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회의장, 개헌추진 위해 6개 정당 원내대표 회동우원식 국회의장이 초당적 개헌추진을 위해 지난달 19일 국회의장실에서 원내 6개 정당 원내대표들과 회동하고 있다. 왼쪽부터 용혜인 기본소득당 원내대표, 윤종오 진보당 원내대표, 한병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우원식 국회의장, 서왕진 조국혁신당 원내대표, 천하람 개혁신당 원내대표, 한창민 사회민주당 원내대표. 우 의장이 제안한 국회 개헌특위 구성에 반대한 국민의힘은 이날 회동에 불참했다. ⓒ 공동취재사진
많은 국민이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헌법상의 문화국가입니다. 일반적으로 문화국가란 표현을 하면 문화적인 국가, 혹은 문화적 영향력이 강한 국가라는 의미를 갖지만 "헌법상 문화국가"란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헌법상 문화국가란 의미는 국가의 정체성과 기본적 운영 원리를 규정하는, 모든 법 제도의 기반에 해당하는 헌법에서 문화에 대한 국가의 역할과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국이 명시적인 헌법상 문화국가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군사 반란으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인 1980년 제5공화국 시절부터입니다. 당시 개정 헌법 제8조에서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하며, '문화국가'의 원리를 헌법적 의무로 규정했습니다. 이는 현행 헌법 제9조로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로 계승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22조 제2항인 "저작자·발명가·과학 기술자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로 조금 더 보완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한국이 제헌헌법 시절부터도 사실상 헌법상 문화국가란 주장도 존재합니다. 문화국가나 문화 진흥이란 표현을 직접 쓰진 않았지만, 정부가 문화 영역인 예술과 학술, 교육에 대한 책무를 갖고 있음이 헌법에 명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제헌헌법 제12조인 학문과 예술의 자유는 "학술과 예술의 자유는 이를 보장한다. 저작자·발명가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인데 이는 사실상 현행 헌법 제22조의 모태이며, 국가가 간섭하지 않는 '자유로운 문화 환경' 조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제13조 교육의 기회균등에서도 "모든 국민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조항으로 문화를 향유하고 성장시킬 기초 체력인 '교육'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헌법상 문화국가란 정부가 국가와 국민의 문화 전반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 헌법상에 명시적으로 규정된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부가 국가의 문화진흥과 국민의 문화 향유에 대하여 책임지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미국부터 아닙니다. 헌법에 창작의 자유는 명시하고 있지만 문화에 대한 국가의 의무 조항이 없습니다. 문화는 국가가 개입할 영역이 아니라 민간의 자율과 시장원리에 맡겨야 한다는 강한 자유주의 전통 때문입니다.
성문 헌법이 없는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도 표현의 자유와 국민의 문화적 권리에 대한 내용은 있지만 문화 진흥에 대한 내용은 빠져있습니다. 과거 군국주의 시절의 국가 주도 문화정책에 대한 역작용 때문입니다. 프랑스도 헌법 전문에 문화와 교육에 대한 평등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정도로 매우 느슨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반면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중국 등은 문화국가의 원리를 헌법에 담고 있습니다. 특히 독일은 헌법상 문화국가란 개념을 처음 만들었던 나라입니다. 문화국가로 번역되는 개념어인 Kulturstaat 자체가 실은 독일에서 시작된 말입니다. 19세기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학자인 로렌츠 폰 슈타인(Lorenz von Stein) 등이 '국가가 단순히 치안만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정신적·문화적 발전도 책임져야 한다'는 취지로 처음 쓰기 시작했고, 제1차 세계대전 후 제정된 바이마르 헌법(1919년)은 예술과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가가 이를 보호·육성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아 현대적 의미의 문화국가 원리를 처음으로 헌법에 담았습니다.
물론 이후 문화를 국가가 극도로 통제했던 나치 시절을 보낸 이후 현대 독일 기본법(1949년)에는 그 시절 '문화 통제'에 대한 반성으로, 국가가 문화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조력'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수정되긴 했습니다. 그래서 문화에 대한 국가의 중립성(어떤 문화가 우월한지 국가가 판단하지 않음)과 다양성 보존(다양한 문화가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국가의 기본 책무)을 주되게 담고 있습니다. 한국 헌법의 문화국가의 원리 역시 바이마르 헌법의 영향 하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얼핏 좋아보이기만 하는 헌법상 문화국가의 원리가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실제 많은 주요 국가들이 문화국가의 원리를 명시적으로 택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한데요. 문화국가의 원리를 비판하는 입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정부에 의한 문화의 통치 도구화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나치 시절의 독일이고 한국에서도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 시절에 매우 노골적으로 이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둘째, 자칫하면 문화가 기본으로 가져야 하는 자율성이 침해된다는 것입니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팔거리 원칙이 실제로는 지켜지기 매우 어려우며 정부의 공공 재원이 지원금으로 투입되는 순간부터 "어느 쪽을 지원할 것인가"라는 선택이 발생하고 이것이 자칫 지원금을 통한 통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입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의 "블랙리스트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이지요.
셋째, 국가가 전통문화와 같은 특정 영역을 명시화하는 순간부터 문화의 유기체적 다양성이 고려되지 않고 박제화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급격히 변화하는 다양한 문화가 아닌 엘리트들의 고급문화나 국가가 공인한 정통성만이 인정받게 되는 문제가 존재할 수 있지요. 즉 문화국가의 원리가 악용되면 정부가 문화의 최종심판자가 되거나 군림하는 기획자가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존재합니다.
물론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문화국가의 원리가 한국에서는 과거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다름 아니라 1948년의 대한민국은 국권을 상실했다가 되찾은 신생 국민국가(Nation-state)였으니까요. 단순히 예술진흥이나 국민의 문화 향유 문제를 떠나서 국민적 일체감을 형성해야 했고, 식민 잔재를 청산하며 주체성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또한 대한민국의 문화적 독자성을 부각하는 것이 주권 국가로서의 대외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막 현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단계에서 헌법상 문화국가를 강조하는 것은 선택이라기보다 필연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제 한국은 소프트파워에서 세계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문화적으로 고도로 성장한 국가입니다. 헌법상 문화국가의 원리를 폐기할 필요는 없지만, 현재 시점에 맞게 수정할 필요는 있습니다. 더 이상 국가에 의한 문화 통제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진흥" 개념은 폐기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대체할 가치는 무엇일까요? 상당한 토론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참고할 지점은 1949년 이후 독일의 법체계에서 새롭게 수정된 문화국가의 원리입니다. 국가를 문화 진흥의 주체에서 조력자로 그 위치를 변화시키면서 중립성과 다양성에 힘을 실었습니다. 여기 한국에서 한 가지를 더 추가하자면 문화적 접근성의 평등, 바꿔 말하면 국민 문화권 보장이라고 봅니다. 헌법상 문화국가의 원리에 대한 수정과 보완은 한국 공공 문화정책의 진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앞으로 진행될 개헌 논의가 단지 정치 제도 개편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매우 고답적인 문화국가 원리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굿모낭 충청에도 실립니다. 글쓴이는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