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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적부터 차(茶)를 좋아했다. 20대 중반 차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하면서, 육대다류(녹차·백차·황차·청차·홍차·흑차)로 분류되는 각종 차를 종류불문 즐기고 있다.
나처럼 차를 즐기는 차인(茶人)들은 집이나 사무실에서 혼자 차를 즐기기도 하지만, 여러 사람들과 '차회(茶會)'라는 것을 열어 함께 마시기도 한다. 요즘 서울의 찻집들에선 2030 세대를 겨냥한 차회 혹은 직장인 차회, 새벽 묵언 차회, 명상 및 요가와 함께 하는 차회 등 여러 컨셉으로 다양한 차회가 열리고 있다.
나도 학생 시절에는 차회에 가끔 참석하긴 했으나, 지금은 '차세권'과는 거리가 먼 지역에서 근무하는 터라, 차회에 참석하는 게 맘처럼 쉽지는 않다. 사실 차회 자체를 썩 즐기는 편도 아니다. 얼굴도 모르는 낯선 이들과 함께 차를 마시는 게 어색하기도 하고, 차를 마실 때만큼은 조용히 명상을 하며 몸과 마음에 온전한 휴식을 부여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집에 각종 차도구들을 마련해놓고 홀로 차를 즐기고 있다.

▲퇴근 후 집에서 홀로 즐기는 찻자리 ⓒ 김경준
홀로 즐긴다고는 하지만, 사실 나의 찻자리에는 가끔씩 특별한 손님들이 함께 하고 있다. 바로 독립운동가들이다.
독립운동가들도 일상에서 즐긴 차(茶)
중국은 차(茶)의 원조국이다. 중국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차를 물처럼 마신다. 대륙으로 망명했던 독립운동가들 역시 차를 일상에서 가까이 했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자 한국광복군 참모장 등을 역임했던 철기 이범석 장군 역시 생전에 '중국차 마시기'를 취미로 꼽은 바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에게도 차는 중요한 기호품이었다.
4월 5일 : 업무시 담배 및 차값(辦公時煙茶費) (지출액: 400.00)
4월 15일 : 차호(茶壺) 1개, 차배(茶杯) 4개 (지출액: 880.00)
대한민국 27년 (1945) 4월 1일 立 임시의정원 현금출납부(臨時議政院 現金出納簿) 中
임시의정원의 회계장부라고 할 수 있는 현금출납부를 보면 일상 업무시 마시는 차와 차를 우리기 위한 도구(차호, 찻잔 등)들을 구입한 내역이 확인된다. 임시정부는 인근 차실(지금의 카페)에서 한국광복군 성립을 기념하기 위한 차회를 열기도 했다. 차는 독립운동가들이 갈증 해소를 위해 일상에서 즐긴 음료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와 소통하기 위한 임시정부의 외교 수단이기도 했던 셈이다.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최근에는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서 임시정부의 역사를 공부하며 함께 차를 마시는 차회를 공식 프로그램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 사진. 테이블마다 찻잔이 놓여있다. ⓒ 독립기념관
나 역시 차인이면서도 동시에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는 역사학도로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사함을 일상에서 기억하기 위해, 때때로 찻자리에 독립운동가들을 초대하고 있다. 무슨 대단한 의식을 치르는 게 아니다. 그저 차를 마시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하고 나의 하루를 반성해보는 것이다.
차회에 초대되는 독립운동가들은 그때 그때 다르다. 올해는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50주년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기념해이기도 하다. 이를 축하하는 뜻에서 올초에는 김구 선생의 영전에 차를 올렸다.
김구 선생께 올린 차는 국내의 한 보이차 전문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부지년산차(不知年散茶)'라는 이름의 보이차였다. '부지년(不知年)'이라는 이름은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한 연도를 알기 어려운 노차(老茶)에 붙이는 이름이라 한다. 나는 '세월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차'로 해석했다. 부지년산차를 올린 까닭은, 김구 선생이 바랐던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대한민국'이라는 꿈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후손들에게 기억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다.

▲2026년 1월 '백범 김구 탄생 150주년' 유네스코 기념해 지정을 축하하며 김구 선생께 '부지년산차'를 올리다. ⓒ 김경준
며칠 전(3월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 116주기를 맞아서는 안 의사를 생각하며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를 올렸다. 백운옥판차는 전남 강진에서 재배되는 우리나라 고유의 녹차다. 다산 정약용에게서 차 만드는 법을 배웠던 이시헌의 후손 이한영(1868~1956)이 일제강점기에 우리 고유의 상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창안한 브랜드다.
당시 백운옥판차의 포장지 뒷면에는 한반도가 꽃 문양으로 그려져 있고, 꽃 문양 옆에 '백운일지 강남춘신(白雲一枝 江南春信: 백운동 한가닥 나뭇가지에 날아든 강남의 봄소식)'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대를 이어 백운옥판차를 생산하고 있는 이한영차문화원 측은 "해방의 소식을 기다리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안 의사의 영전에 백운옥판차를 올린 까닭을 알겠나. 언젠가 중국 땅에 묻힌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발굴되어 고국으로 봉환된다는, 봄처럼 따뜻한 소식이 들려오기를 염원해본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올리는 차(茶) 한 잔 ⓒ 김경준
'광복군 보이차', '임시정부 녹차'는 어떨까
언젠가 신촌의 한 중국 찻집에 갔을 때 2018년 남북정상회담 기념으로 출시한 보이차가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 문득 '독립운동가들을 기념하는 보이차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어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제안하고 싶다. 누군가 뜻 있는 차상(茶商)이 나서서 이런 차들을 한 번 만들어보면 어떨까. 광복군 대원들이 활동했던 쿤밍(昆明)에서 생산한 보이차에는 '광복군 보이차'를, 임시정부가 활동했던 충칭 지역의 녹차에는 '임시정부 녹차'라는 상표를 붙여 출시해보는 것이다.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을 테지만, 독립운동가들이 독립투쟁을 하며 갈증을 달래기 위해 마셨던 그때 그 차맛을 함께 음미하며, 그들의 삶을 기억할 수 있는 차회가 열린다면 더욱 의미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