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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를 온몸에 품고 있는 뉴욕. 누군가 살아냈고, 누군가 살아가는 빌딩 숲 사이사이의 이야기를 하나씩 담아 보려 합니다.

▲1946년~1947년경의 엘리너 루스벨트 ⓒ 위키미디어 공용
애나(Anna)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동생과 함께 할머니 그늘에서 자랐다. 먼 친척뻘 되는 청년과 사랑에 빠져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다. 그런데 든든해 보였던 신랑은 알고 보니 마마보이였고, 시어머니는 시댁 곁에 신혼집을 차려주고는 수시로 드나들었다.
시어머니는 육아에도 관여하며 자녀들 앞에서 어머니인 그녀를 깎아내리곤 했다. 시어머니의 간섭이 힘들 때마다 애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울곤 했다. 여섯 아이와 함께 화목한 가정을 꿈꿨지만 남편은 그녀의 비서와 바람이 났다. 남편을 용서하고, 혼신을 다해 그의 병간호도 하고, 평생 그의 발이 되어 사방을 다니며 일했지만, 남편의 임종 순간 그의 곁에 있었던 건 오래전 헤어졌다던 내연녀였다.
그녀의 인생에 행복한 반전이 찾아올까?
미국 최장기간 영부인이었던 애나 엘리너 루스벨트
뉴욕 맨해튼 동쪽에는 롱아일랜드(Long Island)라는 섬이 있다. 이름처럼 길고 큰 평원인 섬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농장들이 있었다.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소녀, 애나도 롱아일랜드의 작은 농장에서 자랐다. 그녀의 고모와 엄마, 딸 모두 퍼스트 네임이 '애나'였기에 공식석상이나 구별해서 불려야 할 때는 관습에 따라 자연스럽게 미들네임 '엘리너'를 사용했다.
미국의 유일한 4선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내로, 무려 12년이라는 최장기간 동안 영부인의 자리에 있었던 애나 엘리너 루스벨트(Anna Eleanor Roosevelt). 그녀는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영부인이기도 하다.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에게는 남편 외에도 깊은 인연이 있는 또 다른 대통령이 있었다. 남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먼 친척 아저씨이자, 엘리너 여사의 큰아버지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결혼식장에 엘리너의 손을 잡고 들어가준 사람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롱아일랜드 오이스터베이에 있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저 '사가모어 힐(Sagamore Hill)' 2층에는 조카딸 엘리너가 머무른 방이 잘 보존되어 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사저 2층의 엘리너 루스벨트의 방롱아일랜드 오이스터베이에 있는 '사가모어힐'은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사저이자 국립역사보존지구로 관리되고 있다. 사저 2층에 조카였던 엘리너 루스벨트가 머물렀던 방이있다. 고아였던 엘레노이 여사는 사가모어힐의 저택과 이 방을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고모와 엄마, 딸 모두 퍼스트네임이 '애나'여서 애칭으로 서로를 부를 때 외에는 구분을 위해 미들네임을 사용했는데 애나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 역시 엘리너라 불렸다. ⓒ 장소영
그토록 명망 있는 영부인이라면 생가가 남아 있을 듯했다. 그런데 '사가모어힐'에서 만난 가이드는 롱아일랜드에는 엘리너 여사의 거처가 없고, 고아였던 그녀가 그저 이 방을 좋아했다고만 설명했다.
궁금증을 가지고 틈틈이 자료를 찾아보던 중에, 지난 겨울 드디어 오래전에 발간된 지역 뉴스 한 토막을 읽게 되었다.
20세기 초, 롱아일랜드에는 미국 최초의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가 있었다. 자동차가 속도를 줄이거나 멈춰서는 일이 없도록 기찻길이나 일반 도로를 피해 무려 60개의 다리를 건설해 가며 만든, 속도 제한 없는 세계 최초의 입체 고속도로였다. 지금은 폐쇄되었고 몇 개의 구간만이 흔적처럼 남아 있는데 그중 일부가 우리 집에서 가까운 '아이젠하워 공원' 곁에 있다. 루스벨트 여사가 자랐던 농장이 그 도로 부근이라는 것이다.
지역 신문에 따르면 십여 년 전인 2011년, 초등학교(Barnum Woods ES) 5학년 학생 세 명이 문서를 통해 애나 엘리너 루스벨트가 어릴 적 살았던 농장이 이스트메도(East Meadow) 지역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역사 전문가도 아닌 초등학생 세 명이 이룬 놀라운 업적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이들은 역사 교사와 함께 고지도와 고문서를 계속 조사해, 그녀의 아버지 엘리엇 루스벨트의 농장이 있던 터를 알아냈다.
2014년, 지역 방송사는 지역 행정 위원회가 그 농장 터에 지역 역사 유적 안내 표지를 세웠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정확한 주소와 위치는 밝히지 않고 있었다. 아이젠하워 공원 곁에 남은 옛 고속도로 구간이 그리 길지 않으니 자동차로 주변을 돌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길을 나섰다.

▲미국 최초 자동차를 위한 고속도로 모터 파크웨이20세기 초, 롱아일랜드에는 속도 제한 없이 달릴 수 있던 자동차 전용 고속 도로가 있었다. 기찻길이나 일반 도로와 만나 자동차가 속도를 늦추거나 멈추지 않도록 교량들을 따로 건설했다. 자동차 경주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현재는 대부분의 도로가 폐쇄되었으며 일부 구간만이 사용되거나 흔적만 남았다. 아이젠하워파크 인근에 남은 모터 파크웨이는 아직도 자동차 도로로 사용되며 인도를 겸하는 자전거 도로 옆으로 역사성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 주변에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농장이 있었다. ⓒ 장소영
세상을 변화시키는 여성 리더십의 힘
수줍음이 많았던 소녀 엘리너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15세에 영국 유학을 떠났다. 생계를 위해 고단하게 일해왔던 엘리너에게 영국 유학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엘린스우드 아카데미(Allenswood Academy)의 설립자인 프랑스 여성 마리 수베스트르 교장을 만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여성 리더십에 눈뜨게 된 것이다.
뉴욕으로 돌아온 청년 엘리너는 당시 맨해튼의 극빈 지역 중 하나였던 헬스키친(Hell's Kitchen)으로 들어가 빈민층을 돌보고 아이들을 교육했다. 그 후 평생에 걸쳐 흑인과 여성, 노동자와 아동 등 소수를 위한 인권운동가로, 국내외 문제에 적극 뛰어드는 여성 사회운동가이자 정치가로, 저술과 연설에서도 뛰어난 활동을 펼쳤다. 남편으로서는 살갑게 지내지 못했던 루스벨트 대통령도, 영부인의 정치적 견해를 귀 기울여 들으며 평생의 동지로 여겼다고 한다.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DAR(독립 혁명의 딸들) 홀이 흑인 여성 성악가 마리안 앤더슨의 공연을 불허하자, 엘리너 영부인이 즉각 DAR협회를 탈퇴하고 대신 링컨 기념관 앞에서 야외공연을 열어준 일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이다. 1939년 4월 9일, 부활 주일에 열린 마리안 앤더슨의 콘서트에는 무려 7만 5천 명의 청중이 모여들며 흑인 인권 운동의 기념비적인 날이 되었다.
남편 프랭클린 루스벨트 사후에도 엘리너 루스벨트는 광폭 행보를 이어갔다. 유엔인권이사회 의장으로 세계인권선언문 작성(1948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57년 12월 10일, 엘리너 루스벨트는 '세계 인권의 날'을 기념하려 내슈빌을 방문했다. 내슈빌에는 힘든 유학 생활 중에도 미국 내 흑인 사회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사회 구조와 그로 인해 사각지대에 놓인 인권 문제에 대해 골몰하던 한 한인 여학생이 있었다. 루스벨트 여사의 환영식에서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인사했다. 미국의 32대 영부인이었던 여성과 미래의 대한민국 15대 영부인이 될 여학생의 만남이었다. 훗날 그날을 기억하며 "기품 있고, 손이 참 따스했다"라고 이희호 여사는 회상하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만큼이나 존재감을 가지는 유일한 영부인
워싱턴 DC의 루스벨트 공원에는 루스벨트 대통령 동상이 두 개 있다. 휠체어에 앉은 실물 크기의 동상과 입구에 세워진 대형 동상이다. 그리고 대통령 옆에는 영부인이 아닌 애견 팔라(Fala)의 동상이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대통령 재임 기간의 상황을 묘사한 설치물들을 따라 공원 안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따뜻한 미소로 당당히 '홀로 서 있는' 엘리너 루스벨트 영부인 동상을 만날 수 있다.

▲워싱턴 DC 루스벨트 기념 역사 공원일반적으로 대통령 부부는 사진을 나란히 찍거나 함께 기념된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 부부는 각자의 업적이 뚜렷하기 때문인지 공원 내에서도 동상이 따로 세워져 있다. 영부인의 존재감과 업적이 대통령만큼 추앙받고 있다. ⓒ 장소영

▲맨해튼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의 집맨해튼 남쪽 워싱턴 스퀘어 공원 서쪽에 위치한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의 집이 있던 빌딩이다. 인도주의자이자 개혁가, 여성 정치인이었던 여사는 1942년부터 1949년까지 그리니치 빌리지에 거주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뉴욕대가 세운 기념판이다. 맨해튼에서 태어나 맨해튼에서 생을 마감한 엘리너 여사이기에 유엔을 비롯한 곳곳에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다. ⓒ 장소영
영부인이라도 시집살이는 고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시어머니에게 시달리는 아내를 위해, 본가에서 조금 떨어진 발킬(Val-Kill, 시냇물이 흐르는 계곡)에 거처를 따로 마련해 주었다. 발킬에서 엘리너 루스벨트는 글을 쓰고, 사회 문제를 연구하고, 명사들과 교류하고, 불황으로 생계가 어려운 주민을 위해 수공예 가구 공장을 운영하며 경제적 자립을 돕는 등 독립적인 활동을 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본가인 하이드파크와 엘리너 루스벨트가 활동했던 발킬은 현재 각각 국립역사지구로 보존되고 있다. 특히 발킬은 국립역사보존지구중 유일하게 대통령이 아닌 영부인을 기념하는 공원이다.
여느 대통령 부부와 달리, 가깝지만 따로 서 있는 두 사람의 기념물이 새삼 신기해 보인다. 대통령과 영부인의 소원한 관계 때문인지, 각자의 업적이 위대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엘리너 루스벨트 영부인의 존재감만큼은 역대 대통령들과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소녀 시절 거주했던 아버지의 농장 터에서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가 살았던 농장 터모터 파크웨이를 중심으로 한 쪽에는 아이젠하워 파크가, 다른 한 쪽은 현재 주택가이다. 초등학생 세 명에 의해 발견된 이 터는,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의 아버지가 구입해 농장을 운영하였다. ⓒ 장소영

▲엘리너 루스벨트 생가 터를 알리는 표지판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영부인이자 인권운동가였던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가 어린 소녀 시절 솔즈베리 파크 드라이브에 있는 이 터에서 성장했음을 알리는 역사 유적 안내 표지판. ⓒ 장소영
아이젠하워 공원 가까이, 솔즈베리파크 드라이브(Salisbury Park Dr.) 선상에서 밸런타인스 로드(Valentines Rd.)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표지판을 발견했다. 두 도로는 작은 삼각형 모양의 잔디밭을 끼고 접해 있었는데, 잔디밭 위에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를 기념하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아버지 엘리엇 루스벨트는 약 10에이커(축구장 여섯 개 정도) 크기의 부지를 구입해 작은 농장을 시작했다. 술에 기대 살았던 아버지 엘리엇은 이 농장에 특이한 이름을 붙였다. '하프웨이 너바나(Halfway Nirvana)'. 복잡한 도심 속에서 많은 방황을 한 엘리엇은 유약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도심을 떠나 한가한 농지에서 평안을 얻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상향(열반)의 절반쯤되는 곳(Halfway Nirvana)이라 불렀던 걸 보면.
그러나 안타깝게도 엘리엇의 가족은 그곳에서 안녕을 얻지 못했다. 엘리너와 남동생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잃고 고아가 되었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원가족도, 결혼해서 얻은 가족도 엘리너에게 결코 따뜻한 둥지가 되어주진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닥쳐온 고난에 잠식되지 않았다. 체득한 고통을 오히려 공익을 위해 애쓰는 데 사용했다. 외부 환경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그녀의 삶과 타인의 삶에 반전을 만들어가며 산 셈이다.
법률가 출신의 정치인이자 대통령이 된 남편을 둔 아내의 활동 범위와 영향력은 어떠해야 할까.
예술 부문 하나를 보더라도 사욕이 아닌 공익을 향한 엘리너 영부인의 노력이 돋보인다. 남편의 뉴딜정책에 연방예술프로젝트(The Federal Art Project)가 포함되도록 영향을 준 것도 영부인이었다. 대공황 시절에도 예술가들의 활동이 멈추지 않도록 애쓴 결과, 국책 사업에 사용된 작품만 무려 20만점이 넘는다고 한다. 남편을 뉴욕 주지사에 당선시키고 선제적 구호 정책을 펼치게 했고, 무려 4선이나 대통령 당선을 도왔지만 정작 백악관의 살림은 조촐하고 검소했다.
그녀는 권력의 힘을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지도자'였다.
"젊음은 자연히 주어지는 것이지만, 노년은 공들여 작업한 예술 작품이랍니다." (Youth is a gift of nature, but age is a work of art.)'
생전 그녀의 말처럼, 애나 엘리너 루스벨트는 그 자신이 하나의 위대한 예술 작품으로 살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