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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8 11:07최종 업데이트 26.04.18 11:07

"왜 우리는 항상 바빠?" 손자의 질문 앞에서 멈추다

그림책 <천천히 천천히> 가 일깨운 '속도의 감각'

아침은 늘 분주하다. 아들과 며느리가 출근하고 나면, 나는 손자 로리를 챙겨 유치원 버스에 태운다. 정해진 시간 안에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가방을 챙기는 일은 생각보다 빠듯하다. 그래서일까. 하루의 시작은 언제나 비슷한 문장으로 채워진다.

"빨리 먹자."
"옷 입어야지."
"양치는 언제 할 거야?"

로리는 느릿느릿하다. 딴청을 피우기도 하고, 하던 일을 끝까지 마치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점점 조급해진다. 버스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다른 부모들에게나 버스기사님께 민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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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쥔 시간은 늘 모자라고, 그 부족함을 메우는 방식은 결국 재촉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로리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할머니, 왜 우리는 항상 바빠?"

그 질문은 뜻밖에도 단순하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나는 늘 바빴고, 로리는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속도를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당연하게 여긴 하루의 속도가, 아이에게는 낯선 긴장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고르다가 케이트 도피락(글)과 크리스토퍼 실라스 닐(그림)의 <천천히 천천히>를 발견했다. 무심코 첫 장을 펼치면서 나는 로리의 질문을 떠올랐다.

책표지 케이트 도피락(글) 크리스토퍼 실라스 닐 (그림)
책표지케이트 도피락(글) 크리스토퍼 실라스 닐 (그림) ⓒ 나는별

책 속 아이의 하루 역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침부터 이어지는 분주함, "빨리빨리"라는 말 속에서 아이는 쉼 없이 움직인다. 학교로 향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또 다른 일상 속으로 밀려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주변의 풍경은 점점 흐릿해진다. 물건들은 제자리를 잃고 흩어지고, 장면은 어지럽게 겹쳐진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아이의 세계는 선명함을 잃는다. 그림은 말없이 그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익숙해서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던 장면들이다.

그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마음이 멈칫했다. 어쩌면 내가 로리에게 만들어주고 있던 하루가 이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한 문장에서 방향을 바꾼다. 의도된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만 멈춰!
천천히, 천천히 해도 괜찮아.

이 문장 이후, 모든 장면이 바뀐다. 아이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진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동안 스쳐 지나가던 세계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언덕 위에 서서 느긋하게 마을을 내려다보고, 잔디 위에 몸을 눕혀 하늘을 바라본다. 꽃과 나비, 바람과 물결, 이름 모를 소리들이 하나씩 또렷해진다.

주위를 둘러보렴.
천천히 바라보면 세상은 정말 아름다워!

아이는 더 이상 어디론가 급히 가려 하지 않는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숨을 들이 마시고 천천히 내쉬어 보며 느긋함을 즐긴다.

아이의 곁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친구처럼 붙어있다. 함께 달리고, 멈추고, 바라보는 존재. 그 둘은 누가 더 빠른지를 따지지 않는다.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비가 오는 날에도, 밤이 내려앉은 뒤에도, 아이의 하루는 점점 차분해진다.

그리고 별빛 아래에서 아이는 별을 세기도 한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빨리 빨리는 이제 그만.
대신 천천히, 처-언-천-히.

빠르게 지나간 하루에서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 감각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다시 로리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왜 우리는 항상 바빠?" 그 질문은 아이의 것이었지만, 결국 어른에게 향하고 있었다. 아이의 하루를 바쁘게 만든 것은 우리의 속도였다. 우리는 효율을 위해 서두르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재촉한다. 그 과정에서 놓치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돌아보지 못한다.

<천천히 천천히>는 그것을 조용히 짚어준다. 느림은 단순히 속도를 줄이는 일이 아니라, 감각을 회복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풀잎 위에 잠시 앉아보는 일,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듣는 일 같은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하루를 다시 채운다.

어쩌면 우리는 아이에게 더 빠르게 사는 법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아이가 이미 알고 있는 속도를 잊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 속도는 느린 것이 아니라, 삶을 제대로 바라보는 속도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


천천히 천천히

케이트 도피락 (지은이), 크리스토퍼 실라스 닐 (그림), 김세실 (옮긴이), 나는별(2021)


#그림책#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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