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하나 못 치는 사람이 음악 에세이를 쓴다는 게 말이 될까? 말이 된다고 말하고 싶다. 예술 감상은 모두에게 열려 있으므로. 문학과 예술이 삶의 경험 속에서 다채롭게 녹아들 이 글이 당신을 예술 감상의 충동으로 몰고 갔으면 좋겠다. 예술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찾아온다는 편견을 찢고, 자기 삶을 예술로 만들려는 창조의 충동으로 이어지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골키퍼이다. 인생이라는 경기장 위에서 어디에서 날아 올지 모르는 슛을 막으려고 전전긍긍하는 골키퍼. 공을 넣어야 하는 멋진 공격수가 자기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공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골키퍼의 불안을 저마다 안고 살아가고 있다.
지난 3월 중순, 나는 용인 고속도로 위의 정체 구간에서 쥐가 나는 오른쪽 다리를 왼손으로 붙잡고 쩔쩔매고 있었다. 정체 구간은 서판교에서 수원에 이르는 이차 도로. 몇 개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에도 오른쪽 다리의 쥐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나는 머릿속으로 별의별 상상을 다 했다.
119에 신고할까? 차를 갓길에 세울까(사실 갓길도 없는 구간이었다)? 사고가 나든 말든 그대로 내버려둘까? 오른쪽 발을 브레이크 페달 위에 가볍게 올려놓은 채, 오른손은 핸들을 잡고 왼손은 오른쪽 종아리를 주무르면서 깊게 심호흡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한참 만에 정체 구간이 끝났고 그러자 오른쪽 종아리의 경련은 사라졌다. 고속도로 위에서 나의 불안은 무엇이었을까?
사랑은 불안을 막아줄 수 있을까

▲알랭 드 보통이 쓴 <불안> 한국어판(왼쪽)과 영어판 표지. <불안>의 원제는 '지위에 대한 불안(Status Anxiety)'이다. ⓒ 은행나무/Vintage
불안. 현대인의 일상적인 심리를 드러내는 단어. 대상이 명확한 공포와는 달리 불안은 그 대상이 불명확하거나 모호하다고 알려져 있다. 전쟁, 기아, 재난, 트라우마, 상실, 이별 등 인류가 겪어온 온갖 불행과 고통이 잠재적인 불안으로 우리에게 어른거리지만, 일상적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일 것이다.
스위스 출신의 명민한 작가 알랭 드 보통이 쓴 <불안>의 원제는 '지위에 대한 불안(Status Anxiety)'이다. 그것은 신분의 세습이 철폐된 현대 사회에서 더 나은 직업, 더 나은 지위를 얻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불안을 뜻한다. 이 불안은 노후 대책을 하지 못한 노년층이나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하는 청년들에게 더 강하게 나타난다. 여기에 타인의 시선이 겹칠 때 이 불안은 극대화된다.
페터 한트케의 소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갑자기 직업을 잃은 젊은이의 불안을 그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과 말을 통해 보여준다. 이 작품의 주인공 블로흐는 전직 골키퍼이다.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던 그는 현장감독의 힐끗 올려다본 시선을 해고의 표시로 오해한 나머지 그 길로 공사장을 나와 버린다.
혹자는 이 대목에서 왜 그런 오해를 하느냐고 블로흐의 성급함을 나무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 혹은 '갑을'에서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 혹은 극도의 심리적 불안에 놓인 사람은 타인의 '힐끗' 같은 사소한 시선만으로도 쉽게 무너져 내리는 법이다. 이런 블로흐 앞에 펼쳐지는 것은 살인과 방황과 도주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그런 불안을 막아줄 수 있을까? 독일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가 1974년에 제작한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이 질문에 다소 심란한 답변을 해준다. 60대 독일 하층 여성 에미와 30대 모로코 청년 알리의 사랑. 모든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처음의 열정을 잃고 만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에 위협이 되는 것은, 그런 자연적인 열정의 사그라짐이 아니라 주위의 시선이다. 이민자를 바라보는 독일인들의 냉혹한 시선, 독일인을 바라보는 이민자들의 냉소적인 시선. 가까스로 다시 만나 둘의 관계는 회복되는 듯했다. 그때 느닷없이 알리에게 닥친 복통. 그 정체는 바로 불안일 것이다.

▲슈만의 우울증과 환청, 자살 시도 등이 나오는 영화 <클라라>의 포스터 ⓒ 영화사 진진
불안이 커져 환청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2010년 영화 <클라라>에서 내가 기억하는 알베르트 슈만은 우울증으로 지휘자 자리에서 쫓겨나고 불안 속에서 환청에 시달리는 모습이었다. 급기야 그는 라인강에 투신하여 자살을 기도한다.
그런 중에도 환청 속 멜로디가 어른거렸다. 라인강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후 슈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환청을 악보에 옮겨적는 일이었다. 슈만은 그것을 천사가 전해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 <유령 변주곡>. 이 곡은 어떤 화려함도 없이 고요하고 단순하게 반복되는 멜로디를 보여준다. 마치 조금씩 사라지는 것처럼. 그러다가 2년 뒤 정신병원에서 그는 생을 마감했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슈만의 첼로협주곡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대목에서인가, 첼로가 대화를 나누는 듯한 서정적인 멜로디에 빠져들었다. 곡이 끝나고 진행자가 청취자의 감상을 소개했다. "이 대목만 들으면 늘 가슴이 아파요. 죽기 전의 슈만의 고통이 느껴져서요."
내게는 아름답게만 여겨졌던 멜로디를 낳는 순간이 슈만에게는 가장 힘겨운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상상한다. 라인강 물살 속에 잠기는 슈만의 귓가에 어른거렸을 음표들과 죽을 작정으로 허우적거리는 중에도 그것을 자신의 머릿속 오선지 안에 담아내려 했던 예술가의 집념을.
불안을 어떻게 해야 할까

▲뭉크의 <절규>(왼쪽)와 <마돈나> ⓒ 퍼블릭 도메인
불안을 담아낸 예술가라면 에드바르트 뭉크를 빼놓을 수 없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를 병으로 잃고 그 자신이 평생을 자살 충동과 강박과 불안에 시달리며 살았던 뭉크야말로 '불안'을 살아내고 표현한 예술가이다.
그의 대표작 <절규> 속 불안이 일렁이는 선들은 언제 보아도 우리 귓가에 선명한 비명을 안겨준다. 나는 2014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처음으로 한꺼번에 많은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보았던 <절규>는 흑색의 판화 버전. 2024년에 회화 버전의 <절규>가 전시되었다고 하는데 가보지 못했다. 아니, 가고 싶지 않았다. 2014년도에 보았던 전시회에서 뭉크의 핏빛 불안과 절망이 너무 강렬하게 여겨졌던 탓이다.
가족 상실의 아픔을 그린 그림뿐 아니라 <마돈나>나 <뱀파이어>처럼 여자를 끔찍하게 그린 그림들도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산 뭉크는 몇 번의 연애를 모두 실연으로 끝맺었다. 그럴 때마다 뭉크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타락한 마돈나나 흡혈귀로 표현했다. 검은 머리의 상체를 내밀고 있는 얼핏 소녀 같은 <마돈나>의 모습은 관능적이며 <뱀파이어>에서 붉은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남자를 끌어안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흡혈귀처럼 섬뜩하다. 일종의 복수일 것이다.
하지만 <마돈나> 그림 한구석의 웅크린 태아의 모습이나 <재>에서 방금 정사가 이루어진 듯한 침대를 배경으로 한구석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화가 자신으로 보이는 초상은 안쓰럽다. 뭉크는 80세까지 살았고 돈도 많이 벌었다고 하니 그의 불행과 절망은 도리어 예술적 성공의 기름진 토양이 되어준 것에 틀림이 없다.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에 나오는 낯선 선율 또한 우리 내면의 불안을 깊이 자극한다. 농담을 섞어 말하자면, 여기에서 흘러나오는 기괴한 노랫소리를 듣다 보면, 그 기이한 음악적 표현 때문에 불안이 기를 펴지 못하고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불면의 밤에 난해하고 어려운 책을 몇 장 넘기다 보면 스르르 잠에 빠지게 되는 것처럼.
인생에서 불안을 제거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진화 심리학자는 불안이 생명체의 자기방어 체계라고 말한다. 불안을 통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게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불안이 심해지면 이것은 장애가 되어버린다. 공황장애, 범불안장애, 사회불안장애, 특정 공포증 등. 이런 병명을 보면 우리 안의 불안은 가라앉기는커녕 더 커지기 마련이다. '혹시 내가...' 하는 불안 말이다.
그렇다면 이 불안을 어떻게 해야 할까? 불안이 거부할 수 없는 인생의 토양이라면? 작가나 예술가들이 했던 예술 행위는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불안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형태를 언어나 음표나 선으로 선명하게 그려냄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공포로부터 한 걸음 물러날 거리를 만들어 냈다. 극복이 아니다. 그것은 견딤과 바라봄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 이제 당신의 불안도 '관찰 대상'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지.
고속도로 위에서 쥐가 난 날은 '책고집'에서 운영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작 읽기'의 첫 모임이 있던 날이었다. 그날의 텍스트는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만나 주인공 블로흐의 불안을 이야기하는 동안 불안은 누그러졌고 모임이 끝난 뒤 돌아오는 길, 내 오른쪽 종아리에서는 쥐가 나지 않았다.
얼마 전 뉴스에서 제주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작된 사건만 38건, 간첩이라고 누명을 쓴 공식 피해자만 90명이라고 하니 비공식적인 숫자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또 피해자들은 얼마나 많은 세월을 불안 속에 살아왔을까.
불안이 안개처럼 사람들을 낱낱의 입자로 떨어뜨리려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종의 연대일지도 모르겠다. 너의 불안과 나의 불안이 다르지 않다는 불안의 연대. 특히나 압도적인 힘을 행사하는 국가 기구나 단체 혹은 집단으로부터 받은 부당한 대우일수록 불안의 연대는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