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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년째 특수교사로 근무 중이다. 중증 시각장애를 가지고 일반 학교 특수학급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매년 벚꽃이 지고 연둣빛으로 온 세상이 새 옷을 갈아입을 즈음 꼭 하는 일이 있다. 교직원과 학생, 학부모님들을 대상으로 장애 인식 개선 교육을 진행하는 일이다.

해마다 돌아오는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조금 더 의미 있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여기에 담긴다. 올해도 직접 나섰다. 지난 3일, 연수가 시작되기 전 교무실에 모인 모든 선생님들께 말했다.

"여기 연수 자료가 있습니다. 원하시는 음료수 하나씩 가지고 가세요."

수업에 사용 한 음료수캔 상표명을 가려 불편함을 체험한 연수
수업에 사용 한 음료수캔상표명을 가려 불편함을 체험한 연수 ⓒ 이희진
크기와 맛이 다양한 음료수를 준비했다. 다만 모든 음료는 색지로 감싸 이름을 가려 두었다. 이름을 가려 두고 원하는 음료를 가지고 가라는 짧은 체험은 모순처럼 보였다. 역시나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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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다 가려 놓고 원하는 걸 어떻게 찾아요?"
"그냥 복불복이네요."

선생님들은 어쩔 수 없이 캔 크기나 색지의 색상으로만 음료를 골랐다. 원하는 것을 고르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이 연수는 사실 내 경험에서부터 시작된다.

시력 잃은 뒤 음료수 캔 점자 확인해보니

9년 전, 나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학교에는 휴직을 하고 재활과 일어섬의 시간을 보냈다.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점자 사용과 흰 지팡이 보행법, 소리를 듣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방법을 익혔다. 여섯 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점자를 익히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점자를 찍는 건 자신 있었지만 손끝으로 읽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생각해 보면 다시 교단에 서겠다는 마음 하나로 그 시간을 지나온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산책을 하다 편의점에 들렀다. 오래 걸었던 탓인지 갈증이 났다. 평소 좋아했던 이온 음료를 사려고 냉장고 앞에 섰다. 음료수 캔 하나를 만져 보며 점자를 확인했다. 역시 점자가 찍혀 있어서 안심했지만 곧 멈칫했다. 캔 위에는 '음료' 혹은 '탄산'이라고만 찍혀 있는 게 아닌가? 여러 개의 음료수를 만져 보았지만 다르지 않았다. 어떤 맛인지, 어떤 제품인지 구분할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고르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이동하고, 타인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 그것이 모든 인권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당연했던 일상이 당연하지 않게 된 순간, 그 자리에 가 보니 열리는 세계가 분명 있었다.

나는 이 경험을 이날 교직원 연수에서 나눴다. 선생님들은 캔 위의 점자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통합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원만하고 안전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 특수교사의 역할이기에 내 목소리는 더 또렷하고 분명했다.

"우리가 장애인 차별 금지법을 살피고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끝내 우리 교육이 다정함을 잃지 않는 교육이었으면 좋겠고, 모두 함께 성장하고 고민하며 방법을 찾아가는 교육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비장애인 선생님들은 시각장애가 있는 내가 선생님으로 교단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낯설었을지 모른다. 사실 내 의지 하나만으로는 이렇게 복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장애로 인해 발생된 결손을 보완해 주는 사회 시스템과 업무를 지원하는 보조공학기기 같은 환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지원이 갖추어질 때 충분히 자기 몫을 해 낼 수 있음을 내 걸음이 말해 준다.

다시 교단에 선 이야기, 혼자보다 함께

지난 7일에는 학생들을 만났다. 중학교 3학년 교실에서 장애이해 교육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아이들도 점차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서로의 다름이 얼마나 다양한 색을 만들어내는지, 그 다름이 존중받을 때 어떤 교실이 되는지를 함께 나누었다. 중증 장애를 가지고도 다시 교단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내 이야기가 전해졌다.

"살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일을 만나기도 해요. 그럴 때 혼자 버티기보다 도움을 요청하고, 함께 방법을 찾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방법은 혼자보다 함께일 때 더 잘 보이니까요."

길이 끊어진 것 같은 길 위에서 찾은 희망이 학생들에게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극복 서사를 이야기하는 대신 살면서 마주하는 어려움을 함께 고민하고 방법을 찾았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조금만 주변을 돌아보면 도움을 요청할 좋은 어른과 이웃이 있음을 알려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직접 겪은 이야기라 그런지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장애를 가지고도 자기 몫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나의 업무와 생활을 보완해 주는 보조공학기기를 학생들 앞에서 시연했다. 점자 정보 단말기를 통해 글을 쓰고, 음성 출력 장치를 통해 능숙하게 책을 읽었다. 학생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조용했던 교실이 술렁였다.

근로지원인 제도를 통해 시각장애를 가지고도 다시 교단 앞에 설 수 있었던 이야기가 이어졌다. 장애인 근로지원인 제도는 장애가 있어도 직장 속에서 본인의 역량과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애인고용공단에서 지원하는 제도다.

숨소리조차 고요해진 교실 속에서 학생들이 몰입해서 내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날 교실에서는 성공 스토리나 극복이 아닌 그 모습 그대로 살아낸 삶이 전달되고 있었다. 내 존재 자체가 살아 있는 장애 인식의 장면이 되는 순간이었다.

다름이 자연스러워지는 학교를 바라며

학생들에게 퀴즈를 내고 준비한 상품이 이날의 꽃이었다. 나는 크라운제과에서 나온 롱스 레몬초코 과자 박스를 학생들에게 보였다. 박스 측면에는 점자로 이름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과자 봉지를 뜯어 레몬초콜릿 케이크 위를 살펴보면 동그랗게 박힌 흰 점들이 바로 점자를 디자인한 모양이다. '참 감사'라는 점자 문구가 예쁘게 올려져 있다.

내가 존중받고 싶은 만큼 상대의 인권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다정함의 시작인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품이 든다. 다정함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타인이 느끼는 불편함에 반응하는 구체적인 실천이다. 잠시 걸음을 멈춰 모두가 방법을 찾을 때 비로소 길이 열린다. 거기에 사람다움이 있고, 빛이 있다.

롱스 점자가 새겨진 과자
롱스점자가 새겨진 과자 ⓒ 이희진

과자 박스에 찍힌 점자 하나가 뭐 그리 중요한 일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는 티 안 나는 사소한 변화일지 모른다. 나는 점자가 찍힌 물건을 발견할 때마다 사람다움을 건네받고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 당연하지 않았던 일상이 당연해지는 평범함을 선물 받는 기분이다.

미미한 변화에도 희망이 있다. 타인의 불편함에 우리의 공감이 더해질 때 더디지만 사회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건 아닐까?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는 3학년 10반 김OO입니다."

교육이 끝나면 학생들은 어김없이 시각장애인을 대하는 방법으로 내게 인사를 한다. 학생들의 마음은 스펀지 같아서 진리와 희망을 흡수하는 속도도 이처럼 빠르다. 이 교육을 들은 학생들은 내게 이름을 먼저 말해 주는 인사가 익숙해진다. 다름이 자연스러워지는 학교가 바로 이런 풍경이 아닐까?

작고 사소한 시간과 시절이 쌓이고 쌓여 손톱만 한 싹이 났을 뿐이다. 중증 시각장애인 교사로 복직한 지 벌써 일곱 해가 되었다. 걸어가는 내 걸음이 처음보다 제법 단단해졌다. 느리더라도 작은 존재들이 자라고 자라 울창하고 자연스러운 숲을 이루며 살아가는 꿈을 꿔 본다. 그 희망을 품고 오늘도 뚜벅뚜벅 교정을 걷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장애인의날#다름이자연스러운#극복이아닌#살아낸삶#장애인식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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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주부이자 선생님, 글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 어둠 속에서도 가장 찬란한 빛을 이야기하는 아이러니한 생의 주인공. 다정한 이웃들과 동행하는 반딧불 라이프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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