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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봉기 대뫼마을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 담벽에 그려진 박홍규 화백의 고부 봉기.
고부 봉기대뫼마을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 담벽에 그려진 박홍규 화백의 고부 봉기. ⓒ 이영천(촬영)

고부에서 시작된 '파랑(八王)새'의 작은 날개짓이 동학농민혁명이란 거대한 태풍을 불러 일으켰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선봉건체제 해체사의 최종적 도달점이며 근대조선 민중해방운동사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된다.

그 배경은, 첫째는 18세기 이후 악화된 조선왕조 양반사회의 정치적 모순, 둘째는 삼정의 문란, 셋째는 19세기 이후 서세동점의 위기 속에서 국가 보위의식의 팽배, 넷째는 전통적인 유교의 폐해에 따른 지도이념의 퇴색, 다섯째는 서학의 도전을 민족적 주체 의식으로 대응하려는 응전, 여섯째는 실학에서 현실 비판과 개혁 사상에 영향받은 피지배 민중의 의식 수준의 향상과 높아진 지각도 등을 들 수 있다.

동학사상은 주자학적 전통으로 굳게 닫힌 전근대의 강고한 철벽에서 인권·평등·자존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깨우치고, 삶의 주체로서 민족정신을 일깨워서 근대의 문을 열게 하였다. 봉건적 전근대의 철문을 깨고 근대의 광장을 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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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창도 초기가 도인들의 각성기라면, 중기는 교조신원운동과 교세확장, 후기는 동학농민혁명으로 전개되었다. 동학교조를 사도난정(邪道亂正)으로 몰아 처형한 정부는 내적인 개혁요구와 세계사적인 변혁의 사조에도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있다가 강제 개항을 맞게 되었다. 결국 이같은 상황에서 동학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한 반식민지화와, 국내 봉건적 관료층의 수탈로 신음하는 피압박 민중의 해방운동과, 반봉건·반외세 투쟁을 위한 혁명이념으로 나타났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전라도 고부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미곡 징수와 만석보의 수세징수가 농민의 원성을 사게 됨을 계기로 전봉준·김개남·손화중을 중심으로 동학교도들이 봉기함으로써 발발하였다.

세계혁명사, 예컨대 영국의 청교도혁명, 독일의 종교개혁,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의 대혁명, 중국의 신해혁명,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은 모두 그 나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변혁운동이었다. 우리의 경우 동학혁명을 이같은 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는 자주적인 민중혁명에 속한다.

특징이라면 동학을 창도한 교조와 2세 교주, 3세 교주가 잇따라 당대의 정치권력과 외세 침략세력에 의해 참사를 당했다는 점이다. 세계 유수의 종교 창도자들 역시 대부분 수난을 겪지만, 2~3대 교주까지 변을 당한 경우는 동학이 유일하다. 수운은 고종에게, 해월은 고종과 일제에 의해 참수당하고, 3세 교주 의암은 3·1혁명 주도와 관련 투옥되었다가 숨지기 직전에 석방됐으나 사실상 옥사한 것이나 다름없다. 동학혁명을 주도한 전봉준과 김개남을 비롯 동학도와 참여농민 20~30만 명이 학살당한 것도 세계혁명사에 유례가 없다.

덧붙이는 글 |
[횃불·촛불·응원봉, 동학농민혁명]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횃불#촛불#응원봉#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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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촛불·응원봉, 동학농민혁명]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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