
학생들에게 노래의 의미를 들려주는 동안, 기자는 마치 오랜만에 교실에서 수업 하는 듯한 벅찬 기분을 느꼈다.
대한제국 시기 1907년~1910년 사이에 일본군의 <조선폭도토벌지>와 국내 학계의 연구를 종합하여 추정하면 공식 기록된 교전이 약 2852회, 전투 참가 의병 수 약 14만 1815명(독립기념관 자료, 연인원 기준), 전국 각지의 의병 부대(장) 수는 약 400여 부대였다고 추정한다. 1908년 한 해에만 약 1452회의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전국에서 매일 4회 꼴로 의병이 일본군과 교전했다는 수치이다(근거 자료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일본군의 <조선폭도토벌지>).
대한의병들의 희생과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로 이어졌다. 대한의병 정신이 이 땅의 산천 곳곳에서 계속 살아 숨 쉬기를 바랐다.

▲임실 소충사 묘역의 봄꽃 ⓒ 이완우
이날 임실 소충사를 찾은 학생들의 발걸음은 체험을 넘어 역사를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소충사는 그 기억을 오늘의 배움과 내일의 책임으로 이어주는 살아 있는 역사 교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