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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반포를 앞두고 두 학자가 중국땅을 밟은 이유에서 이어집니다.)
답사 사흘째인 지난 6일 금요일 오전, 우리 세 사람은 랴오양시 도서관을 찾았다. 황찬이 유배되어 신숙주·성삼문을 만났던 그 땅의 기록이 혹시 이 도서관 어딘가에 잠들어 있지 않을까, 그 기대 하나로 문을 두드렸다.
우리를 맞이한 이는 도서관의 부장이었다. 중국에서는 도서관 책임자를 '관장'이 아닌 '부장'으로 부른다고 장리메이 통역사가 귀띔해 주었다. 양핑롱 부장은 우리 방문의 취지를 듣자마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훈민정음을 설명하다
양 부장은 도서관 내 고전 자료 현황을 직접 도서관 곳곳을 안내하며 설명해 주었다. 랴오양의 지방지와 명대 관련 문헌들이 어떻게 숨쉬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권오향 박사가 먼저 반응했다.
"우리가 여태껏 고생한 게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어요. 엄청난 자료들을 눈으로 직접 보게된 것만으로도 여기 온 보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벽이 있었다. 고문서 자료는 중국 정부의 허가 없이 외국인에게 복사 제공이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양 부장은 솔직하게 설명했다. 더욱이 개화기 이전 고전 자료는 전시 공간이 아닌 별도의 고전 서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외국인이 공식 절차 없이 직접 열람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쉬움이 밀려왔다.

▲랴오양시도서관 전경 ⓒ 김슬옹
그러나 양 부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내용(황찬의 랴오양 내 위치, 당시 관직 구조, 조선 사신과의 교류 기록)을 자신이 직접 사료를 찾아 확인한 뒤 답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단순히 질문에 수동적으로 답하는 수준을 넘어, 자신도 이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자료를 조사해 보겠다는 말이었다. "우리 덕분에 대단히 흥미로운 역사 사실을 알게 됐다"라는 그의 말이 오래 남았다.
우리는 양 부장에게 준비해 간 <훈민정음> 해례본 영인본(복제본)을 전달하고 이번 방문의 학술적 배경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장리메이 통역사가 중국어로 옮겼다.
"1446년에 세종대왕과 8인(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이 집필하여 펴낸 <훈민정음> 해례본은 그 이전 해인 1445년, 두 학자 신숙주와 성삼문이 무인이자 행정관이었던 손수산과 함께 랴오양 땅을 여러 번 오가며 유배 중이던 명나라 음운학자 황찬(黃瓚)에게 한자음을 묻고 토론한 끝에 완성될 수 있었다. 한국의 실록과 신숙주가 남긴 보한재집 등 여러 사료에는 두 사람이 황찬을 찾아온 횟수가 1445년 무렵 13차례에 이른다고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 올해 2026년은 훈민정음 반포 580주년이자 한글날 제정 100주년이 되는 해다."

▲각종 자료를 설명하는 장면. ⓒ 김슬옹
양 부장은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는 특히 황찬이라는 인물에게 주목했다. 실제로 중국 역사에는 황찬(黃瓚)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두 명 존재한다는 점도 이 자리에서 확인되었다. 우리가 찾는 황찬은 명나라 중기 음운학자로, 길안 길수현 출신이며 유배 이후에도 이 지역에 남아 생활한 인물이라는 점을 권오향 박사가 명확히 짚었다.
대화는 학술 협력 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렀다. 양 부장의 태도는 분명했다. 랴오양시 도서관이 이 문제를 단순한 외국인 방문객 응대로 처리하지 않겠다는 것, 문화 전승과 역사 소급의 문제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의 방문을 기관 내부에 정식 보고하고, 이후 교류의 토대를 마련해 두겠다는 약속도 했다.
랴오양 박물관에서
이날 오후에는 랴오양 박물관을 찾았다. 이 자리에서 도서관의 양 부장과 박물관 부관장 사이에 전화 통화가 이루어졌다. 두 기관이 우리 일행의 방문 목적과 요청 사항을 공유하며 협조하는 모습이었다. 랴오양이라는 작은 도시 안에서 우리의 학술적 여정이 이미 하나의 작은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박물관에서는 명나라 시기 라오둥도사(遼東都司)의 관직 체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황찬이 유배 중에도 어떤 형태로든 관료 조직 안에 편입되어 있었을 가능성(권오향 박사가 이틀째부터 제기해 온 가설)을 뒷받침하는 단서들이 이 자료 속에 있었다. 신숙주 문집 <보한재집>에 보면 황찬을 만나러 13번씩나 간 이유가 다음 시에 묻어 나온다.
요동에서 한림 황찬이 개원위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왕새(王璽) 편에 편지를 부치다
신숙주
먼지에 묻힌 강탑은 닦는 이 없고 塵埋講榻無人掃
이슬 젖은 뜰에는 풀만 절로 가을이 드네 露重庭除草自秋
요양(라오양)성 북녘을 바라보며 試向遼陽城北望
멈춘 구름 지는 해에 그리움만 아득하구나 停雲落日思悠悠
개원위는 현재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카이위안시(開原市) 안에 있다. 명나라 때 설치한 위소(衛所) 제도의 군사 행정 단위로, 요양(遼陽)에서 북쪽으로 약 150~160km 떨어진 곳에 있다. 시의 문맥과 연결하면 흥미롭다. 신숙주가 요양성(遼陽城) 북쪽을 바라보고 쓴 것이 지리적으로 정확하다.
황찬이 유배지인 요양에서 개원위로 이동한 것인데, 개원위는 실제로 요양의 북쪽에 있다. 황찬이 왜 개원위로 갔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유배 중에도 이동이 있었거나 다른 공무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황찬이 유배인이고 통신이 인편 외는 안 되는 시절이니 쉽게 만나기 어렵고 허탕을 치기도 여러 번이었을 것이다.
황찬이 신숙주에게 써 준 '희현당시 서(希賢堂詩序)'라는 글에서 "그(신숙주)는 얼마 후 갔다가 한 달 남짓 되어 다시 왔는데 서로 주고받은 것이 간격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더욱 깊이 알 수가 있어 그때부터 착한 선비로 지목하게 되었고 그 후 돌아가려면서 당액(堂額)을 부탁하기에 드디어 '희현(希賢)'으로 명명하였는데 그것은 주자(周子)가 말한 '선비는 현인이 되기를 바라야 한다'한 뜻을 취한 것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갔다는 것은 요동에서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조선에서 요동까지 최소 두 번은 왔다 갔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황찬과 신숙주 일행과의 만남을 증언하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바로 황찬 제자 삼괴 소규(邵奎)가 남긴 기록이다. 그의 기록은 <삼괴선생집서(三魁先生集敍)>로, 놀랍게도 신숙주 손자 신종호가 엮은 <국역 고령세고>에 실려 있다. 소규에 의하면 정통(正統) 을축년(1445), 곧 자신이 15세 때 당시 요동에 유배 중이던 길수현 황의장(황찬)에게서 배우고 있을 때, 고양(高陽)의 신범옹(신숙주)이 공무로 요동에 이르러 머무는 집에서 글자를 묻고 가르침을 청하며 운학(韻學)을 질정했다는 것이다.
고령신씨연구소 신경식, 신규호 연구원에 의하면 여기서 '고양'은 신숙주 본관인 경상북도 고령을 의미한다. 고령군은 신라 경덕왕 때 고령군이 되었고 고려 현종 9년 영천현으로 행정명이 바뀌었는데 조선 태종 때 고양현과 영천현이 합해져 다시 고령현으로 되돌려졌다. 역사는 이렇게 얽히고섥혀 흐른다.
답사 사흘째를 마치며
랴오양시 도서관 방문은 애초 기대했던 것처럼 황찬의 위치를 지도 위 한 점으로 확정하는 자리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었다. 이 땅의 기록을 직접 찾아 우리에게 전해주겠다는 현지 연구자의 약속, 그리고 580년 전의 학문적 교류가 오늘의 한중 문화 협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의 문. 그것이 이날 우리가 열어 둔 것이었다.
신숙주와 성삼문도 그랬을 것이다. 황찬을 찾아 이 땅을 열세 번 오갔다는 기록은, 단번에 답을 얻지 못해도 다시 묻고 또 찾아가는 그 끈질긴 학문적 열망의 흔적이다. 우리도 그 첫 번째 방문을 마쳤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