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똘망똘망하게, 유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아온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4월엔 '나를 살게 하는 것'에 대해 씁니다.

▲풀냄새가 나는 냄장고요즘 이름값하는 냉장고 채소 칸. 파릇한 채소가 가득이다 ⓒ 정현주
요즘 우리 집 냉장고에서는 풀냄새가 난다. 최신 냉장고가 나왔냐고? 아무리 AI가 발달했다지만 냄새까지는 무리다. 하지만 내 코에는 분명 풀냄새가 느껴진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육식가족의 입맛이 슬금슬금 밭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이, 청경채, 당근 사재기는 기본이고 멀쩡한 양배추 한 통이 있는데도 또 사 온다. 그 시작은 뜻밖에도 초등학교 교실이었다.
첫 독서논술 수업에 나타난 귀인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즐겁게 독서논술 수업을 해 보아요."
지난달 20일, 두근두근 내 인생 첫 수업 날이었다. '독서논술' 이름부터 딱딱하고 맛없어 보인다. 딱딱한 수업을 말랑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는 첫 수업에 과감히 모든 교재를 덮고, 근황 토크로 몸풀기 겸 글감을 찾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주 가장 기억에 나는 일이나 사건은 무엇이 있었나요?"
"........"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그냥 재미있었던 일이나 속상했던 일은 없었나요?"
1교시였던 1학년 학생들은 난리가 났었다. 서로 손을 들고, 손을 막고, 심지어 발도 들었다. 참여율은 기대 이상이었다. 물론 막상 발표 순서가 되면 동문서답이나, 질문이 무엇이었냐고 묻기도 했지만. 지금은 2교시, 3학년 학생들이다. 확실히 성숙하고 조심스럽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서 낯가림과 눈치가 레이저로 나왔다. 1초가 1분 같은 침묵 속에서 한 남학생이 손을 슬그머니 든다. 귀인이다.
"어제 저녁에 누나가 봄동비빔밥을 만들어줬는데 맛있었어요."
"봄동비빔밥의 킥은 달걀 프라이인데, 몇 개 올려서 먹었어요?"
"달걀프라이를 할 때는 엄마가 도와주셨는데요. 냉장고를 열었더니 달걀이 3개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졸라서 나는 2개, 누나가 1개를 먹었어요. 그리고..."
소심하게 입을 뗐던 남학생이 칙칙폭폭 시동을 걸더니 속도를 올린다. 옆자리 앞자리 친구들까지 호흡이 같이 올라간다. 서로 발표하겠다고 손을 들고, 급한 마음은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온다.
"봄동비빔밥 나도 먹었는데."
"우리 집은 몇 번 먹었는지 셀 수도 없다."
"달걀 프라이는 두 개가 기본이다. 노른자는 안 익혀야 한다."
꼬꼬무 토크가 이어졌다. 낯설고 어색했던 분위기는 봄동비빔밥 하나로 대동단결이 되었다. 이쯤 되니 귀인은 남학생이 아니라 봄동비빔밥 같았다.
최근 나는 1년 4개월의 비영리 프리랜서를 마치고 영리 프리랜서로 소속을 옮겼다. 말하자면 취직을 한 것이다. 방과후 태리쌤을 닮고 싶은 현주쌤이 되었다. 국어국문학 전공과 방송작가 경력이 있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새로운 도전의 첫 관문을 '봄동비빔밥'님 덕분에 훈훈하게 넘길 수 있었다.
'봄똥비빔밥'이 아니다. 초3 남학생의 입에서 나온 봄'동'비빔밥은 여리디여렸고 파릇했다. 봄'똥'비빔밥이라며 무심코 내뱉은 내 말에 아이들은 빵 터져서 웃었다. 왠지 나의 발음이 속세에 물든 때 같아서 부끄러웠다.
심지어 그 봄동비빔밥을 만들어준 누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 했다. 순간 바쁘게 사는 맞벌이 부부와 남매를 상상했지만, 불 앞에 서는 일은 엄마가 거들어줬다니 가족 합심 요리였나보다. 도대체 봄동비빔밥이 뭐길래.
올봄 마지막 봄동을 사재기 하다

▲봄동 엔딩3월부터 4월초까지 10번은 넘게 해 먹었던 봄동비빔밥. 국도 봄동된장국으로. 건강한 유행이었다. ⓒ 정현주
퇴근길 마트에 들러 봄동 한 다발을 샀다. 사실 나는 이런 유행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저기 두쫀쿠를 사고팔며 요란을 떠는 것이 별로였다.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 같은 날이면 편의점 앞에 배를 내밀듯 등장하는 가판대처럼, 소비를 부추기고 그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런데 이 봄동 귀인은 집으로 모셔보고 싶었다.
"이게 그 유명한 봄동비빔밥이야?"
"유행은 빠질 수 없지. 핫한 음식이니 호호 불며 드세요."
식탁에 모여 앉은 4인 가족의 반응은 의외였다. 소고기를 구운 것도 아닌데 호들갑이 시작됐다. 이게 그 유행하는 봄동비빔밥이냐. 나도 먹어봤다고 자랑해야지. 사진을 찍고, 젓가락으로 숟가락으로 취향껏 비비고, 맛있다며 엄지를 아낌없이 올려주었다. 무엇보다 올해 만 18살 막내 딸이 잃었던 입맛을 찾은 듯 그릇을 싹싹 비워냈다. 입시 실패와 재수 생활로 지쳐 있던 아이가 오랜만에 식탁에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이렇게 식탁에서 떠들며 밥을 먹은 게 언제였던가. 밥묵자 하는 경상도 집안도 아니고, 식탁에서는 '조용히'라며 밥상머리 교육과도 관계가 없는 우리 집. 언제부터인가 4인용 식탁에 마주 앉아도 티비를 보던가 핸드폰을 보며 시선이 모이지 않았고, 아이들 생활이 궁금해 던졌던 질문마저 어느새 훈계처럼 들리던 시간들. 5천 원 주고 산 봄동 한 다발로 이렇게 즐겁고, 푸짐하고, 맛있고, 건강한 가족 시간을 갖게 되다니. 봄동은 정말 귀인이었다.
4월이 시작되자 나는 괜히 조급해졌다. 봄동 걱정이 되어서다. 마트에는 이미 자취를 감췄다.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첫 번째 채소가게에서 사라진 봄동을 확인하고 다음 가게로 향한다. 아직은 안 된다. 벚꽃 엔딩은 참을 수 있어도 봄동 엔딩은 안 된다.
세 번째 가게에서 할머니가 마지막이라며 봄동을 꺼내셨다. 예전처럼 단단하고 단정한 모양은 아니었다. 인기에 지친 듯 잎은 늘어졌고 가운데 노오랗게 있어야 할 부분도 희미했다. 나는 박스에 남은 네 다발을 모두 담아 왔다. 그러다 며칠 전, 독서실에 있다가 밤 12시에 귀가한 딸이 들어오자마자 배가 고프다며 난리를 친다.
"엄마, 나 봄동비빔밥 해줘. 밥은 적게 봄동은 많~이. 매콤하게."
이 아이는 봄동을 달걀처럼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는 재료쯤으로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아파트 단지에 텃밭이 있어 원하면 내려가 뜯어오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자칫 기가 막힐 수 있는 상상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마지막으로 사다 놓은 봄동이 있었다. 덕분에 나는 딸이 봄동비빔밥을 큰 대접으로 클리어하는 모습을 직관할 수 있었다.
유행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성시경 양배추볶음5분만에 완성되는 원디시 아이템. 성시경 추천 양배추볶음 덮밥. 설거지도 적고 다이어트도 되고 굿굿 ⓒ 정현주
유행의 맛을 본 나는 SNS를 통해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시작했다. 성시경이 다른 반찬 필요 없다며 체중감량까지 보여준 '양배추볶음'은 지난주에만 세 번을 해 먹었다. 홍진경이 만들고 정해인이 멈추지 못하던 '오이밥'은 유행을 질색하던 남편도 두 끼나 먹었다. 그것도 두 번째는 먼저 만들어달라고 했다.
"이거 되게 비싼 거야. 어렵게 구한 거야."
"몸에 얼마나 좋은 건데."
어렸을 때부터 오십 년 넘게 들었던 엄마의 식탁 레퍼토리는 비싼 놈, 귀한 놈, 좋은 놈이었다. 그게 늘 식탁에 올리는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거의 듣지 않았다. 반복되는 멘트처럼 흘려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식탁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거 요즘 뜨는 거야. 핫한 거라고."
다행히 이 말은 묻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한 마디로 식탁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예전에는 몸을 위한 음식이 식탁에 올랐다면, 지금은 우리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올라온다. 관계를 채우는 건 결국 이야기였다. 그렇게 유행은 더 이상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말하는 방식이자 서로를 이어주는 언어가 되었다.
어제는 동네 빵집에서 버터떡을 한 팩 샀다. 봄동이든, 버터떡이든 결국 중요한 건 맛이 아니었다. 우리가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게 요즘 내가 식탁 위에 올리는 진짜 메뉴였다. 어쩌면 우리는 맛보다, 함께 나눌 이야기를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새로운 주인공 '버터떡'유행 따라하기 싫다면서 샀다. 버터떡은 두쫀쿠보다는 만족이다. 가격도 맛도. ⓒ 정현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