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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의 임신이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었지만, 고령 임신과 노산 엄마의 고민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2007년 나이 마흔에 둘째를 낳은 노산 1세대로서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현실을 기록합니다.
한동안 올드머니 룩이 유행하더니, 다시 고전이 주목받고 있다. 탄생 250주년을 맞은 '제인 오스틴'이 이야기다. 지난 11일 그녀의 대표작 <오만과 편견>이 재개봉했다. 2006년 3월 첫 개봉 이후 무려 20년 만이다.

 영화 <오만과 편견>의 무도회 장면
영화 <오만과 편견>의 무도회 장면 ⓒ UIP코리아

지난달 종이책으로 정주행하고, 영화까지 이어 본 나는 이상하게 한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무도회 장면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서로를 훑어보고, 누가 누구를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분위기가 갈리고, 그 짧은 순간에 관계의 방향이 정해지는 자리. 나에게도 그런 자리가 있었다. 첫 학부모 총회였다.

공개 오디션을 앞둔 심정이 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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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3월 둘째 주가 되니 맘카페의 공기가 달라진다. 육아, 살림 정보, 시댁 이야기로 돌아가던 게시판에 갑자기 쿵,쿵 발자국 소리를 내며 굵직한 키워드가 등장한다.

"총회 가실 건가요?"
"총회룩 골라주세요."

맘카페에서 총회룩 1번과 2번 중 1번에 투표를 하고, TV 리모컨을 누르니 홈쇼핑에서 봄옷 소개가 한창이다. 무조건 성공을 보장하는 총회룩이라며 쓰리피스를 권한다. 이때 휴대폰이 질세라 알림을 울린다. 피부과 프로모션이다. 총회에 가져가야 할 것은 명품 가방이 아니라 '동안'이라고 강조한다. 총회 시술에도 골든타임이 있다며 롸잇나우- 지금 움직여야 한다고 재촉한다. 첫 상견례에서 뒤처지지 말라고.

손꼽아 계산해 보니 십이 년 전이다. 학교 총회는 학사일정을 안내하는 자리지만, 나는 공개 오디션을 앞둔 심정이었다. 또래 엄마는 없고, 나란히 서 있을 엄마들과는 강산 하나 이상의 터울이 날 것이다. 노산 엄마에게 첫 총회는 살아남아야 하는 자리였다. <오만과 편견>에서 베넷가의 딸들이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코르셋을 조이던 모습처럼.

2026 총회 가통 주변의 학교에서 나온 총회 가통(가정통신문). 두근반 세근반 노산엄마의 걱정이 늘어나는 순간이다.
2026 총회 가통주변의 학교에서 나온 총회 가통(가정통신문). 두근반 세근반 노산엄마의 걱정이 늘어나는 순간이다. ⓒ 정현주

유난스러웠던 총회의 발단은 알림장의 생소한 문구에서 시작되었다.

부모님 가통 확인. 표시해서 갖고 오기

가통.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가정용 통신기인가, 학교에서 쓰는 비밀코드인가. 중요한 걸 놓친 것 같아 등에 땀이 찼다. 큰아이 때는 한 번도 못 본 단어였다. 나의 든든한 119 자매님에게 전화를 했다. 세 살 터울의 친자매님은 동네에서 '홍반장'이라 불리는 여성으로 모르는 게 없다. 늦둥이가 가져온 가통 암호 때문에 불안하다고 하자, 수화기 너머로 호탕한 웃음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가통은 가정통신문이야. 아마 총회 안내문일 거야. 그리고 언니, 절대 학부모회 동그라미 치지 마. 그거 반 대표 하겠다고 지원하는 거야. 반 대표는 힘들어. 알았지?"

자매님의 말대로 책가방 안에는 총회 안내문과 봉사 지원서가 들어 있었다. 학부모회, 녹색어머니회, 도서관 봉사... 여러 칸들이 말똥말똥 눈을 깜빡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동생의 말을 정확히 어겼다. 반대표와 같은 이름이라는 학부모회에 정성을 담아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늦게 아이를 낳은 노산 엄마에게 선택지는 늘 많지 않았다. 중간 어디쯤 서 있기에는 나이가 부담스럽게 많았고, 뒤로 물러나기에는 또 그 나이가 더 초라해 보였다. 결국 나에게 남은 길은 두 가지였다. 구석에 찌그러진 보따리로 살 것인가, 아니면 반대표가 되어 왕언니가 되느냐. 나는 선택했다. 찌질하게 스트레스 받느니 당당하게 왕언니가 되자. 아이에게도 움츠리지 않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 주자.

 늦게 아이를 낳은 엄마에게 첫 만남은 여전히 어려운 시험 같다. ?AI생성 이미지
늦게 아이를 낳은 엄마에게 첫 만남은 여전히 어려운 시험 같다. ?AI생성 이미지 ⓒ 오마이뉴스

총회 당일, 나는 주주총회에 나가는 임원처럼 비장하게 준비를 했다. 당시 맘카페에서 총회룩으로 추천한 올블랙 세미 정장이었다. 정년 퇴임을 3년 남기셨다는 담임 선생님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제가 1학년 신입생 반을 많이 맡았지만 올해 같은 경우는 처음이에요. 보통 학부모회는 부담스러워서 피하시는데, 올해는 지원하신 어머님이 두 분이시네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다들 기피해서 단독 지원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단다. 얼굴을 보니 젊다. 벌써 진 것 같다. 이거 떨어지면 더 망신이다. 노산도 서러운데 늙은 엄마 체면까지 구겨질 판이다. 즉석에서 반대표 선거가 시작됐다.

나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공약을 써야 했다. 이럴 때 쓰라고 방송작가를 했나 싶었다. 머릿속에서 문장이 쏟아졌다. 늘어져 있던 뇌를 똘똘 말아 공약을 적고 있는데, 어디선가 맥을 끊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 반대표 후보였다.

"저... 제가 사퇴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연륜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이건 칭찬인가 욕인가. 혹시 내가 쏜 레이저 눈치를 받은 것일까. 잘 된 일 같은데 기분이 묘했다. 어디를 가도 노산 엄마의 콤플렉스는 낭중지추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다. 후보 사퇴, 단일 후보로 당선. 그렇게 나는 반대표가 되었다.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면 엄마들도 초등학교 1학년이라는 말이 있다. 다행히 엄마들은 착한 어린이처럼 왕언니를 따라주었다. 배꼽 안에 엔진을 숨겨 놓은 추진력 갑 왕언니는 뭐든 전투적이고 열성적으로 달렸다.

30명 엄마들의 반모임을 순식간에 열고, 단체 톡방을 만들어 정보에 목마른 1학년 엄마들에게 마중물을 부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으싸으싸 치른 바자회에서 전교 1등 매출을 찍고, 체육대회 날에는 걸그룹 못지않게 온몸으로 응원했다.

편견 없는 총회가 되기를

맘카페에 올라오는 총회 글 예전보다 자유로운 총회 관련 의견들. 확실히 걱정은 줄어든것 같다. 노산엄마는 총회 앞두고 그렇게 걱정이 많았는데...다 기억도 나지 않는 걱정들이다.
맘카페에 올라오는 총회 글예전보다 자유로운 총회 관련 의견들. 확실히 걱정은 줄어든것 같다. 노산엄마는 총회 앞두고 그렇게 걱정이 많았는데...다 기억도 나지 않는 걱정들이다. ⓒ 정현주

"다음 주 총회인데 꼭 가야 하나요?"
"총회에 편하게 입고 가도 되죠?"

요즘 총회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참석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고, 정장을 입지 않아도 눈치 주는 사람도 없다. 예전처럼 전투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그런데도 주변을 보면 마음만은 예전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늦게 아이를 낳은 엄마에게 첫 만남은 여전히 어려운 시험 같기 때문이다.

영화 <오만과 편견>에서 사람들은 첫 만남에서 서로를 판단한다. 그 판단은 짧지만 생각보다 오래 간다. 오만은 사람을 밀어내고, 편견은 스스로를 움츠리게 만든다. 그때의 나도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었다.

혹시 나이 많은 엄마라서 부담스러워 보일까, 괜히 한 마디 했다가 아는 척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혼자 어색하게 서 있는 사람이 될까. 지금도 아마, 어딘가에서 같은 마음으로 총회를 준비하는 노산 엄마가 있을 것이다. 그 마음 안다. 늦게 아이를 낳은 엄마에게 그 자리는 필요하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운 자리니까.

오늘 아침 지하 주차장에서 윗집 동생을 만났다. 그녀는 마흔에 결혼하고 마흔둘에 첫째, 마흔다섯에 둘째를 낳았다. 둘째는 올해 초등 4학년에 올라갔다. 25일이 총회란다.

"언니, 가방은 명품 아녀도 괜찮겠지? 매년 가는데도 매년 신경 쓰여."
"지금 에코백 좋은데? 요즘은 자연스러운 게 좋지. 근데 지금 어디 가?"
"피부과요. 며칠 안 남았잖아."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3월, 노산 엄마들에게 편견 없는 총회가 되기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고령임신#노산#학부모총회#반대표#총회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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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아이를 낳았다

(전) 공중파 방송작가, 카피라이터, 광고홍보 프로덕션 운영. (현) 브런치 작가로 활동 중 / 2025 국민이 함께하는 저작권 글 공모전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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