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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의 은퇴이몽’은 퇴직 4년차로서 은퇴 전후의 현실을 기록합니다. 숫자만이 아니라 몸, 관계, 생활기술, 돌봄, 역할의 전환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 봅니다.
퇴직을 앞두고 나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다가구주택의 임대소득, 그리고 정년 뒤에도 이어갈 강의 일까지 묶은 나만의 '4층 소득' 설계가 어느 정도 완성됐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만 2층 몫이던 퇴직연금이 두 자녀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정년 후 1년 만에 사실상 사라졌다.

그래도 1층 국민연금과 3층 월세, 4층 강의 소득이 남아 있으니 버틸 수 있으리라 여겼다. 숫자로 그려본 노후의 설계도는 여전히 제법 견고해 보였다. 하지만 정년 이후의 삶은 내가 그려놓은 도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계산이 틀렸던 것은 아니다. 다만 계산표 바깥의 일들이 너무 많았다.

계산표 바깥의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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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설계는 대개 손에 잡히는 것들로 시작된다. 연금 개시 시점, 월평균 생활비, 예상 지출, 자산의 흐름 같은 것들이다. 나 역시 그렇게 준비했다. 그런데 살아보니 삶은 그런 항목만으로 굴러가지 않았다. 4층이라 믿었던 구조는 퇴직연금이 빠지면서 이미 3층이 되었고, 이제는 그 3층마저 흔들리고 있다.

노후의 중요한 축이라고 여겼던 다가구주택이 가로주택정비사업이라는 예상 밖의 변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월세는 아직 들어오고 있지만, 이주와 철거 가능성이 현실화되면서 앞으로 1~2년 안에 그 소득도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이 점점 커지고 있다.

소득 변화 예측(ai 이미지) 4층소득에서 2층소득으로
소득 변화 예측(ai 이미지)4층소득에서 2층소득으로 ⓒ 이종범

강의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쌓아온 경험과 전문성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이어질 것이라 믿었지만, 시장의 흐름은 내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강의 일정표에 빈칸이 늘어날수록 줄어드는 것은 수입만이 아니었다. 내 역할과 존재감까지 함께 흔들리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바깥의 변수도 삶을 흔든다. 요즘 중동 전쟁만 봐도 그렇다. 국제유가와 환율, 물가가 함께 출렁인다. 멀리서 벌어진 일 같아도 그 여파는 기름값과 생활비, 체감 물가를 타고 내 노후 계획까지 흔든다. 공들여 짜놓은 계산표가 한순간에 낡은 숫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충격은 내 의지로 막을 수 없고, 한번 시작되면 생각보다 오래 간다. 여기에 자녀의 일이나 부모 돌봄 같은 가족 변수들까지 예고 없이 끼어든다.

살아보니 퇴직 설계가 현실과 어긋나는 첫 번째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계속 그대로일 것'이라 여긴 채 계산하지만, 실제 삶은 단 한순간도 고정된 값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정년 후 4년은 돈의 문제만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겁게 다가온 것은 역할의 변화였다. 회사에 다닐 때는 하루의 뼈대를 조직이 세워주었다. 몇 시에 무엇을 먼저 처리해야 하는지,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퇴직과 함께 그 구조가 사라지자, 비어 있을 줄 알았던 시간 속으로 전혀 다른 일들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안일, 가족의 부탁, 병원 일정, 관공서 업무, 이런저런 생활의 잔무가 하루의 중심이 되었다. 퇴직 전에는 틈틈이 처리하던 일들인데, 퇴직 후에는 오히려 그런 일들이 삶의 주연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는데도 정작 "오늘 나는 무엇을 해낸 것인가" 싶을 때가 있다. 몸은 분명 바빴는데, 내 일은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것 같은 허탈감이 드는 날이 많아졌다.

흔히 퇴직하면 시간이 많아진다고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분명 늘어난다. 그러나 시간이 많아졌다고 하루가 저절로 굴러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다. 스스로 시간의 질서를 세우지 않으면 시간은 제멋대로 흩어졌다.

강의가 없는 날이면 카페로 나가 글을 쓰고 교안을 정리하며 나름의 생활 리듬을 붙잡아보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또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시간을 쓰는 주체가 나 혼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내의 부탁도 있고, 미뤄둔 일처리도 있고, 집안의 자잘한 문제들도 있다.

그런 일들이 내 시간을 잘게 잘라먹는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정작 나를 키우는 일, 내 전문성을 이어가는 일, 내 삶의 중심을 붙드는 일은 뒤로 밀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퇴직 후의 시간은 남는 자원이 아니라, 다시 세워야 할 질서에 더 가까웠다.

건강도 마찬가지다. 퇴직 설계표에서는 대개 병원비나 보험료 같은 항목으로 정리되지만, 실제 삶에서 건강은 그렇게 한 줄로 끝나지 않는다. 몸이 예전 같지 않으면 의료비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일할 수 있는 힘이 줄고,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좁아진다.

사람을 만나는 횟수도 줄고, 집안에서 맡을 수 있는 몫도 달라진다. 여기에 우리 집처럼 연로한 부모와 노견 두 마리를 돌보는 일까지 겹치면 건강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계 전체의 운영 문제가 된다. 그래서 노후의 건강은 지출 항목이라기보다 일상을 지탱하는 바탕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다시 삶을 조정해보려는 태도

특히 우리 세대는 이런 점에서 더 취약한지도 모른다. 오롯이 나의 노후만을 위해 자원을 배분하며 살아온 세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를 모시고 자녀를 챙기며, 내 몫의 시간과 돈을 가족이라는 현실 안에서 끊임없이 나누어 써왔다. 그러니 퇴직 설계도 역시 늘 가족의 사정과 함께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노후 설계도가 흔들리는 것이 꼭 이상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에 더 가까운 것 아닌가 싶다. 그래서 요즘 나는 퇴직 설계를 완성된 청사진으로 보기보다, 계속 고쳐 써야 하는 운영표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퇴직은 연금과 자산 규모만 들여다본다고 끝나는 일도 아니었다. 내 시간이 어디에서 새고 있는지, 가정 안에서 내 몫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건강과 가족 문제가 하루의 흐름을 어떻게 흔드는지까지 함께 봐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

다시 말하면 퇴직 설계도가 현실과 어긋나는 것은 준비가 부족해서라기보다, 삶 자체가 애초에 설계했던 도면대로만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후를 버티게 하는 힘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밀려와도 다시 삶을 조정해보려는 태도에 있다고 본다. 흔들리는 와중에도 자기 리듬을 지키는 힘, 그리고 내가 아직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감각을 붙드는 일이 내게는 더 절실한 현실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의 축약본은 한국보험신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퇴직준비#노후설계#베이비부머#은퇴후삶#설계와현실의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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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이후 40년을 ‘어떻게 버틸까’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살아볼까’라고 묻는 사람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듣고, 설명하고, 함께 고민해 온 이야기를 강의와 글로 천천히 풀어냅니다. 거창한 비법보다, 같이 버틸 수 있는 ‘노후해법’을 독자들과 함께 찾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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