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가족 모두의 자리를 새롭게 정의해 주고 세상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가족 모두의 자리를 새롭게 정의해 주고 세상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 이안수

미소를 담은 눈빛과 한 마디의 인사만으로 마음의 문이 열리는 모습을 매일 경험한다.

호스텔에서 배낭을 메고 들어오는 막 도착한 여행자에게 "어서 오세요. 잘 오셨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를 건네는 것으로 그가 어느 나라에서 온 누구이든 간에 이미 서로 간의 경계는 허물어져 버린다. 떠나는 여행자에게 "잘 가요! 몸조심해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것만으로도 무거운 배낭을 멘 상태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어떤 청년 여행자는 눈시울까지 붉혔다.

우리가 낯선 도시에 발을 내딛는 순간, 밀려오는 막막함. 버스터미널에서 한동안 멈추어 서서 도시의 공기를 심호흡한다. 그리고 스치는 사람들의 마음의 온도를 가늠한다. 그 순간 누군가가 "뭐 도와줄 거 있어요?"라고 하면 막막함이 친근함으로 바뀐다. 도시를 떠날 때 그 도시의 기억은 경험과 감정으로만 남게 된다. 이웃은 옆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을 건네는 사람임을 외국 생활이 길어질수록 더욱 절감한다.

이수의 탄생

AD
2026년 3월 20일 이후 아내의 눈과 마음이 가장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곳이 가족 단톡방이다. 아내의 가장 큰 낙이 그날에 태어난 손녀, 이수의 사진과 매일매일의 성장을 살피는 일이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그 어떤 것도 손자를 안아보고픈 간절함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매일 이렇게라도 함께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우는 게 장난 아니에요. 단전부터 끓어올림."

울음소리 하나하나에도 갖가지 해석을 동원한다.

"나리도 그랬음. 첫째는 예민한가 봐. 엄마가 화장실도 못 가고 업고 갔음. 동네 트럭 행상 오면 스피커 소리에 바로 깸."

그럼 아내가 바로 해설을 덧붙인다.

"3일차 눈뜸. 이수는 보조개가 있네."

3일차 아이가 우는 표정에서 보조개를 발견하고 그 발견에 대견해하는 아빠의 흐뭇함에 나도 절도 동화된다.

손녀가 보여주는 변화를 통해 아내는 세 아이 임신과 출산의 모든 순간들과 모유 수유의 어려움과 시기별 울음소리 크기까지 기억해 내고 있다. 그 육아기에 남편의 역할이 부재했음이 매일 도마 위에 올라 나는 비판에 직면한다. 그럼에도 나 역시 매일 신비로운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듯이 몰두하면서 새삼 한 생명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경이로운 여정을 새롭게 학습하고 있다.

"속눈썹은 아직 사진으로는 잘 안 보이네."
"사진에선 안 보임, 눈을 약하게 뜨면 보임."

"근데 코가 왜 이렇게 오뚝하지? 영대 코이긴 한데... 귀는 누굴 닮은 건가?"
"귀는 아무도 안 닮고 이쁘게 나온 듯..."

"모유 수유 젖몸살 때문에 다시 고통이 시작됨. 수유도 아기와 팀워크가 잘 되어야 되는데 수유 때마다 세 명이서 사투임. 첫 유축하고 초유 50ml 다 먹음."
"정말 엄마가 되는 길은 고통의 길이네. 효정(며느리 이름)이 존경한다."

결혼할 생각이 없는 손위 시누에게도 이수의 출생은 신비 그 자체이다. '존경'을 고백하는 올케에 대한 응원이 끝나자마자 다시 경험을 더한 시어머니의 며느리 칭찬이 이어진다.

"일주일은 넘게 고생해야 한다. 나도 모유는 그냥 나오는 줄 알았지. 그렇게 힘든 줄은 아이를 낳아보고야 알았다. 수술 후라 힘들 텐데 그래도 먹일 수 있어 다행이다. 힘든 것을 못 참고 우유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진중하고 참을성 있고 사랑 많은 아이로 키우려면 엄마의 인내가 동반되어야 한다. 세상엔 인내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말은 육아에서 더욱 그렇다. 효정이가 잘 참고 이수를 잘 이끌고 있구나. 대단하다! 효정이."

"6일차 이수. 오늘 병원 퇴원하고 바로 옆 조리원으로 넘어왔어요. 이제 자유롭게 이수를 볼 수 있음. 아직 이수를 알아보지 못함. 아까 신생아실에 이수가 자리에 없길래 옷 갈아입히고 있는 아기가 이수인 줄 알고 이쁘다 쳐다보고 있었는데 다른 이름 자리로 감. 저 아기가 이수 맞는 것 같은데? 했더니 안에서 '이수 아빠! 이수 저쪽에서 기저귀 갈고 있어요' 해서 너무 민망. 아기들이 어느 정도 다 비슷해서 난 옷 갈아입는 쪽에 다른 아기가 이수인 줄 알고 흐뭇하게 보고 있었음 ㅋㅋㅋ"

다시 아내가 나를 등장시켰다.

"아빠는 지금도 너희들 아기 때 사진, 나리와 주리를 구별 못함."

진짜 가족은 이웃

출산 후 조리원에서 2주를 보낸 이수가 집으로 갔다. 이수 부모는 조리원 퇴소 전부터 이수의 울음소리가 큰 것을 걱정했다. 아내는 '갓난 아기 우는소리는 이즘 TV에서도 듣기 어려운 선물 같은 소리라 이웃들도 좋아할 것'이라고 아들 내외를 안심시켰다.

내게는 아내의 말이 정서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조밀한 도시 공동체의 삶에서 배려가 부족한 말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 말을 반박하지 않은 것은 아들 내외가 문제를 인식하고 있으므로 적절한 조치를 할 것이라 믿었다.

총 8가구 작은 빌라에서 아기를 키우는 일은 이웃들에게 소음을 유발한다. 그러나 아이는 울면서 커야 한다며 오히려 초보 부모를 응원하기 위해 아래층 부부께서 과일을 들고 찾아오셨다.
총 8가구 작은 빌라에서 아기를 키우는 일은이웃들에게 소음을 유발한다. 그러나 아이는 울면서 커야 한다며 오히려 초보 부모를 응원하기 위해 아래층 부부께서 과일을 들고 찾아오셨다. ⓒ 이안수

이수가 세상에 온 지 스물두 번째 날, 마침내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목욕 시간을 잘못 맞춰 배고픈 채로 물에 들어간 이수가 처음부터 끝까지 온 힘을 다해 울었고 그 소리가 빌라 벽을 타고 위층과 아래층 일곱 가구의 모든 집으로 고스란히 전해진 것 같다고 했다.

목욕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고 이수 아빠가 우려가 현실이 된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자 바로 아래층 내외분이 그곳에 계셨단다. 하지만 아들의 전갈은 예상과는 달랐다.

"과일을 전해 주셨어요. 아기 우는 소리 듣고 너무 반갑다고요. 우는 아기 달래느라 힘들테니 과일 먹고 힘내라고 하셨어요. 아기는 원래 열심히 울면서 크는 거라고 걱정 안 해도 되니 실컷 울려서 키우라면서 응원해 주고 가셨습니다. 안 그래도 오늘 떡집에 빌라 이웃분들께 돌리려고 떡을 주문해놨는데 떡보다 과일이 먼저 받고 말았습니다."

내 짐작이 틀린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아내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진정, 이웃이 이런 것이지. 아이 우는 소리가 사라지는 시대에 그분 말씀대로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 동네가 아이를 키울 만하다는 건강성의 상징이지. 고맙구나. 멀리 있는 우리가 가족이 아니라 이웃이 가족이다. 늘 이웃분들께 허리는 숙이고 말은 살갑게 하거라."

아들은 관리비 1만 원으로 무슨 일 있으면 다 같이 도와서 건물 보수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좋은 빌라에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고 했고 며느리는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모든 이웃분들이 뛰쳐나와서 도와주실 것 같아서 안심이라고 했다.

우리 부부는 '예정된 순례 기간을 채우기 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애초의 작심을 흩트리지 않기 위해 아들 내외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우리를 비로소 할머니, 할아버지로 만들어준 손녀의 탄생에도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진한 마음을 이웃이 대신해 주고 있는 셈이다. '진짜 가족은 이웃'이라는 아내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나도 아들 내외에게 훈수 하나를 더했다.

[관련 기사 : 도난은 일상, 아들 결혼식에도 못 간 은퇴 부부]

"주문한 떡이 왔느냐? 떡만 돌리지 말고 엽서 한 장씩 준비하거라. 서로를 잘 알면 더 깊은 정이 생긴다. 이수가 언제 태어났고 이수 부모는 어떤 사람이고 이수가 부모에게 인생에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에 대해서 짧은 글을 엽서에 담아 함께 전하면 그분들도 복도 혹은 골목에서 너희를 만날 때마다 그들 자신에 대해 말을 할 거야. 그럼 정말 가족이 되는 거지.

서로를 더 많이 알수록 더 살가운 가족으로 바뀔 거야. 우리도 이곳에서 그렇게 가족이 된다. 더 많이 묻고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서로가 가족 같은 느낌이 생겨나더구나. 서양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싫어할 것 같지? 아니야, 내가 만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질문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해. 그 질문이 자신에 대한 사랑의 일종으로 느끼더군. 그렇게 우리는 길 위에서 여행자의 가족이 된다."

낯선 여행자끼리의 작은 관심과 배려는 서로를 이웃 혹은 가족의 친밀함을 느끼게 한다. 키가 2m 되는 벨기에 브뤼셀 시청의 소통관으로 일하는 40대의 트레킹 마니아는 아내를 '한국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낯선 여행자끼리의 작은 관심과 배려는서로를 이웃 혹은 가족의 친밀함을 느끼게 한다. 키가 2m 되는 벨기에 브뤼셀 시청의 소통관으로 일하는 40대의 트레킹 마니아는 아내를 '한국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 이안수

한국 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더해져 아내는 더욱 열심히 호스텔 사람들의 식사를 챙긴다. 그중 하나가 벨기에 브뤼셀 시청 소통관으로 일하는 40대의 트레킹 마니아다. 그는 2년간의 안식년을 얻어 중남미 여러 산을 트레킹 하기 위해 왔다.

그가 오악사카 북쪽 산맥 시에라 노르테(Sierra Norte)로 4박 5일간의 트레킹을 떠나기 전날 아내는 직접 준비한 디너로 환송하고, 돌아온 날 또 다른 디너로 그의 안전한 귀환을 축하했다. 그가 다른 도시로 떠나면서 말했다.

"당신은 나의 한국 어머니예요."

아내는 서울의 아들딸들을 챙기는 대신 나라 밖에서 그렇게 얻은 아들이 여럿이다. 여행자들이 서로가 서로의 필요에 응하면서 늘 하는 말이 있다.

"받은 은혜는 'Pay it back(받은 은혜를 당사자에게 돌려주는 것)'대신 'Pay it forward(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하는 것이야."

하지만 오악사카 한 호스텔의 옥상에서 태평양 쪽을 향해 외쳐본다. "선진빌라 이웃분들! 감사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모티프원의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


#출산#층간소음#이웃#아기울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삶의 다양한 풍경에 관심있는 여행자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