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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AW2026 특집] 섭식장애와 돌봄의 정치
섭식장애는 개인의 의지 부족이나 미적 기준의 영향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감정, 신체, 관계, 사회 구조, 의료 체계, 기술 환경이 서로 깊게 얽힌 정치적·물질적·제도적 현상입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의 논의는 오랫동안 개인 책임, 가족 문제, 혹은 의학적 진단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섭식장애와 돌봄의 정치>는 이러한 협소한 틀을 넘어, 세계 각지의 연구자·활동가·정책 전문가·당사자 연구자들이 경험과 지식으로 구축해온 더 넓은 정치적 지평을 한국어로 소개하는 인터뷰 시리즈입니다.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현장에서 일하지만 섭식장애를 이해하고 돌봄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법, 젠더, 노동, 디지털 기술, 불평등, 거버넌스, 당사자 경험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합니다.

이 시리즈는 그들의 목소리를 가능한 한 충실하게 번역해 전하며, 한국의 독자 — 특히 당사자, 활동가, 정책 입안자, 연구자 — 가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다른 길을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 기획·글: 박지니 (작가, 잠수함토끼콜렉티브 활동가)

2024년, 이듬해 개최될 섭식장애 인식주간의 '일본 세션'을 준비하며 사회학자 야마다 리에, 미야시타 아코와 논의하던 중 나는 아코가 공유해준 '당사자 서사' 논문의 서론을 읽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해당 논문에 따르면 일본 내에서도 섭식장애를 둘러싼 다양한 의학적 해석이 난립해 왔으나, 이에 대응하여 2012년에는 이미 치료 가이드라인이 제정되었다. 또한 2010년부터 공적 치료기관 설립을 위한 체계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그 결실로 2014년 국립정신·신경의료연구센터 내에 '섭식장애 전국 지원센터'(https://edcenter.ncnp.go.jp/)가 설치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일본은 이미 10년 전부터 섭식장애 치료와 지원을 국가적 과제로 설정하고 전략센터와 지역 인프라를 구축하기 시작한 셈이다. 국내에서 섭식장애 최고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조차 이러한 흐름을 거의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두 번째 충격이었다.

EDAW2025 '일본 세션' 현장. 섭식장애를 연구하는 두 명의 사회학자 야마다 리에, 미야시타 아코, 그리고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커뮤니티를 설립·운영하는 스즈키 코코로, 야자키 치아키("차린코")가 발표자로 참여했다. 특히 야마다 리에는 일본에 섭식장애 치료 및 연구 인프라가 구축된 역사를 짧게 소개했다. 해당 세션의 녹화 영상은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zwxfJBsK0k&t=676s
EDAW2025 '일본 세션' 현장.섭식장애를 연구하는 두 명의 사회학자 야마다 리에, 미야시타 아코, 그리고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커뮤니티를 설립·운영하는 스즈키 코코로, 야자키 치아키("차린코")가 발표자로 참여했다. 특히 야마다 리에는 일본에 섭식장애 치료 및 연구 인프라가 구축된 역사를 짧게 소개했다. 해당 세션의 녹화 영상은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zwxfJBsK0k&t=676s ⓒ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심료내과가 축적한 섭식장애 임상·연구 인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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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목해야 할 지점은 2014년이 결코 갑작스러운 출발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본의 국가적 대응은 전략센터 설치와 함께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이미 '심료내과(心療内科)'라는, 즉 '심리치료를 병행하는 내과'라는 일본 특유의 전문 영역이 섭식장애 진료와 연구를 오랜 세월 축적해온 배경이 있었다. 일본 내 거식증 연구와 치료는 정신의학뿐 아니라 내과 및 내분비학의 흐름 속에서도 병행되었고, 심료내과는 이를 바탕으로 섭식장애를 심신 양면에서 포괄적으로 다루는 임상 현장으로 자리 잡았다. 훗날 일본섭식장애학회 형성과 국가 치료체계 구축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들 대다수가 이 계보와 맞닿아 있었다. 결국 국가 전략센터와 지역 거점병원은 새로운 제도의 창조라기보다, 이미 형성되어 있던 심료내과 중심의 임상·연구 기반이 뒤늦게 공적 체계로 조직화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치바현의 고노다이의료센터(https://kohnodai.jihs.go.jp/sessyoku/)는 이러한 흐름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이 병원은 과거부터 섭식장애 입원치료와 다학제적 협력을 수행해온 유서 깊은 심료내과 시설이었으며, 2017년 치바현 섭식장애 지원 거점병원으로 지정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거점병원"이라는 제도가 특정 유명 병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환자와 가족 상담, 지역 의료기관 연계, 교육 및 행정기관과의 협업, 전문직 연수, 대중 계몽 활동이 유기적으로 엮인 '지역 허브'로 설계되었다. 치바현의 경우 간호사나 공인심리사 자격을 갖춘 코디네이터가 상담의 주축을 담당하며, 협의회에는 의료진뿐 아니라 가족회, 당사자, 교육청, 정신보건복지센터, 행정 담당자가 공동으로 참여한다. 섭식장애를 특정 진료과의 기술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통찰이 제도 설계 자체에 반영된 셈이다.

치바현 거점병원은 어떻게 시민과 만나는가. 치바현 섭식장애 지원 거점병원인 고노다이의료센터에서 만든 2026년 공개강좌 포스터. 지역 주민이면 누구나 사전등록 없이 참여할 수 있으며, 전체 강좌는 특정한 발표자료 없이 즉석 질의응답으로 진행된다. 이렇게 진행한 2025년도 공개강좌에서 추린 질의응답 내용이 심료내과 진료과장 가와이 게이스케의 감수를 거친 총 34개 항목으로 정리되어 PDF로 공개돼 있다. * PDF 링크: https://kohnodai.jihs.go.jp/sessyoku/060/kouza_qa_202502_3.pdf
치바현 거점병원은 어떻게 시민과 만나는가.치바현 섭식장애 지원 거점병원인 고노다이의료센터에서 만든 2026년 공개강좌 포스터. 지역 주민이면 누구나 사전등록 없이 참여할 수 있으며, 전체 강좌는 특정한 발표자료 없이 즉석 질의응답으로 진행된다. 이렇게 진행한 2025년도 공개강좌에서 추린 질의응답 내용이 심료내과 진료과장 가와이 게이스케의 감수를 거친 총 34개 항목으로 정리되어 PDF로 공개돼 있다. * PDF 링크: https://kohnodai.jihs.go.jp/sessyoku/060/kouza_qa_202502_3.pdf ⓒ 치바현 섭식장애 지원 거점병원



병원 하나가 아니라 지역 허브를 만든다는 것

실제로 고노다이의료센터의 보고서를 살펴보면, 상담 후 자병원으로 연결된 비율은 2017년 94%에서 시작해 2018년 52%, 2019년 35%, 2020년 34%, 2021년 19%로 점차 낮아졌으며, 2024년에도 40.6%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수치상으로는 병원의 영향력이 축적되는 듯 보이지 않으나, 실질적으로는 정반대의 성과를 의미한다. 이는 협력 가능한 지역 의료기관이 확충되고, 거점병원이 환자를 독점하기보다 지역 네트워크를 활성화하는 진정한 허브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공공 인프라는 마땅히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해야 한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일본의 국가 연구 사업도 추진력을 얻었다. 고노다이의료센터 심료내과의 가와이 게이스케는 2021년부터 2023년까지 후생노동성 지원 연구에 참여하며 신경성 식욕부진증에 대한 CBT-E(강화 인지행동치료)와 MANTRA(성인 거식증을 위한 모즐리 모델)의 효과 검증, 신체치료 및 소아기 섭식장애 치료 매뉴얼 개발, 그리고 다직종 통합 연수를 포괄하는 성과를 냈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가이드라인"이 단순한 문서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치료 효과의 검증부터 인력 양성, 보급 체계까지 맞물린 국가적 사업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연구 설계 단계부터 평가 지표를 BMI와 같은 단순 수치에 가두지 않았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연구진은 치료 종료 후의 장기적인 추적 평가와 심리사회적 지표를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이는 섭식장애가 단순한 체중 증가만으로는 회복을 단언할 수 없는 복합적 질환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치바현 거점병원의 섭식장애 다학제 전문가 연수 포스터. 고노다이병원 심료내과가 2017년 연 섭식장애 연수 포스터. 병동과 외래, 섭식장애 교실을 직접 보며 배우는 프로그램으로, 일본의 섭식장애 치료가 오랜 기간 다직종 협력과 임상 현장 훈련을 통해 축적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치바현 거점병원의 섭식장애 다학제 전문가 연수 포스터.고노다이병원 심료내과가 2017년 연 섭식장애 연수 포스터. 병동과 외래, 섭식장애 교실을 직접 보며 배우는 프로그램으로, 일본의 섭식장애 치료가 오랜 기간 다직종 협력과 임상 현장 훈련을 통해 축적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 치바현 섭식장애 지원 거점병원

가이드라인을 공공 자산으로 만드는 조건

내가 치바현의 사례에 특히 주목하게 된 계기는 2025년 공개강좌 질의응답 자료를 접하면서였다. 해당 자료에는 "부모가 먼저 지쳐 함께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가족 케어의 철학, 과도한 운동을 단순한 '제멋대로인 행동'이 아닌 공황과 강박의 문제로 통찰하는 시각, 그리고 학교 복귀 후의 재발을 '완치 여부'가 아닌 관해와 장기적 대처의 관점으로 설명하는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는 오랜 임상 경험과 다학제적 협력, 그리고 고도의 윤리적 민감성이 축적되지 않고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깊이다. 반면 한국의 실태는 어떠한가. 섭식장애 전문성을 표방하는 곳들조차 극단적 사례의 자극적 묘사, 가족에 대한 가부장적 연민, 혹은 특정 병원의 권위를 강조하는 홍보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구체적인 치료와 돌봄, 장기적 지원 체계, 그리고 가족이 직면하는 실제적 고통에 대응하는 언어는 여전히 빈약한 실정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그 같은 언어를 가능케 할 임상·연구 인프라 자체가 부재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표준 치료"를 논할 때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단순히 가이드라인 문서의 존재 여부가 아니다. 그 문서가 어떤 근거와 윤리적 책임 아래, 누구와 함께 만들어졌는지를 물어야 한다. 체계적인 연구와 훈련 시스템이 존재하는가? 지역의 환자와 가족이 실제로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되어 있는가? 학교와 1차 의료, 응급의료, 그리고 전문 치료기관을 잇는 실질적인 경로가 확보되어 있는가? 특정 기관의 권한 강화를 넘어 지역 전체의 대응 역량을 상향시키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이드라인은 신뢰할 만한 공공 자산이 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외양만 번듯한 행정 문서에 그치게 된다. 장기적 치료와 복합적 지원, 높은 윤리적 민감성이 요구되는 섭식장애 영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과제는 이미 증명된 치료의 과학을 실질적인 돌봄 체계와 실행 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공적 토대의 마련이다. 일본, 특히 치바현의 사례는 이 자명한 진실을 다시금 일깨운다.


*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블로그에는 아래와 같은 참고 자료가 추가로 실려 있다.

일본 섭식장애 연구의 역사적 기원과 전개 과정: https://rabbitsubmarinecol.weebly.com/home/april-13th-2026 치바현 섭식장애 지원 거점병원 관련 자료: https://rabbitsubmarinecol.weebly.com/home/1906490
스에마츠 히로유키 박사 인터뷰: https://rabbitsubmarinecol.weebly.com/home/8204815
요시우치 가즈히로 박사 인터뷰: https://rabbitsubmarinecol.weebly.com/home/5100821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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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식장애와 돌봄의 정치

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로 구성된 비영리임의단체로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을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이름은 '(섭식장애) 환자는 결핍된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위기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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