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일 경기 용인시에 위치한 유기견 보호소 '레인보우쉼터'에서 사회공헌 단체 '크래용' 소속 크리에이터들이 봉사를 진행했다. 참여자들이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공익저널 차종관
지난 18일, 화창한 봄날임에도 경기 용인시에 위치한 유기견 보호소 '레인보우쉼터' 안은 한여름처럼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로 가득했다. 평소 스튜디오의 화려한 조명 아래 섰던 유튜브·틱톡·인스타그램의 유명 크리에이터들은 방진복을 입고 흙먼지 날리는 견사 입구 바닥에 자갈을 깔았다. 건축 중인 입양센터의 자재를 정리하고, 강아지 배설물을 치우는 물청소도 마다하지 않았다.
도합 2300만 명의 팔로워를 가진 크리에이터 봉사단체 '크래용' 멤버들은 왜 스스로 고된 노동의 현장으로 뛰어들었을까. 보호소의 흙먼지 속에서 방진복을 입고 구슬땀을 흘리던 김채림(채림처럼) 공동대표는 "봉사를 할 때 헌신한다는 무거운 마음은 가지지 않는다. 그저 '주말에 친구들과 코인 노래방에 간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즐긴다. 자연스럽게 참여자도 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크리에이터랑 봉사할래용?'이라는 친근한 슬로건을 내건 크래용은, 봉사를 '대가 없는 희생'이 아닌 '힙하고 섹시한 취미'로 재정의하고 있다. 크리에이터와 팬이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사회공헌과 시민참여의 패러다임을 열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적 이타심을 꿰뚫은 크래용의 철학
크래용의 시작은 방치된 선한 영향력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비롯됐다. 김채림 공동대표는 "크리에이터 친구들이 봉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만, 어디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허들이 있었다"며 "이 번거로운 절차를 해소해 방치된 영향력을 모으고자 단체를 창단했다"고 전했다.
이들은 대중이 봉사에 대해 가지는 무겁고 진부한 인식을 깨고 싶었다. 학창 시절 경험했던 비자발적 봉사에 대한 거부감 탓에, 시민들은 흔히 봉사를 대가 없는 노동으로 여긴다. 하지만 크래용은 시민들의 내면에 자리한 무의식적인 이타심에 주목했다. 봉사를 귀찮아하면서도, 막상 눈앞에 무거운 짐을 든 어르신이나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같은 재난을 마주하면 '눈앞에 보이니까 당장 도와야지'라며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18일 경기 용인시에 위치한 유기견 보호소 '레인보우쉼터'에서 사회공헌 단체 '크래용' 소속 크리에이터들이 봉사를 진행했다. 참여자들이 보호소 관계자의 브리핑을 듣는 모습. ⓒ 공익저널 차종관
크래용은 이러한 선한 마음을 행동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인플루언서와의 네트워킹'을 팬들에게 제시해 봉사의 진입 장벽을 대폭 낮췄다. 크래용 소속 크리에이터인 최유진(걍매실) 씨는 "봉사활동을 '힙한 소모임'으로 브랜딩하는 중"이라며 "하나의 재밌는 취미 활동으로 자연스레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크래용은 '도파민에 중독된 MZ세대'를 공략하는 '밀당 마케팅'을 펼쳤다. 유기견을 예로 들면, 강아지의 불쌍하고 슬픈 사연을 전시하지 않고 "유기견 봉사 오지 마세요"라는 문구로 영상을 시작하는 식이다. 곧이어 봉사 현장의 크리에이터들이 강아지 무리와 즐겁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교차시켜 보여준다.
김채림 공동대표는 이를 두고 "도파민에 중독된 MZ들에게 밀당을 하면서 접근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크래용의 이같은 전략은 팔로워들에게 적중했다. 유기견 봉사 영상들은 적게는 20만에서 많게는 100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봉사활동에 대한 콘텐츠의 트렌드를 뒤바꾸고 있다.
마케팅은 힙하지만, 현장의 노동은 날것 그대로다. 최유진 씨는 "처음엔 단순히 강아지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참여했지만, 막상 오니 냄새도 나고 환경이 열악해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그는 "다 같이 스포츠를 하듯 더러웠던 곳이 우리의 힘으로 깨끗해지는 과정을 보며 내 스스로가 쓸모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며 "현장의 땀방울이 주는 자아실현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연애 예능 프로그램 '환승연애3' 출연자이기도 한 김광태 크래용 공동대표 역시 "봉사란 내 몸을 움직이고 노력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말 좋은 일"이라며 "크리에이터가 먼저 나서니 팬들도 봉사의 본질적인 매력에 빠지고 있다"고 말했다.
선한 나비효과, 수많은 2세대 단체들을 낳다

▲18일 경기 용인시에 위치한 유기견 보호소 '레인보우쉼터'에서 사회공헌 단체 '크래용' 소속 크리에이터들이 봉사를 진행했다. 참여자들이 봉사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 공익저널 차종관
'크리에이터랑 봉사할래용?'이라는 친근한 슬로건에 이끌려 현장을 찾은 팬덤은, 이내 사회공헌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으로 변모하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팬미팅에 간다고 생각하며 참여했지만, 현장에서 좋아하는 크리에이터와 동료가 되어 고된 노동을 하다 보면 봉사의 가치를 마음에 자연스레 내재화하게 되는 것이다.
최유진씨는 "자신이 팬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일반 봉사자인 척 묵묵히 땀 흘려 일하고, 모든 활동이 끝난 뒤에야 조심스레 팬심을 고백하며 편지를 건네는 분들이 있다"며 "나를 따라 봉사라는 취미 활동을 함께 해주는 것을 보며 선한 영향력이 무엇인지 깨닫고 자아실현을 느낀다"고 전했다. 김광태 공동대표 역시 "나를 보러 온 팬들이 나중에는 봉사에 진심으로 몰입해 나보다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볼 때 오히려 내가 그분들을 본받아야겠다는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김채림 공동대표는 과거 봉사 현장에 크리에이터 박재한(빠니보틀) 씨의 팬으로 찾아왔던 14살 소년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14살 소년이 17살이 될 때까지 매달 꾸준히 봉사에 출석했다"며 "'PC방을 가는 것보다 여기에 투자하는 7시간이 훨씬 값지다'고 말해줬을 때, 이 활동이 정말 의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개개인의 변화는 봉사 생태계를 변화시키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김채림 공동대표는 "우리의 단체 활동을 보고 자극을 받아 자발적으로 파생된 '2세대 MZ 봉사단체'가 5~6개 이상 생겨났다"며 "크리에이터의 팔로워들이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는 주체로 성장했음을 확신했다"고 덧붙였다.
유기견 봉사에서 '집수리'까지... 인플루언서가 주도할 ESG의 미래
크래용은 어느새 설립 3년 차에 접어들었고, 유기견 봉사 활동만 28회를 진행했다. 크리에이터와 팬이 함께 이룬 변화 성과는 기업과의 연계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크래용은 에르메스와 조선호텔 등 기업 사내 봉사팀과 유기견 봉사를 진행했으며, 서울시자원봉사센터와 홍보 부스를 운영하는 등 성공적인 협업 사례를 남겼다. 이날의 용인 봉사 역시 MCN '숏뜨'의 사회공헌 프로젝트와 연계해 시너지를 냈다.
김광태 공동대표는 "앞으로는 기업들과의 협업을 통해 봉사의 규모를 몇백, 몇천 명 단위까지 거대하게 확대해 보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수많은 크리에이터를 보유한 MCN과의 연대가 국가와 기업이 당면한 ESG 과제를 빠르고 파급력 있게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18일 경기 용인시에 위치한 유기견 보호소 '레인보우쉼터'에서 사회공헌 단체 '크래용' 소속 크리에이터들이 봉사를 진행했다. 참여자들이 봉사를 마친 후 유기견들과 놀아주는 모습. ⓒ 공익저널 차종관
현재 크래용은 대중의 접근성을 고려해 진입 장벽이 낮고 흥미를 끌기 좋은 '유기견 봉사'나 '요리(반찬 나눔)' 활동을 위주로 기획하고 있다. 김채림 공동대표는 "지금은 사람들에게 '나도 봉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심어주는 것이 우선"이라면서도 "훗날 단체가 더욱 성숙하면 '집수리' 같이 고된 영역까지 사람들을 이끌고 싶다"는 청사진을 드러냈다.
크래용이 선보인 사회공헌·시민참여 모델은 'ESG 경영'의 새로운 해답이기도 하다. 김채림 공동대표는 "기업 입장에서 사회공헌은 반드시 해야 하는 숙제"라면서 "우리와 함께 더 재밌고, 멋있고, 섹시하게 '임팩트'를 만들자고 제안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공익저널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