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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재밌네요."
"더미북 아홉 개를 차례로 다 읽은 관람객이 있었어요. 꽤 긴 시간 동안요."
카페 한쪽에 전시된 투박한 그림책을 본 관람객들의 반응이다. 놀이가 더 즐거운 초등학생부터 육아에 지친 주부, 생업에 바쁜 자영업자, 제2의 삶을 살아가는 은퇴자까지 책과 거리가 멀었던 소시민 아홉 명이 함께 만든 책이다.

▲전시 모습원판 그림과 더미북 아홉 개 그리고 책 ⓒ 신극채
주변 이야기를 쓰라는 평범한 조언
지난해 4월, '세종책문화센터'에서 주관하는 출판 체험 동아리 모집 안내문을 우연히 마주쳤다. 혼자라면 어림없었을 도전의 시작이었다. 첫 고민은 '무슨 이야기를 쓰나'였다. "그저 주변 이야기를 쓰세요"라는 평범한 조언은 뭔가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게 했다. 자연과 바람을 주제로 카카오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썼던 글을 다듬어 초안을 내놓자, 동아리원들은 직접 낭독하기를 원했다.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소나무는 잎을 흔들고 소리를 내어 인사를 건넸어요."
이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주인공인 바람의 이름은 바람 종류 중 하나이자 줄거리와도 어울리는 '산들'로 정했다. 그림을 맡아 그려준 딸은 바람을 형상화하여 캐릭터로 그리는 대신 지나간 흔적으로 묘사하자고 했다. 덕분에 보이지 않는 바람에 대한 투박한 글은 딸이 그린 섬세한 선을 타고 근사한 이야기가 되어 갔다.
각자의 글과 그림이 완성되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엄마 대신 초등학생 딸로 교체되고, 한 명은 직장 일로 빠지기도 했다. 큰 병을 얻어 모임에 나오지 못했으나 끝내 글을 완성한 이도 있었다. 인디자인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아홉 개의 글과 그림을 편집하고 하나로 묶는 작업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책문화센터에서 초빙한 전문가의 세 시간 강의로는 부족했다. 그럼에도 책은 완성되었다. 그림과 글의 배치와 조화가 어색하거나 오타도 발견되었다.
서툰 사람들이 만든 거친 책이지만 ISBN 식별번호가 찍힌 어엿한 책이기도 했다. 모든 과정을 이끌고 표지 디자인과 머리말까지 맡아준 동아리장이 있어 책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전시장에서 이 책을 가져가려 한 사람이 있었다는 후일담을 듣고 가치를 인정해 준 그가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다. 제본된 책을 받은 것으로 긴 여정이 끝나는가 싶었으나 전시회를 하자는 제안으로 다시 들썩였다. 그림책을 만드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전시회를 여는 것도 생소해서 호기심과 흥미가 생겼다.
책장을 넘기는 잊지 못할 '손맛'
'더미북(dummy book)'은 단어조차 낯설었다. 정식 출간 전 가제본으로 만든 실물 책이었다. 앞서 한 권으로 묶은 책은 더미북 없이 만들었지만, 전시를 위해 각자 이야기를 더미북으로 만들자는 의견이었다. 더미북을 만들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으나 만드는 방법을 배우느라 완성하지 못하고 집으로 가져왔다. 몇 시간 전에 배웠는데도 헷갈렸다. 이를 예상이라도 한 듯 동아리장은 제작법을 그림으로 그려 단체 대화방에 올려주었다.
인쇄된 면을 안쪽으로 향하게 반으로 접고 뒷면에 풀을 칠했다. 반쪽과 다른 반쪽을 이어가며 붙였다. 다 붙이고 풀이 마르자 한 장씩 넘겨보았다. 그제야 왜 두꺼운 종이여야 하는지 이해되었다. 두꺼워야 풀칠해도 울지 않고 팽팽한 책장을 넘기는 손맛이 느껴졌다. 낚시나 골프의 손맛과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다. 또한 책 표지가 여유롭게 펼쳐지게 하려면 책등을 넓게 해야 한다는 사실도 온몸으로 깨닫는 과정이었다.
모두 더미북을 만들어 단체 대화방에 올렸다. 책 가장자리를 가지런히 자르기 위해 어렵게 재단기를 빌렸으나 책 두께가 얇아 고정 시킬 수 없어 오히려 엉뚱하게 잘렸다는 실수담도 올라왔다. 그래도 표지를 반짝거리는 재질로 하거나, 마치 앙리 마티스가 말년에 색종이를 오려 붙여 작품을 만든 것처럼 꾸며 멋을 내기도 했다.

▲책과 방명록전시된 책과 더미북, 소중한 글과 그림이 남겨진 방명록 ⓒ 신극채
완벽하지 않아도 웃는 이유
전시장 섭외와 꾸미기에도 여러 사람이 헌신적으로 참여했다. 먼 곳에 살면서도 카페를 다니며 의사를 타진하고 일정을 조율했다. 긴 탁자나 테이블보는 집에 있는 물건이 아니라서 고민이었다. 딸이 대신 참여하게 된 이가 이런 물품을 조달하고 전시장 꾸미기에도 참여하며 엄마의 힘을 보여주었다.
드디어 지난 2월 21일, 전시하는 날이 왔다. 전시 전날 책을 전시하면서 "이거 진짜 우리가 만든 거 맞아요?"라며 너스레를 떨고 격려도 했다. 막상 당일이 되니 관람객의 반응이 궁금하면서도 걱정이 밀려왔다. 정작 어린 학생은 자기 책을 낸 기쁨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를 마주하고서야 1년 동안 함께 만든 책을 독자 앞에 내놓는 설렘에 나도 따라 웃었다.
지난 2월 28일, 전시회 마지막 날에 우리는 다시 모였다. 책을 보는 관람객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며, 올해도 동아리 모집 신청서를 제출하기로 다시 마음을 모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