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연을 마친 '세상을 품은 마을' 단원들지난 4일, 양천중앙도서관에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낭독 공연이 펼쳐졌다. ⓒ 양성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소용없어요."
다섯 살 소년 제제의 가냘픈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흐르자, 꽉 들어찬 객석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화려한 조명도, 현란한 무대 장치도 없었다. 오직 배우들의 '목소리'와 관객들의 '상상력'이 만난 70분. 지난 4일 오후, 서울 양천중앙도서관 대강당은 깊은 감동과 여운이 교차하는 거대한 울림통이었다.
양천구의 독서예술활동 동아리 '세상을 품은 마을'(단장 원은실)이 정기공연으로 올린 낭독극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현장을 찾았다.
"가장 반가운 관객은 내가 돌보는 아이였다"
이번 공연은 단순한 책 읽기가 아니었다. 단원들은 지난해 12월, 작품 선정 이후 3개월간 매주 월요일마다 모여 같은 문장을 수없이 읽고 또 읽었다. 여섯 살 아이 제제의 목소리를 세밀하게 가다듬고, 각자의 배역에 맞춰 '말하듯 연기하는 법'을 익히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특히 이번 무대에는 전설적인 성우 황일청 배우가 특별 출연해 품격을 더했다. <날아라 손오공>의 손오공, <뽀빠이> 등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거장의 목소리는 단원들의 열정과 어우러져 관객들을 1960년대 브라질의 어느 마을로 순식간에 이동시켰다.
극 중 악보 파는 상인 '아리오 발드' 역을 맡아 열연한 전종만 단원은 공연 직후 벅찬 소회를 전했다. 그는 무대 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객석에 앉은 한 특별한 손님을 꼽았다.
"공연 직전까지 관객이 적을까 봐 걱정했는데, 대학교 친구들과 동료들이 와주어 안심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장애인 활동지원사로 함께하고 있는 아이와 그 부모님이 맑은 모습으로 들어올 때 정말 큰 힘이 솟더군요. 연습할 땐 때로 지루하기도 했지만, 막상 무대에 서니 대사 하나하나가 제 가슴에 또렷하게 박히는 기분이었습니다."
전 단원은 공연의 성취감과 함께 마을 예술의 현실적인 고민도 덧붙였다.
"매년 공연을 이어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있던 일부 지원마저 올해부터 중단되어 아쉬움이 커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자력으로라도 이어가고 싶지만, 이런 마을 공동체 극단에 작은 지원이라도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문턱 낮은 예술, 마을을 다시 품다
공연은 말썽꾸러기 제제의 순수함, 라임 오렌지 나무 '밍기뉴'와 대화, 그리고 아빠보다 더 사랑했던 '뽀르투카'의 죽음으로 이어지며 절정에 달했다. 70분간 열연이 끝나자 객석에서는 한동안 깊은 정적이 흐르다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고, 관객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남은 묵직한 여운을 음미하는 모습이었다.
'세상을 품은 마을'은 2018년부터 <한여름 밤의 꿈> <아버지> <우리 읍내> 등 매년 꾸준히 작품을 무대에 올리며 마을 공동체의 문화적 토양을 다져왔다. 지원 중단이라는 현실적인 벽 앞에서도 이들이 목소리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예술이 주는 위로가 이웃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이웃의 목소리로 치유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시간. 제제가 그랬던 것처럼, 양천구 주민들도 오늘 이 공연을 통해 마음속에 각자의 '라임 오렌지 나무' 한 그루씩을 심고 돌아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본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세상을 품은 마을'은 희곡읽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모인 독서예술활동 동아리입니다. 연1회 주민초청 낭독공연을 개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