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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8일 이란의 초등학교가 폭격을 당해 최소 165명의 어린이와 교직원이 숨졌다. 2023년 10월 이후 2년여 동안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공격으로 2만 명 가까운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세계 곳곳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억울한 죽음들이 이어지고 있다. 마땅한 이유 없이 닥쳐온 죽음은 남아 있는 이들에게 각기 다른 모양과 깊이의 생채기를 남긴다. 그 상처를 감당하지 못해 무너지는 이도 있고, 이를 견디며 살아가는 이도 있다.
4·3 당시 많은 남성들이 폭도로 지목돼 희생됐고,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이 살아남았다. 그들은 남은 가족을 돌보고 생계를 이어가야 했으며, 조상들까지 챙겨야 했다.
김현숙 역시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들이 모두 4·3으로 사망하고 어머니와 남동생들만 남게 되면서, 조상과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왔다.

▲4.3 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4.3의 공식적 이름을 붙이지 못해서 백비로 남아있다. ⓒ 김순애
가족을 찾아 떠돌다 도령마루에서 총살당한 아버지
현숙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 이후, 마치 구천을 떠도는 듯 산과 읍내를 오갔다. 친척들은 토벌대를 피해 산으로 올라갔지만, 읍내에 남은 가족들을 두고 혼자 피신할 수는 없었다. 그는 제주 읍내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가족을 찾기 위해 애썼다. 오라리 처가를 찾았지만 부인과 아이들은 그곳에 없었다.
해가 바뀌고 1월 어느 날, 동광양 기와공장에 주둔하던 군인들이 도남리 마을을 급습해 불태운 뒤 주민들을 마을 공회당에 집결시켰다. 군인들은 주민 20여 명을 트럭에 태워 제주경찰서로 연행했는데, 그중 한 명이 현숙의 아버지였다. 이호리 주민 5명도 함께 연행됐으며, 이들은 제주경찰서에 5일가량 구금된 뒤 현재 제주공항에서 약 1.5km 떨어진 도령마루에서 집단 총살당했다.
"그 때 백개 사람이 무장대를 밀고하면 살려준다고 경찰들이 협박하니까 아버지를 지목했다고 들었어. 아버지가 총살당한 곳은 예전에는 네모나고 길쭉한 밭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차 다니는 길로 변해버렸어. 어릴 때 그 길을 많이 다녔어. 어머니가 나를 업고 오라리 외갓집을 오갈 때 그 길로 걸어 다녀야 했거든. 그때는 붉은 흙밭이었는데 지금은 시커먼 아스팔트길이 되어 버렸어."
아버지가 도령마루에서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가족은 약 2년이 지난 뒤 시신을 수습했다. 시신이 심하게 훼손돼 관을 마련하지 못하고 칠성판에 뼈를 수습해 무덤을 만들었다.
현숙의 삼촌들
가족과 이웃들이 희생되는 가운데 현숙의 가족은 마을을 떠나 있었지만, 4·3으로 인한 피해는 컸다. 할머니와 아버지, 둘째 삼촌이 처형됐고, 셋째 삼촌도 헌병대에 끌려갔다. 오도롱에 남아 있던 가족들은 화를 피해 모두 산으로 올라갔다.
삼촌은 칠성로 입구에 있는 헌병대에 잡혀 있었고, 현숙 가족이 머물던 곳과 멀지 않았다. 현숙은 어머니 심부름으로 음식을 들고 삼촌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면서 더 이상 찾아갈 수 없게 됐다. 삼촌은 1949년 군법회의에서 형을 선고받고 10월 2일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서 총살당했다.
"우리 대규 삼촌이 살아있었으면 도지사는 해먹었을 거야. 보통 머리가 아니었어. 유머도 좋고 리더십도 있어서 사람을 끌어 모으는 능력이 있었어. 돌아가신 나이가 스물 하난데 너무 아까워."
1948~1949년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249명은 1949년 10월 정뜨르비행장에서 비밀리에 처형됐다. 또한 제주읍·애월면·조천면 등 북부지역에서 예비검속된 300여 명이 1950년 8월 19~20일 이틀 동안 같은 장소에서 집단 학살돼 암매장됐다.
이 사건과 관련해 2007년부터 세 차례 발굴이 진행돼 388구의 유해가 수습됐다. 그러나 신원이 확인돼 가족에게 돌아간 경우는 30%에 불과하다. 이후 추가 발굴에서도 손이 뒤로 묶인 채 겹겹이 쌓인 유해들이 발견됐다. 하지만 현숙의 삼촌 유해는 아직 가족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4.3당시 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한 오도롱의 지금 풍경. ⓒ 김순애
4·3 당시 열일곱 살이었던 현숙의 막내 삼촌 역시 산에서 소식이 끊겼다. 1949년 봄, 많은 주민이 하산을 결정했지만 젊은 남성들은 내려가면 죽을 것이라 판단해 산에 남았다.
현숙은 삼촌이 산에서 숨졌을 것으로 여겼지만, 최근 4·3 희생자 신고 과정에서 최종 행적지가 광주형무소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현숙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던 삼촌을 오빠처럼 여기며 따랐다.
"작은아버지는 내가 열일곱 살 때 돌아가셨어. 나보다 여섯 살 정도 많았지. 어릴 때 내가 할머니 집에 가서 밥을 먹으면 지저분하다고 놀리면서 나무랬어. 그러면 할머니는 또 작은 아버지를 혼내곤 했지. '이 강산 낙하 유수'로 시작하는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나. 투박한 제주 남자와는 조금 달랐어."
살아남은 현숙의 가족들은 삼촌들과 할머니 제사를 한 날 함께 지낸다. 그 날은 명절상 못지않게 많은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4.3 이후
현숙의 가족은 4·3 이후에도 오도롱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곧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주에는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1950년 7월 16일 1만여 명이 들어왔고, 1951년 초 1·4 후퇴 이후 수만 명이 제주로 들어왔다.
1951년 5월 20일에는 피난민 수가 14만 8000여 명에 달해 제주 인구의 절반을 넘었다. 4·3으로 많은 것이 무너져 버렸고 원래 살던 사람들도 빈곤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식량, 집, 학교 모든 것들이 부족했다. 육지에서 내려온 피난민들과 집이 불타버린 이재민들 사이에 식량을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북새통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국민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현숙은 집안 형편상 정규 중학교에 입학할 수 없어 송죽야간공민학교에 들어갔다.
"제주도에 피난 온 사람들이 세운 학교인데 그 사람들이 이북에서 온 교회 사람들이라. 지금 서울 숭의여고 재단이 그 학교 설립자야. 처음에는 북국민학교 빌려서 야간에만 못 배운 학생들한테 중학 과정을 가르쳤어. 난 오도롱에서 빈 손으로 오니까 가난해났고 중학교 다니려면 입학금이니 뭐니 돈 내야 하니까 송죽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지."
가끔 오도롱에 들릴 때 현숙은 할아버지 같은 동네 어른들에게 '호병밭에 약국 손지우다'하고 인사를 했다.
"하나같이 어른들이 '아이고 너네 할머니 할아버지 마음이 좋아서 너네 잘된다, 너네 잘된다' 말하는 거라. 그 말 들으면 난 어머니한테 와서 '그 하루방이 우리 잘된다 잘된다' 하는데 우리가 뭐가 잘됐수광? 언제 잘됩니까' 말해났주."
현숙은 죽학교 졸업 후 보건소, 부산의 군기지 피복창, 세화약방, 식당 등 다양한 일을 했다.
"평생 삶이 바쁘고 뭐를 하든 내가 안 움직이면 자식들이 굶을 상황이었어. 내가 이리 발딱 저리 발딱하며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데만 신경 썼지 사회나 다른 일에는 눈 뜰 여유가 없이 살았지."
돈이 될 일을 어떻게든 찾아다니면서도 자식들에게 반찬 없는 밥상을 한 번도 내어놓지 않았다는 점이 지금 현숙이 자신의 삶에 대해 느끼는 긍지다.
친정과 시댁 양쪽 집안일을 돌보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던 현숙은 남동생들을 제대로 교육시켜 성공시키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겼다. 4·3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가족들의 삶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현숙은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학교 선생님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내가 해야 할 몫이 커버리난 솔직히 그 많은 재산 다 바쳐가멍 친정 오래비 하나 잘되게 만들려고 내 한 몸 다 희생했주. 집에 신경 쓸 일이 좀 어서시민 늙엉이라도 공부에도 좀 집중하고 생활에 조금 여유가 이서시민 유족회도 나강 앞장성 활동해실 건디 이 날 이 때까지 경을 못했어."
재작년부터 4.3 보상금이 지급되고 있지만 그 것이 남은 가족들의 그간의 아픔과 고생을 살피지는 못하고 있다고 현숙은 생각한다.
"내가 멸족당한 집에서 우리 남동생 하나 잘 되기를 바라고 친정 벌초도 칠대 조까지 내가 7년이나 사람 빌멍 다 했는데 이제 막내 조카가 그걸 맡아서 해야 돼. 친정 쪽 할머니 할아버지 공동묘지도 내가 여기 저기 뛰어다니멍 다 정리하니까 시집에서는 나보고 친정 일만 한다고 뭐라고도 했지. 보상금이 나와도 이제까지 귀신들 넷 다섯 몬딱 벌초하고 제사하고 하는 놈한테 그 공을 인정하지 않아. 무조건 상속법에 따라 나누니까."
그간의 긴 시간의 품어온 상처와 고통을 순식간에 삭제시켜버리는 보상금은 오히려 사람들을 더 서운하게 할 때가 있다. 보상금이 지급되면서 4.3 색깔론, 정명 등 우리 사회가 풀어야할 많은 문제가 일부 묻힌 감도 있다. 더 많은 연구와 담론을 통해 4.3에 올바른 이름을 새기는 것을 시작으로 국가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에 벌어지는 폭력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주투데이에도 실립니다. 필자는 제주녹색당 운영위원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