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이 1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입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31일 이재명 정부가 '경제 전시 상황'을 선포하며 26조 2000억 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을 공개했다. 지난 2월 중동전쟁 발발 이후 불과 19일 만이다. 전쟁과 고유가, 경기침체라는 위기감과 민생 살리기에 집중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됐다는 평가다.
지난 27일 오전 세종시 정부청사 브리핑실에 들어선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의 표정은 담담해 보였다. 임명된 지 단 사흘 만에 마이크 앞에 선 그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과 기쁨보다는 경제 전시 상황에 대한 엄중한 인식 아래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앞선다"라고 입을 뗐다.
박 장관은 현 상황을 "벼랑 끝에 선 사람은 잠깐 부는 바람에도 휘청이듯이 고유가·고물가라는 거센 바람이 우리 국민의 삶을 흔들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전쟁 발발 19일 만에 추경안을 짜낸 '속도전'의 배경이다. 정부는 이번 추경의 구호를 '위기를 기회로'로 정했다. 단순한 현금 살포가 아니라, 전쟁이 불러온 에너지 위기를 체질 개선의 기회로 삼겠다는 이재명 정부의 재정 운용 철학이 담겼다.
나랏빚 안 늘리는 추경 26.2조 원… '고유가 피해지원금'으로 3256만 명에 최대 60만 원
이번 추경의 핵심은 26조 원이 넘는 돈을 편성하면서 나랏빚(국채 발행)을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번 추경을 통해 국채 1조 원을 상환한다. 재원은 반도체 호황과 증시 활황으로 걷힌 초과세수 25조 2000억 원에서 나왔다. 박 장관은 "증세 없는 복지나 재정 건전성을 해치는 지출이 아니라, 경제 성장의 과실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오히려 51.6%에서 50.6%로 줄어든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전쟁에 따른 기름값 대응에 10조 1000억 원이 들어간다. 특히 소득 하위 70% 이하 국민 3577만 명에게 '고유가 피해지원금'을 준다. 1인당 10만 원에서 최대 60만 원까지 차등 지급되는데, 주목할 점은 지역 우대다. 수도권 지역은 10만 원~55만원까지, 비수도권은 15만 원~60만 원까지 받는다. 수도권보다 에너지 비용 부담이 큰 지방 거주자에게 더 지원하도록 설계됐다. 박 장관은 "수도권보다 대중교통 인프라가 부족하고 이동 거리가 먼 지방 국민의 고통이 더 크다"라고 강조했다. 대중교통비 환급제인 K-패스 역시 저소득층 환급률을 83%까지 대폭 끌어올려 사실상 무상 대중교통에 가까운 혜택을 제공한다.

▲2026년 추가경정예산 수혜자별 주요 지원 내용 ⓒ 기획예산처
민생 안정에 2조 8000억 원이 투입된다. 상징적인 정책으로 '그냥드림센터'가 전국 150개에서 300개로 확대된다. 경제적 위기를 겪는 가구에 긴급 복지와 돌봄 서비스가 추가로 제공된다. 전세사기 피해자의 주거 안정에도 279억 원이 배정됐다. 피해 보증금의 3분의 1을 보장한다. 소상공인을 위한 긴급 경영안정자금도 추가로 2000억 원 지원하고, 석유화학 등 어려움을 겪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고용유지 지원금도 늘린다.
또 청년 창업과 일자리 지원에 1조 9000억 원이 들어간다. 유망 창업가 선발과 창업을 위한 프로젝트에 4000억 원을 투입하고, 지역의 과학기술원을 중심으로 과학중심 창업도시 조성에 3000억 원이 조성된다. 대기업과 함께 청년의 취업을 지원하는 K-뉴딜 아카데미에 1000억 원이 신설됐다. 국민취업지원제도 대상도 구직 경험 없는 청년까지 늘린다. 3만 명이 추가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고물가 부담을 줄이기 위해 농축산물 할인에 800억 원이 배정됐고, 영화와 공연, 숙박할인 등 지원에도 586억 원이 들어간다.
전쟁이라는 위기를 기회로… 재생에너지로의 대전환 기점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이 3월 27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중앙동에서 열린 '2026년 추가경정예산안 상세 브리핑'에서 주요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오승철 산업통상부 기획조정실장, 이형일 재정경제부 제1차관,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 임기근 기획예산처 차관, 김민재 행정안전부 차관
ⓒ 기획예산처
이밖에 이재명 정부는 이번 중동 전쟁을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는 대전환의 기점으로 삼았다. 추경안에는 수출 기업의 비용 절감과 함께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 지원에 1조 1000억 원을 배정했다. 특히 '햇빛소득마을' 확산을 위해 4000억 원 규모의 금융 지원이 포함됐다. 아파트 베란다에 소규모 태양광 설치에도 250억 원이 책정됐다. 약 10만 가구 분량이다. 박 장관은 "에너지 안보가 곧 국가 안보인 시대"라며 "AI 분산형 전력망 조성 물량을 50% 확대해 신재생에너지가 막힘없이 흐르는 에너지 고속도로를 조기에 구축하겠다"라고 밝혔다.
정부는 이번 추경과 함께 2027년 예산안 편성지침도 확정했다. 내년(2027년) 예산은 이재명 정부가 예산 편성 전 과정을 온전히 주관하는 첫 예산이다. 박 장관은 이를 "진정한 국민주권예산의 구현"이라고 명명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재량지출 15%, 의무지출 10%라는 파격적인 구조조정 목표를 제시했다. 불필요한 곳에 새는 돈을 막아 민생과 미래 먹거리에 '올인'하겠다는 선언이다. 특히 지방 우대 원칙을 명문화하고, 예비타당성 조사 제도 개선을 통해 지역 거점 사업의 속도를 높이겠다는 계획도 포함됐다.
이번 추경안은 이재명 정부에 양날의 검이다. 26조 원의 재정을 국채 없이 조달했다는 점은 재무적 유능함을 보여주지만, 결국 국민이 얼마나 느끼냐다. 이재명 대통령은 31일 국무회의에서 정부 추경안을 의결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다음 달 10일 국회에서 추경안을 처리하기로 했다. 박 장관은 "벼랑 끝 민생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라며 초당적 협조를 당부했다.
전쟁 위기 속에서 이재명 정부가 쏘아 올린 26조 원의 추경안이 국민의 일상을 회복하고, 에너지 대전환 등 경제의 구조적 체질을 바꿀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이 3월 27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중앙동에서 열린 '2026년 추가경정예산안 상세 브리핑'에서 주요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 기획예산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