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그날은 어김없이 돌아옵니다. 하얀 벚꽃이 한바탕 스러지고 애기똥풀이 샛노랗게 피어오르기 시작할 무렵입니다. 봄의 한복판에 단단한 심지처럼 새겨있는 4월 16일. 올해는 12주기입니다. 해마다 늘 맞는 4월 16일이지만, 해마다 별스럽게 의미를 부여합니다.
12주기. 사람으로 따지면 십이간지를 한 번 돈 셈이죠. 이런 인위적인 해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아마도 세월이 많이 지나간 것에 대한 새삼스러운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것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1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도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여전히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일이지만, 1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위에는 여러 다른 애도들이 지층처럼 두껍게 쌓여갔습니다. 이태원 참사, 오송 지하차도 참사, 강남역 참사, 수많은 이주노동자의 죽음... 그리고 최근 대전 공장 화재 참사까지.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버거운 많은 죽음들이 떠오릅니다. 저에게 이제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일을 넘어 '모든 애도의 날'이 되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그 제일 밑바닥에 있는 가장 두껍고 오래된 화석인 셈이죠.
듣기를 통해 기록하기, 기억하기
최근 읽은 한 권의 책이 떠오릅니다. <애도하는 귀>입니다. 제목부터 마음을 끄는 데가 있습니다. 애도하는 마음도 아니고 애도하는 사람도 아니고 '귀'라니요. 귀가 어떻게 애도를 한다는 말일까, 생각하며 이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타자의 자리에서, 타자이기에 행해야 하는 애도의 형태'에 대하여 일곱 명의 예술가와 연구자가 쓴 글들을 모은 책입니다. 세월호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반드시 세월호 참사 자체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예술가들은 확실히 남다른 촉수를 갖고 있지요. 그들은 커다란 슬픔을 기억하는 행위로 '듣기'를 제안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신체적 행위입니다. 그래서 듣기는 '몸'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듣는 몸이 기억하는 몸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물론 몸으로 기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쓰는 행위일 수도 있고, 바닥에 온몸을 엎드리는 삼보일배와 같은 움직임일 수도 있습니다. 보는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듣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기보다는 내 생각을 소리 높여 말하기, 주장 관철하기, 누군가의 의견 반박하기에 그동안 너무 열을 올렸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고, 애도하는데 왜 '듣기'가 중요한 것일까 생각했습니다. 애도 행위는 기억과 기록으로 많이 실천 되고 있죠. 기억은 자꾸 반복해서 들어야 가능한 것이고, 기록 역시 누군가의 말을 '적는 것'이 아니라 잘 듣기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 책에는 '이소골'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무슨 골짜기 이름인가 했습니다. 설명을 보니 이소골이란 "추골, 침골, 등뼈로 이루어진 신체에서 가장 작은 뼈로 고막 뒷편에 연결"(13)되어 있습니다. 고막의 진동이 이 작고 미세한 이소골을 울려야 듣기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소골이 무뎌진 사회, 이소골을 망각한 사회는 애도와 기억 행위는 고사하고, 나와 다른 의견을 비방하고 나아가서 차별과 혐오가 일상이 된 사회라고 할 수 있겠죠.

▲<애도하는 귀> ⓒ 히스테리안출판사
그러나 듣기를 통해 애도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듣는다는 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신체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윤리적인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삶의 자세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은 듣기가 윤리적 차원의 고민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애도를 실패한다. 듣기를 실패한다. 애도와 듣기의 실패로부터 어떻게 실패할 것인가 묻는 질문은 윤리적 차원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윤리 담론, 특히 애도에 관한 윤리적 고려는 자본 담론과 거리가 멀다. 애도는 죽음이라는 종말 앞에서 머물고 헤매고 미끄러지기를 택한다. 잃어버린 대상을 끊임없이 이승으로 불러들인다. 생과 사가 동시에 존재하는 풍경을 모색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존은 상실을 수반한다. 상실을 껴안은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사의 궤적을 그린다."(p.113)
나의 '듣기'가 향하는 곳
이 책은 듣기와 기록, 기억에 대한 예술가들의 섬세하면서도 단단하고 꽤 묵직한 울림을 줍니다. 지금까지 애도의 기록들과는 조금 생소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그토록 많이 오르내리는 '애도'와 '기억하기'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경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희한한 것은 이 책은 분명 문자로 이루어진 책이라는 텍스트임에도 읽다 보면 오디오 기기로 듣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시각이 청각으로 변환되는 신비로운 경험은 덤입니다.
여전히 몇몇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 그만 좀 하라고. 기억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냐고. 남의 슬픔에 공감하는 게 가능한 일이냐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아주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특히 타인의 슬픔에 공감한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쉬운 거짓말인지는 저도 동의합니다. 타인의 슬픔은 온전히 내 슬픔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슬픔이 타인의 슬픔이 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려고, 그 슬픔에 닿아보려고 노력할 뿐이죠.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부터 진정한 애도가 이뤄지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다음 문장들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슬픔을 똑같이 슬퍼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 곁을 서성인다. 내 심장의 파동 속에서 타자의 박동을 듣는다.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p.28)
애도는 늘 어렵습니다. 불편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미숙하고, 방법을 잘 모르기도 합니다. 위로와는 분명 다른 것인데, 자꾸 섣부른 위로를 하려고 합니다. 그냥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듣는 행위는 몸에 새겨지는 행위라서 그 슬픔을 감당하기엔 우린 너무 바쁘고 분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올해의 애도도 실패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생과 사가 동시에 존재하는 풍경'에서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는' 경험을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늘 정신없이 빠르게 지나가는 봄의 한복판. 그럼에도 끊임없이 그 연습을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오늘 내 이소골에 와 닿는 소리는 무엇인지, 나의 듣기는 어느 지점을 향해 열려있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