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하나가 통째로 물들다

▲분홍빛 철쭉 한 송이 한 송이가 모여 봄날 언덕을 가장 화사한 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 김홍의
4월 20일, 지하철 4호선 수리산역 3번 출구를 나서자마자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타오르는 듯한 분홍의 물결이었다. 도보로 불과 3분 거리에 있는 철쭉동산은 '역세권'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봄의 압도적인 색채가 도시 한복판으로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언덕에 가까워질수록 그 색채는 비현실적일 만큼 선명해졌다. 언덕 위로 오르자 꽃보다 먼저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셔터를 누르고, 누군가는 그 화사한 풍경 속에 가만히 서 있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생의 한순간인 '봄'을 붙잡으려 애쓰는 풍경. 그것은 꽃의 개화만큼이나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분홍빛 철쭉 물결 사이로 이어진 길. 봄은 이렇게 언덕을 따라 천천히 번져가고 있었다. ⓒ 김홍의
이 장엄한 풍경 앞에서 문득 이 땅의 과거를 떠올려본다. 1999년 송전탑이 세워진 삭막한 언덕에변화가 시작된 것은 군포시 공무원들과 시민들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면서부터다. 한 그루, 한 그루 묘목을 심던 손길들이 모여 2만 제곱미터의 언덕을 빈틈없는 철쭉 군락으로 채웠다. 20여 년의 시간이 흐르자 이곳은 당당히 '군포 8경' 중 제6경에 이름을 올렸다. 정성으로 빚어낸 기적이기에 그 의미는 더욱 또렷하다.
누군가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기록한다는 것

▲도심 한복판 언덕을 가득 메운 군포 철쭉동산의 분홍 물결. ⓒ 김홍의
시간이 날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여행을 다닌 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카메라 두 대를 양어깨에 메고 다니는 탓인지, 낯선 이들은 종종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작가님, 실례가 안 된다면 사진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솔직히 말하면 예전에는 이런 부탁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취미로 하고 있는 사진생활에 '작가'라는 호칭은 내게 과분하게 느껴졌고, 사색의 흐름이 끊기는 것도 아쉬웠다. 요청이 이어지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내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보며 환하게 웃던 어느 노부부의 모습을 마주한 이후 생각이 달라졌다. 나에게는 스쳐가는 한 장면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오래 간직하고 싶은 단 한 번의 순간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는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몇 번이고 셔터를 누른다. 다양한 각도에서, 조금 더 정성껏. 내가 남긴 한 장의 사진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문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람있는 일이라 믿게 되었다.
54만 명이 찾은 분홍 바다, 모두를 위한 봄

▲분홍빛 철쭉 물결 사이를 걷는 두 사람. 봄은 누군가와 함께한 풍경으로 오래 기억된다. ⓒ 김홍의
올해로 12주년을 맞이한 '군포철쭉축제'는 수도권을 대표하는 봄 축제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에만 54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는 사실이 그 인기를 보여준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이 축제가 지향하는 '포용성'이다. 완만하게 조성된 데크길 덕분에 휠체어나 유모차를 이용하는 방문객들도 무리 없이 꽃길을 걸을 수 있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무장애 축제'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더욱 깊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세대에 따라 꽃을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젊은이들은 꽃 사이로 들어가 사진 속 주인공이 되고, 나이가 들수록 꽃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감상의 대상이 된다. 꽃을 대하는 시선은 그렇게 조금씩 달라진다.
활짝 핀 꽃 앞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젊은 시절의 꽃다운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풍경 속에 서 있던 사람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꽃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간다.

▲철쭉으로 가득한 분홍빛 언덕 사이, 두 사람의 걸음이 한 폭의 봄 풍경이 되었다. ⓒ 김홍의
봄은 기록되고, 기억은 머문다

▲분홍과 붉은빛, 흰 철쭉까지. 한 언덕 위에 모인 봄의 색들이 눈부신 풍경을 완성했다. ⓒ 김홍의
나는 꽃을 좋아한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진다. 시간이 더 흐른 뒤에도 지금처럼 꽃을 좋아하게 될까? 아니면 이미 조금 일찍 여유를 배우고 있는 걸까? 어쩌면 20여 년 전 이 언덕 위에서 희망을 심었던 사람들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오늘 마주한 군포의 철쭉은 언덕을 가득 채운 채 뜨겁게 피고 있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계절이 건네는 인사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분홍빛 언덕 한가운데서 누군가의 가장 화창한 하루를 기록하며 나의 계절 또한 함께 채워가고 있다.
화사한 계절을 어디에, 어떻게 남길지는 각자의 몫이다. 다만 그 하루를 오래 기억하고 싶다면 철쭉동산의 언덕을 한 번쯤 걸어볼 이유는 충분하다.

▲화사한 봄날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면 절정의 시기를 맞은 철쭉동산을 한 번쯤 걸어볼 만하다. ⓒ 김홍의
[여행 정보] 군포철쭉축제 제대로 즐기기
축제 기간: 2026년 4월 18일(토) ~ 4월 26일(일)
찾아가는 길: 지하철 4호선 수리산역 3번 출구 (도보 3분)
입장료: 무료
관람 팁: 축제기간 '차 없는 거리' 운영, 체험 프로그램 및 먹거리 풍부
이동 편의: 휠체어·유모차 이동 가능한 데크길 조성
주변 명소: 산본 로데오거리, 반월호수 등 군포 8경 연계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