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청소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그들 곁에 있다. 모르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냥 지나쳤기 때문이다." -(56쪽)
요즘 천변이나 들판에 나가보면 파란 보석 같은 작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봄까치꽃, 땅비단 등 여러 이름을 가진 풀꽃이다. 열이면 아홉은 그냥 지나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무심코 지나친 것이 꽃이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이라면?
<위기의 청소년 마주하기>(2026년 3월 출간)는 이런 저자의 지극한 안타까움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현재 '관악교육복지센터'에서 청소년과 함께하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저자는 위기에 처한 청소년들을 만나러 다닌다. 때로는 학교로, 때로는 집으로. 만남의 시작은 이런 식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알게 된 청소년 산들바람이 있었다. 담임 교사가 학습과 정서 지원이 필요하다고 요청하였다. 산들바람과 담임교사, 그리고 보호자 조부모를 만났다."-(57쪽)
이 책에 등장하는 청소년의 이름은 모두 바람에서 따왔다. 학교는 나무 이름이다.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함이지만, 뿌리 깊은 나무처럼 그 자리에서 청소년을 지키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산들바람은 부모가 생존해 있지만 모친에게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고 그들이 직접 양육하지 않는 점 등을 살폈을 때, 정서적 안정을 주는 관계와 학교 온라인 수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옆에서 살피고 돕는 역할이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조부모의 생각은 달랐다. "영어만 잘 하면 다 해결돼요. 공부만 잘하면 다 해결될 거예요"라는 식이었다.
저자는 정답이 없을 것 같은 까마득한 질문을 여러 날 되뇐다. 그런 와중에 만난 어느 담임 교사의 진심에서 일말의 희망을 보기도 한다.
"연락을 해도 받지 않아요. 학교에는 오지도 않고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진심으로 청소년의 생사와 안전을 걱정하는 교사의 눈빛에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교사에게 건넨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선생님 같은 한 분이 계시면 됩니다."
-(114~115쪽)
이 대목을 읽으면서 현직에 있을 때 내가 만난 아이들이 생각났다. 참 막막했던 기억들이 있다. 특히 가정적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들의 경우 담임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고 한 가닥 끈을 붙잡고 있는 것밖에는. 다행히 학교 밖으로 내쳐지지 않는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다.
"선생님 저를 포기하지 않아주셔서 감사해요."
누군가의 오해, 무언가의 진실

▲책표지 ⓒ 교육공동체벗
저자는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란 제목이 붙은 1장에서 "나 역시 학교와 청소년을 가까이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상당히 왜곡된 판단을 하고 있었다"라고 고백한다. 그런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은 학생들을 피상적으로 만나는 것에 대한 경계다. 교육복지 현장에서 수없이 많은 청소년들을 만나며 양육자, 교사, 지역사회에게 그가 요청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 뿐이다.
"청소년의 목소리를 듣는 것. 청소년에게 묻고, 듣고, 그에 맞게 응해야 한다. 그러면 사건이 터지기 전에 예방할 수 있다."-(49쪽)
저자는 "청소년을 어떻게 지원할까?"라는 물음은 결국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라는 물음과 같다"고 말한다. 관계가 끊어져도 다시 이어질 수 있는 사회, 고립된 한 청소년을 발견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손을 내밀 수 있는 사회, 목소리를 잃은 청소년에게 "너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제는 아직도 이런 작은 실천이 개인의 헌신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사의 전화, 복지사의 기다림, 마을 어른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이 제도의 빈틈을 메우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개인의 열정만으로 유지할 수는 없다.
이런 사회 전반의 구조적 변화에 함께 학교의 변화를 요구하는 저자의 목소리 또한 간절하다. 저자는 "단언컨대 공교육의 역할과 기능이 달라져야 한다"고 외친다. "학교는 입시를 위해 집중하는 곳이 아니라 청소년의 삶이 전반적으로 균형과 전인적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돕는 곳이 되어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학교가 그러한 공간이 된다면 교사의 역할도 달라질 것이다. 교사는 단지 학습을 위해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청소년보다 앞서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들을 돕는 삶의 역할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복지 어떻게 계속해요? 너무 힘들지 않아요?"
지역복지센터에서 일하다가 다른 영역으로 이직한 분이 던진 이 물음에 저자는 "누구보다 교육복지를 잘 알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했지만, '왜 아직도 거기에 있어?'라고 묻는 것 같았다"고 했다. 순간 아득해졌다고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청소년과 교육복지에 애정을 가졌던 사람들이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런 현실을 이해하면서도 마냥 동의할 수는 없었다. "핵심은 관점의 차이였다"라는 구절에서 독자인 내 눈이 번쩍 떠졌다. 그의 대안은 무엇일까? 그는 '연대'라는 두 글자를 소환하는데, 거기에 '경험'이란 단어가 덧붙여졌다.
"함께해야 할 곳의 여러 사람들을 설득했던 날들을 떠올려 보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151쪽)
그 한 예로 장마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마파람' 학생 이야기가 소개된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앞에서 무수히 소개한 실패담(이 책에는 성공담보다는 실패담이 훨씬 더 많다)과 별로 다를 게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좀 더 읽어보니 1학년이었던 마파람이 5학년이 되어 있다. 5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마파람은 13살이 되었지만 치료로 1년이 유급되어 5학년에 재학 중이다. 대체로 빠짐없이 등교하고 있으며, 계절과 신체 성장과 관계없이 입던 두꺼운 외투를 벗었다. 지속적인 심리 상담을 받고 있으며 안정적인 정서 상태를 보이고 있다.
자녀의 치료를 반대해 온 양육자의 태도도 달라졌다. 자격증도 취득해 취업하여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 학교도 변했다. 마파람이 등교해도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자, 교실 밖에서라도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학생의 선택을 존중하여 원하는 위치에 책상과 의자를 놓아주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교장, 교감, 교사의 구성이 달라졌고 그에 따른 영향도 없지 않았지만, 경험을 통해 설득된 가치는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 학교를 통해 배웠다."-(155쪽)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3장에서 소개된 '높새바람'을 다시 떠올린다. 늦은 밤에 비상 연락을 받고 출동한 횟수도 여러 번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겨우겨우 조금씩 성장하던 청소년이었다. 그러다가 도저히 가정 안에서의 돌봄이 이루어지지 않아 2년 남짓 높새바람과 단절이 된다. 어느 날 열일곱 살이 된 청소년 높새바람에게 연락이 왔다.
"선생님은 무엇이든 요청하면 항상 도와주셨던 기억이 났어요."
감동이란 말은 이럴 때 써야 하는 말이다. 높새바람을 담당했던 우리 활동가는 8년째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고된 현장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켜준 활동가들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들어 주었던 사회복지사 한 사람을 기억해준 청소년에게 고마웠다."-(172쪽)
나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위기의 청소년 마주하기>는 이 사회 구성원인 우리 모두의 당면한 문제다. '우리'가 바뀌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