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똘망똘망하게, 유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아온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4월엔 '나를 살게 하는 것'에 대해 씁니다.
요즘 식당에 가면 이제 정말 봄이 왔다는 듯 도다리 쑥국을 찾는 아저씨들이 있다. 뽀얀 국물을 숟가락으로 뜨는 그들의 얼굴은 어딘가 들떠 있다. 이거 한 그릇이면 기력이 으라차차 올라올 것처럼 비장해서 놓치기 아까운 표정들이다. 하지만 나에게 4월은 도다리가 아니다. 꼭 닮았지만 끝내 같아질 수 없는 다른 생선의 계절이다. 가자미다.
나는 양념을 발라 구운 가자미를 좋아한다. 앞뒤로 노릇하게 구운 뒤 송송 썬 파와 고춧가루를 섞은 간장 양념을 쓱쓱 발라 다시 한 번 불에 올리면, 살짝 타는 듯 올라오는 냄새가 대문 밖까지 번진다. 반면 아빠는 부드럽고 담백한 맛의 가자미를 더 좋아했다. 기름에 튀기듯 구운 가자미의 껍질을 살며시 걷어내고 하얗고 순박한 살점을 떠서 입으로 넣을 때면 아빠의 왼쪽 보조개가 유난히 폭 들어갔다. 귀한 생선을 처음 맛보는 어린 아이 같았다.
39년생 아빠와 가자미

▲한 줄로 선 가자미들깨끗이 손질한 가자미를 옷걸이에 걸어 바람이 잘 들어오는 베란다에 말리는 엄마의 지혜. 그 덕에 가자미는 풍미가 더 좋아졌다. ⓒ 이정숙
아빠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꼭 가난했던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1939년생 아빠는 자식들 모두를 배불리 먹일 수는 없던 시대에 태어난, 가난한 집 셋째였다. 아빠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보리밭 한가운데 농협창고같이 서 있었다고 했다.
그 은은히 퍼지던 보리 냄새를 아빠는 86세가 되어서도 생생히 들이켰다. 돈이 없어 야간부를 다니던 그 시절, 수돗물로 배를 채우고 뱃가죽이 딱 들러붙은 채 화장실에서 담배나 한 대 뺏어 피우면 하루가 지나갔다. 보리를 불려 물을 가득 부어 지은 밥에, 양념 따위는 사치인 아무 맛 없는 무김치와 맨 된장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어른이 되고 시장에서 속옷장사로 돈을 꽤 많이 번 후에는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사먹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아빠는 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들에 더 집착하는 편이었다. 시장에서 파는 국수를 좋아했고, 고향 지천에 흐드러지게 폈던 풀들을 잊지 못해 향긋한 봄나물을 좋아했다. 음식 솜씨도 좋아서, 엄마가 장사를 하고 있으면 아빠는 집에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었다.
아빠는 특히 물 좋은 생선을 고르는 데 전문가였다. 생선은 가난했던 시절의 최고 사치 품목이 아니었던가. 생선 한 마리를 사더라도 이마에 주름이 들어갔다. 혼자 진지했다. 백화점 식품관까지 가서 한참을 들여다보며 공을 들여 골랐다.
그러다 보니 생선 코너의 직원들끼리 내기가 붙었다고 했다. "저 남자는 은퇴한 공무원일 것이다." 혹은 "아니다. 홀아비다." 그녀들의 쇄도하는 질문에 아빠는 신비주의를 고수했다. 둘 다 틀렸기 때문이다. 아빠는 그냥 생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홍냥홍냥한 게 참 맛있다."
생선 중에서도 유독 가자미를 좋아했던 아빠는 부드러운 살을 떠먹을 때마다 이렇게 말을 했다. "홍냥홍냥"이 뭐냐고 물으면, "내골내골" 하단 답이 돌아왔다. 설명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았다. 부드럽고, 고소하고, 아무튼 좋은 거라는 뜻이었다. 우리는 그 말이 웃겨서 한참을 마주보고 웃었다.

▲가자미 구이 ⓒ 이정미 제공
나이가 들면서 아빠는 자주 입맛을 잃었다. 미식가였던 아빠는 뇌경색과 코로나를 앓으며 음식 냄새와 맛에 더 민감해졌다. 엄마는 열 가지 곡물을 넣은 죽을 아침마다 끓여 아빠의 기운을 북돋우고 신선한 나물과 과일들로 상을 차렸다. 하지만 봄을 타는 아빠는 숟가락을 들었다가도 힘없이 내려놓곤 했다.
그즈음 우연히 알게 됐다. 가자미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 알이 꽉 차고 가장 실해진다는 것을. 아는 집이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생선가게를 했다. 나는 그 가게에 부탁해 3월 말까지 노량진에서 가장 크고 좋은 가자미가 들어오는 날을 골라 아빠에게 가득 보냈다. 4월 19일, 아빠의 생일상에 올라갈 녀석들이었다.
엄마는 그것들을 옷걸이에 걸어 이틀쯤 베란다에서 건조시켰다. 그렇게 말린 가자미는 껍질이 꼬들꼬들해지고 살은 더 단단해졌다. 최상급의 상태로 잘 건조된 가자미는 하나씩 포장 되서 김치냉장고로 들어갔고, 아빠 생일상에 늠름하게 올라왔다. 아빠는 그 가자미를 볼 때마다 거룩하다며 성호를 긋고 "아멘!"을 외쳤다.
그렇게 아빠는 이맘때가 되면 가자미를 기다리는 게 습관이 됐다. 당신의 팔뚝만큼 큰 가자미는 처음 본다며 감탄사를 연발했고, 몇 번의 고비 때마다 아빠는 그걸 먹고 기력을 차렸다. 그렇게 오래오래 우리의 가자미 찬양은 계속 될 줄 알았다. 2년 전 여름까지는.
나는 언제 가자미를 구울 수 있을까
두 번째 코로나에 걸린 아빠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응급실로 걸어 들어간 지 5일 만에 아빠는 거짓말처럼 떠났다. 늘 목에 감던 익숙한 꽃무늬 수건, 체온 조절을 위해 사계절 입고 다니던 검정 조끼, 다 늘어난 회색 운동복을 벗어놓은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황망히 내려와 준 친구들을 보고도, 화장터를 가서도, 서울로 돌아와서도 멀쩡했다. 아빠를 떠나보내고도 이렇게 일상적인 일들을 다 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 쯤 뒤였을까. TV에 가자미를 잡으러 산지직송 여행을 떠나는 예능프로그램이 나왔다. 나는 그걸 보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 화면 속 가자미들이 전부 아빠의 팔뚝처럼 보였다. 주사바늘도 뚫기 힘들 정도로 탄탄했던 아빠의 굵은 팔뚝이 바닷가 그물에 걸려 있었다. 그 뒤로 나는 가자미를 쳐다보지 않았다. 먹지도 않았다.
그렇게 잊으려 했지만 봄이 오면 아빠의 모든 것은 더 또렷하게 찾아온다. 보리밭 한가운데 창고처럼 있던 학교. 그 앞에 아빠가 아직도 서 있을 것 같다.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 사이에서. 국어를 좋아하던 배고픈 소년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하고 멋들어지게 시를 외우던 모습이 떠오른다.
장사하던 시절 거래처 사람들과 거나하게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들어오던 처진 어깨까지도 하나씩. 그렇게 고단했던 하루하루를 살아냈던 아빠를 떠올리다 보면, 결국 내가 보낸 가자미 앞에서 환히 웃던 얼굴까지 기어이 떠오르고야 만다.

▲도다리쑥국 ⓒ 오마이뉴스
홍냥홍냥한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오늘도 식당에는 도다리 쑥국을 먹는 사람들이 앉아 있다. 이번 아빠 생일에는 용기 내어 폭신폭신하고 커다란 가자미를 굽고 싶은데, 시장에 가니 제철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나는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아니다. 4월, 내게는 여전히 가자미의 계절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