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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4.3은 철모르던 부잣집 손녀딸의 삶을 어떻게 바꿨나

이재명 대통령의 4.3평화공원 참배와 유가족 간담회

3월 29일 이재명 대통령은 제주 4.3평화공원을 참배하고 4.3유족들과의 간담회를 가졌다. 간담회에서 이 대통령은 '국가폭력 공소시효 완전 폐지'를 강조했고 4.3에 대한 왜곡·폄훼에 대응할 수 있도록 국회와의 논의를 통해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는 뜻 역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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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은 1948년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이후 4.3에 대한 국가의 인식은 정권에 따라 차이를 보여왔다. 급기야 윤석열 정권 당시에는 서북청년단을 지칭하는 단체들이 4.3추념식장 주변에서 집회를 하겠다며 등장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제 아흔이 된 김현숙은 4.3이 색깔론에 시달릴 때마다 분통이 터진다.

"내 생각에 4.3은 그 남북통일정부를 세우자는 파하고 남한만 독립을 하자는 파하고 의견이 달라서 난 거라. 아직도 4.3에 대해 빨갱이 짓이라고 할 때마다 나는 지금 늙은 게 억울해. 내가 조금만 젊었어도 가서 어떵 해버리고 싶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김현숙은 4.3으로 할머니와 아버지, 아버지의 형제들을 잃었고 고향을 떠나야했다. 하지만 현숙은 아버지 형제들을 비롯해 남북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오도롱 수많은 삼촌들의 죽음이 색깔론으로 매도당할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났다.

이호국민학교 운동장에서 경찰의 총구가 할머니에게 향했다

1948년 12월 7일 경찰들과 특공대가 호병밭에서 오도롱 주민 10여 명을 포함 30여 명을 학살하고 마을의 집들을 모두 불태우자 호병밭 사람들은 친척들이 있는 아랫마을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오도롱에 남아있던 현숙의 가족들 역시 아랫마을 친척집에 방 하나를 신세졌다.

겨울바람이 매섭던 12월, 현숙의 작은아버지 김환규는 노형 외갓집에 가는 길에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해 큰 부상을 입었다. 가족들이 피 흘리며 쓰러진 그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왔는데 다음날 아침 경찰들이 들이닥쳐 보호자 나오라고 소리 질렀다. 집에는 현숙의 할머니 양능과 며느리, 두 돌을 막 넘긴 손주가 있었다. 좋지 않은 일을 예감한 양능은 자신이 보호자라고 앞에 나섰만 경찰은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이호국민학교 마당으로 끌고 갔다. 마을 주민들 역시 강제로 끌려와 있었다.

현숙의 할머니 양능이 죽임을 당한 이호국민학교터 4.3 당시 불에 타 사라졌고 지금은 한국공항공사가 사들여 일부를 공항부지로 사용하고 있다.
현숙의 할머니 양능이 죽임을 당한 이호국민학교터4.3 당시 불에 타 사라졌고 지금은 한국공항공사가 사들여 일부를 공항부지로 사용하고 있다. ⓒ 김순애

이호국민학교는 해방 후에 마을사람들이 앞장서서 건립했던 학교였다. 해방이 되자 제주도 전역에서 마을 유지나 지식인들, 재일동포들 등이 주도하여서 학교를 세우기 위한 움직임이 일었다. 그들은 직접 학교 부지를 내놓거나 기금을 모금하는 한편 학교가 지어지는 과정에도 참여했다. 당시 오도롱 아이들은 1시간을 걸어서 외도공립국민학교에 다니거나 2시간을 걸어서 제주읍 한가운데 있는 북공립국민학교에 다녀야 했다.

오도롱과 백개의 마을 주민들은 두 마을의 아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립학교를 세우려 했다. 두 마을 사이에 자기 마을에 학교를 유치하기 위한 힘겨루기가 일어나자 교육청이 나서서 위치를 정했다. 학교 건축비가 부족하자 주민들은 직접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와서 학교 기둥을 세우면서 먼저 3개 교실을 지었다. 미완의 상태로 1947년 3월 이호국민학교가 개교하자 오도롱과 백개의 아이들이 입학했다. 학교는 4개의 교실이 있는 목조 기와집으로 완공되었다.

현숙의 할머니 양능이 학교운동장에 끌려왔을 때 교실에서는 외손녀 김순자가 수업을 받고 있었다. 김순자는 그 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실에 있었는데 갑자가 밖에서 박수 소리가 막 크게 들려. 아이들이 우르르 다 창가로 몰려갔어. 나도 아이들 따라서 창 쪽으로 갔는데 학교 마당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박수 치고 있는 거라. 그 옆에는 젊은 남자들이 총하고 몽둥이를 들고 서있어. 그리고 총소리가 났어. 아직도 눈에 선해."

경찰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학교 운동장에서 양능을 총으로 쏴죽이고 양능의 아들 김환규를 동네 뒷동산으로 끌고 가 총살했다. 당시 제주읍내에 있었던 현숙은 현장에 같이 끌려갔던 작은어머니에게서 그날의 광경을 전해 들었다.

"할머니한테 총을 쐈는데 할머니가 막 움직여 버린 거라. 할머니 몸에서 창자들이 막 튀어나오니까 작은어머니가 할머니 몸 밖으로 빠져나온 창자들을 손으로 집어넣고 임시로 땅에 묻었어. 사태가 다 끝난 다음에 남은 가족들이 장례식을 새로 했지."

현숙의 기억에 할머니는 체구와 발이 커서 여자 고무신이 아니라 검정 고무신을 신었고 체구만큼이나 인품도 넉넉했다. 현숙은 밥을 얻어먹으러 오는 거지들을 내쫓지 않고 밥상을 차려주던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한 번은 명절날 친척 할아버지가 왔었어. 우리 집은 할아버지 제사를 맡았고 그 쪽에서는 할머니 제사를 맡아서 했는데 그 할아버지가 자식한테 제월제(제사를 지내기 위한 재산) 줬더니 다 팔아먹어서 제사 지낼 형편이 안 된다고 하소연을 해. 할머니가 그 말 듣고 그 제사를 다 떠맡았어. 결국 그게 우리까지 내려와서 우리가 그 제사를 다 맡게 된 거라. 할머니는 아량이 넓었지. 좀 웬만한 거는 다 털털했어. 말도 많지 않고 인품이 좋았어."

양능과 같이 끌려갔던 양능의 며느리와 손주는 그 날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았다.

"작은어머니 아이가 그 때 두 살이었는데 동네에서 예쁘다고 소문난 아이라났어. 경찰이 아이 얼굴이 예쁘난 죽이기 뭐했는지 작은어머니한테서 아기를 빼앗아서 옆에 있던 동네 처녀에게 대신 키우라고 준 거야. 우리 작은어머니가 평소에도 야무지고 당찼었는데 자기 자식을 갑자기 뺏기니까 죽을힘을 다해서 다시 그 아기를 뺏어 안은 다음 '죽더라도 애기를 안아서 죽겠다'고 소리 지른 거라. 아기가 너무 곱게 생긴데다 작은어머니가 너무 악쓰멍 소리지르니까 경찰이 '애기가 나중에 큰 사람이 되겠다' 말하고 작은어머니도 죽이지 않은 거라."

어머니의 목숨을 구하며 극적으로 살아남은 아기는 혹독한 시기를 무사히 통과하지 못하고 명을 다했다. 산으로의 도피 생활 동안 매서운 추위로 온 몸에 동상을 입었고 산에서 내려온 후 수용소와 도두 함바집의 열악한 환경을 버티지 못했다.

당시 현숙의 할머니 양능의 나이는 59세, 작은아버지 김환규의 나이는 24세였다. 그날 그들이 왜 경찰에게 끌려갔는지 왜 총을 맞아 쓰러져야 했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다.

4.3평화공원내 위패봉안실 4.3때 희생당한 오도롱 삼춘들의 위패가 모셔져있다.
4.3평화공원내 위패봉안실4.3때 희생당한 오도롱 삼춘들의 위패가 모셔져있다. ⓒ 김순애

임이밭사건

양능과 김환규의 총살당하고 한 달 정도 지난 후 경찰과 특공대는 마을사람들을 다시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킨 후 도피자 가족들을 지목하게 했다. 도피자 가족이라고 지목받은 이들은 학교 동쪽에 있는 임이밭으로 끌려갔다. 경찰은 마을 주민들을 시켜 큰 구덩이 두 개를 파게 한 후 깊고 넓은 구덩이가 완성되자 도피자 가족들로 끌려온 이들을 그 둘레에 세웠다.

경찰들의 명령을 받은 특공대들이 도피자 가족들을 철창과 죽창으로 찔러서 구덩이 안으로 쓰러뜨렸고 경찰이 총을 쐈다. 어떤 사람들은 창에 찔리지도 않았는데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져 구덩이 안으로 떨어졌다. 무서워서 도망가는 어린 아이들을 특공대들이 창으로 찔러서 구덩이 안으로 던졌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이들은 살려 달라고 소리 질렀지만 경찰은 그대로 구덩이를 메우도록 명령했다. 그 날 30명 정도의 주민들이 구덩이에 묻혔다. 임이밭 사건과 함께 마을은 집 하나도 남김없이 불에 탔고 마을 사람들은 각각 산으로 아랫마을로 도피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주투데이에도 실립니다. 필자는 제주녹색당 운영위원장입니다.


#43#43추념식#통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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