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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실 불광사 법당. 국내 최초 도심 포교당 불광사는 2013년 11월 창사 31주년을 맞아 초대형 법당을 준공했다.
잠실 불광사 법당. 국내 최초 도심 포교당 불광사는 2013년 11월 창사 31주년을 맞아 초대형 법당을 준공했다. ⓒ 불광법회

서울 잠실에 위치한 불광사와 불광법회 사이의 갈등이 수년째 이어지고 있다. 법문 중단과 법당 폐쇄, 물리적 충돌과 다수의 민·형사 소송까지 이어진 이 분쟁은 단일 사찰 내부에서 승려와 신도단체가 장기간 공개적·법적 충돌을 이어온 사례로는 매우 드물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갈등은 2018년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반복적인 법정 공방과 현장 충돌로 이어져 왔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박홍우 KCL 고문변호사에게 질문지를 보냈다. 당시 수신자 직함은 '신도회장'으로 표기돼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첫 답은 직함에 대한 수정 요청이었다. "신도회장이 아니라 법회장입니다." 이 정정 요청은 단순한 호칭 문제가 아니었다. 왜 '신도회장'이 아니라 '법회장'이어야 하는지, 그 설명을 따라가면 불광사와 불광법회 갈등의 성격이 드러난다. 불광법회는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그 차이가 왜 갈등으로 이어졌는가.

3월 12일 KCL 사무실, 3월 15일 불광법회 사무실에서 그와 인터뷰했다.

"신도회장이 아니라 법회장" 갈등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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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지를 보냈을 때 가장 먼저 "신도회장이 아니라 법회장"이라고 정정하셨습니다. 일반 독자는 차이를 모를 것 같습니다. 왜 이 표현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사측(寺側)에서는 재판에서 불광법회를 불광사 신도 일부로 구성된 신도단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불광법회는 1975년 10월 16일 창립된 이후 스님과 재가자로 함께 조직된 단체입니다. 1981년 회칙에도 임원에 법주와 회장단이 같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법원도 불광법회를 스님과 신도로 조직된 단체인데 신도들의 역할이 큰 조직으로 봤습니다. 그러니까 신도회장이 아니라 법회장이라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이 대목에서 '사측'이라는 표현은 이미 갈등의 구도를 드러낸다.

실제로 불광에서는 부처님 오신날 법회에서도 주지가 아니라 법회장이 봉축사를 맡는 등, 법회의 주관자가 법회장이라는 점이 확인된다.

"불광법회가 먼저, 사찰은 나중에 만들어졌다"

- 불광법회와 불광사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출발점부터 짚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불광법회와 불광사는 어떤 관계에서 시작됐습니까.

"1970년대 광덕 스님께서 종로 대각사 법당을 빌려 매주 목요일 저녁 법회를 했습니다. 당시 한국 불교에서는 정기적으로 법문을 듣는 구조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 시도 자체가 새로운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빌려 쓰는 공간에는 한계가 있었고, 법회가 점점 커지면서 우리만의 도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단순히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이 공동체를 지속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기반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1978년 6월 29일 불광법당 봉납 발원대회를 열고 도량 건립을 공식화했습니다. 이후 1981년 잠실 석촌동 땅을 매입했고, 재단법인 대각회에 낸 사찰설립승인신청서 창건 유래에도 '불광법회를 설립하고 그 중앙 도량으로 불광사를 창건한다'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즉, 불광사는 처음부터 사찰이 중심이 아니라, 불광법회라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도량이었습니다."

 생전의 광덕스님.
생전의 광덕스님. ⓒ 불광법회

광덕 스님(1927~1999)은 한국 불교의 도심 포교를 본격화한 인물로 평가된다. 1974년 서울 종로 대각사에서 '불교의 현대화·대중화·생활화'를 내세워 불광회를 창립했고, 정기 법회와 함께 월간 <불광> 발간, 대학생 불교 조직, 경전 한글화, 찬불가 보급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른바 '불광 운동'은 산중 중심의 기존 불교에서 벗어나, 도심에서 정기 법회를 중심으로 불교를 실천하는 흐름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불광법회가 이후 잠실 석촌동에 건립한 불광사는 이러한 도심 포교와 공동체 중심 법회의 구조를 구현한 공간이었다.

"사찰 중심이 아니라 공동체 중심"… 구조의 전도

- 말씀을 들으면 불광법회가 먼저 형성되고, 그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사찰이 만들어졌다는 구조로 이해됩니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찰에는 신도회가 있고 신도회장이 있습니다. 사찰이 중심이고 신도 조직은 그 주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불광은 정반대였지요. 불광법회가 먼저 있었고, 그 활동을 위해 중앙 도량으로 불광사를 창건한 겁니다. 불광법회가 불광사를 창건한 것이지, 불광사가 불광법회를 낳은 게 아닙니다."

- 법회장님의 개인 이력과 불광법회와의 관계도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광덕 스님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으셨습니까.

"1973년 봄 어느 사찰 수련에서 처음 광덕 스님을 만났습니다. 당시에는 단순한 인연이었지만, 그 만남이 제 삶 전체를 바꾸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 인연이 이어져 서울대 총불교학생회에서 법사로 모시고 자주 법문을 들었습니다. 당시 학생들에게는 체계적으로 불교를 배울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광덕 스님의 법문은 기존과는 다른 방식이었고,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바꿔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1974년 부산 범어사 수련대회에서는 광덕 스님이 수계를 집전하시면서 현진(玄震)이라는 새 법명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단순한 지도자를 넘어 제 불교 인생의 스승으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이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법조인의 길을 걸었지만, 불광법회와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법문을 통해 형성된 그 공동체 속에서의 경험이 계속 이어졌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제 삶의 중요한 기반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부대중 평등 공동체라는 원칙

- 말씀을 들으면 불광법회는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일정한 원리를 가진 공동체로 보입니다. 그 공동체를 규정하는 핵심 원칙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가치입니다. '내 생명은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지요. 둘째는 조직입니다. '사부대중의 평등한 수행 공동체'입니다. 사부대중은 남승, 여승, 남신도, 여신도를 말합니다.

1981년 회칙과 1995년 회칙을 보면 법주 아래에 회장과 부회장이 있고, 옆에 지도위원이 있습니다. 지도위원은 스님, 회장·부회장은 재가자입니다. 회칙 8조에도 임원은 사부대중 가운데 법주가 임명하되 지도위원은 비구로 임명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불광법회는 단순한 신도 조직이 아닙니다. 스님과 재가자가 함께 조직된 단체입니다."

 연화부 거사들이 목탁을 치며 혜담 스님과 함께 영가 기도의식을 집전하고 있다. 재가자가 의례를 주도하는 모습은 일반 사찰과 다른 불광법회의 특징을 보여준다.
연화부 거사들이 목탁을 치며 혜담 스님과 함께 영가 기도의식을 집전하고 있다. 재가자가 의례를 주도하는 모습은 일반 사찰과 다른 불광법회의 특징을 보여준다. ⓒ 불광법회

재가자가 주도하는 기도, 돈 없이도 가능한 신행

- '사부대중 평등'이라는 원칙은 실제 운영에서 어떻게 구현됩니까.

"광덕 스님은 법상에 오를 때마다 '형제 여러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신도 여러분'이라는 말을 쓰신 적이 없습니다. 승가와 재가를 위계적으로 나누지 않으셨던 겁니다. 이 원칙은 의례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일반 사찰은 스님이 기도와 제사를 주도하지만, 불광법회에서는 연화부라는 재가자 조직이 망자를 위한 기도를 주도하고 스님은 함께하는 구조입니다."

- 재정 운영도 일반 사찰과는 다른가요?

"예. 그렇습니다. 일반 사찰은 행사마다 일정한 금액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그런 정가를 두지 않습니다. 천 원을 내든, 만 원을 내든, 못 내더라도 신청하면 다 받습니다. 연등이나 기도, 제사도 마찬가지로 참여를 금액으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돈이 기준이 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광덕 스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 놓으셨습니다."

- 지금까지 말씀하신 구조와 운영 방식은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광덕 스님과 불광법회는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광덕 스님은 원래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한국대학(현재의 서경대학)에 다니던 시절 박종홍 교수의 소개로 부산 범어사의 동산 스님을 찾아가셨고, 그렇게 출가를 하신 겁니다.

1962년 조계종 종헌종법 제정에 참여했고, 1971년에는 조계종 총무부장, 총무원장 직무대행까지 맡았습니다. 이후 종단 행정을 정리하고 포교 활동에 집중하게 됩니다.

먼저 1974년 9월 1일 불광회를 만들고, 그해 11월 1일 월간 <불광>을 창간했습니다. 그리고 1975년 10월 16일, 불광회는 확대 개편돼 불광법회가 됩니다."

-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씀하신 구조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라고 봐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불광법회는 처음부터 사부대중이 함께하는 공동체로 출발했습니다. 그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중앙 도량으로 불광사를 창건하게 된 것입니다."

 불광사 송년법회.
불광사 송년법회. ⓒ 불광법회

갈등의 본질, 사찰인가 공동체인가

- 일반 사찰 운영 방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구조라면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드는데, 현재의 갈등도 결국 이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사측 스님들은 불광을 일반 사찰처럼 만들려고 합니다. 승가 우월주의, 승려가 상층이고 재가자는 하층이라는 구조를 끌어들이려 하지요.

그런데 불광은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 아닙니다. 광덕 스님이 만들고, 그 이후에도 유지돼 온 것은 '사부대중 평등 공동체'입니다. 스님과 재가자가 함께 수행하는 구조였지, 위계로 나뉘는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갈등은 단순히 운영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광덕 스님이 세우고 유지해 온 그 공동체 정신을 지키려고 합니다."

- 그렇다면 지금의 불광사 문제는 일반적인 사찰 내부 분쟁이 아니라, 사찰과 공동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건 승가와 재가 중 누가 이기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겉으로 보면 권한 다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공동체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불광법회는 스님과 재가자가 함께 수행하는 사부대중 공동체로 출발했습니다. 사찰은 그 공동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재가자가 종속되는 구조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찰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단순한 운영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불광이 처음 만들어질 때의 원리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이 갈등은 특정 사건이 아니라 구조를 둘러싼 충돌이라고 봐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것을 권한 다툼이 아니라 공동체 원칙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갈등의 성격이 선명해진다. 불광사 문제는 단순한 운영 분쟁이라기보다, 사찰을 중심으로 보는 구조와 공동체를 중심으로 보는 구조가 충돌하는 장면으로 읽힌다. 사찰의 권한과 책임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같은 상황도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불광법회는 사찰의 부속 조직이 아니라 하나의 수행 공동체로 출발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사찰이 형성됐다. 문제는 이 구조가 오늘의 사찰 운영 체계와 쉽게 맞물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음 편에서는 이 구조에 따라 2018년 이후 실제 어떤 방식으로 충돌이 이어졌는지 그리고 왜 갈등이 법적 분쟁으로까지 확대됐는지를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며 살펴본다.

[인터뷰②] 불광사 분쟁을 넘어 한국 불교 '승가 우월주의'를 묻다(https://omn.kr/2hjzq)로 이어집니다.

#불광법회#불광사#박홍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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