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운 최제우 대신사 동상대구 달성공원에 건립된 수운 선생 동상은, 수운 대신사 순도(순교)100주년을 기념해서, 1964년 3월 10일 천도교에서 세웠다.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가슴에 얹은 모습은 하늘이 가슴 즉 마음에 존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다시 설명해서 시천주, 인내천을 상징하는 수운 선생의 사상이 깃든 동상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정부가 최제우에게 내린 법규는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이었다. 좌도란 유교의 종지(宗旨)에 어긋나는 다른 종교를 이르는 말이다. 조선왕조는 주자학 이외의 모든 학문과 사상, 종교는 '좌도'로 몰았다. 그러니까 좌도를 통해 국가를 어지럽혔다는, 시쳇말로는 '좌파반국가사범'쯤에 해당된다.
조정은 1864년 2월 29일 최제우를 좌도난정률로 단죄하면서 죄목으로 "동학괴수 최제우는 사술로써 질병을 고친다 하고 주문으로써 국가민족을 기만했으며 검가(검결)로써 국정을 모반했음으로 의당 처형하라."고 판결하였다.
그것도 국왕의 승하기여서 대왕대비가 묘당(廟堂)에서 품하여 처리하라는 명에 따라 효수형이 결정되었다. "동학은 서양의 요사한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이름만 바꾼데 질리지 않는다. 세상을 헷갈리고 어지럽혔으니 속히 엄벌을 내리지 않으면 나라의 법을 세울 수가 없다. (...) 최복술은 효수하여 경종하고, 강원보·최자원은 엄형 2차 후 절도에 정배보내 종신케 하고, 이내겸·이정화·박창욱·박응환·조상빈·조상식·정석교·백원수는 엄형 2차 후 원지에 정배보내고, 신덕훈·성일규는 엄형 1차 후 정배 보내고, 나머지 죄수들은 도신(道臣, 경상감사)이 처리하라."(<승정원일기>, 고종원년 3월 초2일조)
조정으로부터 효수하라는 명을 받은 대구감영은 남문 밖 아미산 아래 관덕정 앞에서 형을 집행하였다. 수운대선사는 갑자년(1864) 3월 10일 41세의 나이로 순도함으로써 동학(천도교)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고종이 취임하던 첫 해이다.
사흘이 지난 뒤에 순찰사가 선생의 처자를 불러 즉시 방면하여 시신을 거두도록 분부하였다.
그 때 염습(斂襲)을 한 사람은 김경숙·김경필·정용서·곽덕원·임익서·상주인 김덕원 등이다. 그 여타 죄인은 각기 각도와 각 읍으로 정배되었다. 백사길·강원보·이내겸·최병철·이경화·성일구·조상빈 형제, 박명중 숙질, 신영(新寧) 사람인 정생(丁生, 이름은 미상) 등이다.
그 나머지 방면된 사람은 이민순·박춘화이며, 영해 사람인 박생(朴生, 이름은 미상)·박명여는 그 때 옥사하였다.
선생의 큰아들 세정이 김경필·김경숙·김덕원으로 하여금 장차 관(棺)을 옮기려 하는데, 슬프고 슬프구나, 이 지경을 어찌 말로 하겠는가. 발행(發行)하여 자인현 서쪽 뒤 연못가 주점에 이르니, 날이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주인께 하루 묵어가기를 청하니 주인이 묻기를,
"어디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하였다. 세정이 말하기를,
"대구에서부터 옵니다." 하니, 주인이 그 사실을 알고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비통해 하며 방 가운데로 시신을 들게 하고, 다른 행객은 한 사람도 받지 않았다.
시체에 따뜻한 기운이 있어, 혹시 요행히 회생을 할까 하여, 사흘 동안 영험이 있기를 기다려, 시신을 지키며 머물렀다. 쌍무지개가 연못에서 일어나 하늘로 이어졌고, 하늘에 구름과 안개가 일어 연못을 둘러싸고 집을 둘러싸, 오색영롱함이 사흘이나 가리고 있었다. 선생께서 상천(上天)하여 구름과 무지개가 걷히고, 그 뒤 시신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여 다시 염습을 하였다.
다음날 길을 떠나 용담에 이르니, 선생의 장조카 맹륜이 뒤따라와 용담 서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윤석산 역주, <도원기서>, 103~107쪽)
최시형은 교조의 옥중 명에 따라 멀리 피하여 체포되지 않아 화를 면하였다.
덧붙이는 글 | [횃불·촛불·응원봉, 동학농민혁명]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