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전 대통령 윤석열에 대한 내란 우두머리 혐의 재판에서 지귀연 부장판사가 선고 요지를 설명하고 있다. ⓒ 서울중앙지법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라는 법언이 있습니다. 정의를 부인(deny)하는 것과 지연(delay)하는 것을 동일선상에 놓는 이 오래된 법언이 요즘처럼 무겁게 다가온 적이 없습니다. 지귀연 재판부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죄를 인정하면서도 '계엄군의 물리력 자제'라든가 '내란 계획의 미비함', '인명 피해가 없는 결과론적 정상' 같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양형을 낮추는 사법적 타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제 피해 여부와 상관없이 시도만으로 이미 발생한 공동체의 위기를 애써 외면한 결과론적 해석이며, 내란 행위 자체에 내포된 치명적인 위중함을 축소 해석한 논리적 모순입니다. 법이 타락한 권력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묻는 대신, '초범'과 '고령'을 들이대며 기계적 형량 산출 제도 뒤에 숨어버린 것도 문제입니다.
법학자가 아닌 시민의 눈으로 봐도, 이 판결이 '정의의 총량'에 부합한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1996년 전두환 전 대통령 판결이 보여주었던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법치주의의 역동성은 간데없고,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정치적 대립 속에서 지극히 방어적인 '사법적 최소주의'에 함몰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사법부 스스로 사법의 정치화를 부추긴 건 아닌지 심히 우려됩니다.
'위험사회'에서 마주친 사법부의 '조직화한 무책임'
법치주의의 역동성을 상실한 우리 사법부의 모습은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의 징후로 꼽은 '조직화한 무책임(Organized Irresponsibility)'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이는 사회적 재난이나 중대한 범죄가 발생했을 때, 국가 기관이 형식적인 법 절차와 전문가적 논리 뒤에 숨어 그에 대해 누구도 최종 책임을 지지 않는 현상을 뜻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무책임이 개인의 실수나 성향에 불과한 게 아니라 '조직화'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즉, 파편화된 법적 장치와 제도적 절차들이 오히려 책임의 주체를 증발시키고, 시스템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구조적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번 전 대통령 윤석열씨에 대한 내란 우두머리 1심 선고가 보여준 사법적 타협과 최소주의는 바로 이러한 제도적 무책임의 발현입니다.
실제로 내란이라는 국가적 재앙 앞에서 재판부는 '법리 해석'과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갑옷을 둘렀지만, 정작 그 안에는 정의의 준엄함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헌법 파괴라는 비상 상황을 평상시의 일반 범죄 다루듯 해석하며 내란의 본질을 지워버림으로써, 재판부가 마땅히 내려야 할 규범적 결단을 회피한 것입니다. 재판부는 이렇게 공동체의 보편적 상식 대신 완고한 진영 논리가 만들어낸 정치적 대립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사법적 무기력'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사법의 독립이 아니라 사법의 회피이자 규범적 직무유기입니다.
이는 헌법적 결단이 필요한 결정적인 순간마다 사법 시스템이 스스로 무책임을 생산하는 구조적 결함으로 굳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최근 사법농단 사건에 대해 '직무 권한이 없으므로 남용도 없다'는 기술적 법리로 면죄부를 주거나, 이태원 참사와 같은 거대한 국가 시스템의 실패 앞에서도 '구체적 주의 의무'를 좁게 해석해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 사법의 무력함을 목격했습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우리의 사법 제도가 어떤 이유로든 정의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공론장과 실천적 성찰
사법 시스템이 고유의 책무를 방기할 때, 민주주의는 그 존립을 위해 법정 밖의 더 근원적인 동력을 소환하기 시작합니다. 현대 숙의민주주의의 거장 하버마스는 민주적 법치국가가 끊임없는 '자기 성찰적 담론'을 통해 법의 정당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사법부의 판결이 사회적 타당성을 상실했을 때 그 빈틈을 메우고 시스템을 다시 성찰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 '성찰적 공론장'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론장의 역동성은 시공간을 넘어 위기의 순간마다 발휘됐습니다. 멀게는 19세기 말 프랑스를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이 그 선구적 사례입니다. 군 당국과 사법부가 '국가 안보'와 '군의 명예'라는 성역 뒤에 숨어 진실을 은폐했을 때, 에밀 졸라로 상징되는 지식인과 시민들의 비판적 공론장은 1906년, 마침내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 대위의 복권을 끌어냄으로써 사법적 기만을 무너뜨리고 법의 권위를 재정립했습니다.
이어서 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나치 부역자들을 향해 '국민적 부적격(Indignité nationale)'이라는 특별한 법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는 전시에 국가 공동체의 가치를 저버린 자들에게 법적 처벌을 넘어 모든 공민권을 박탈하는 '시민적 죽음(Mort civile)'을 선고함으로써, 무너진 국가 기강을 공론장의 합의로 바로 세운 사례입니다.
이런 일은 바다 건너 아르헨티나에서도 이어집니다. 사법부가 1980년대 후반 사면법 등을 이유로 군사평의회 시절(1976-1983)의 학살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었을 때, 시민사회는 가해자들의 위선적 일상을 폭로하는 '에스카라체(Escrache, 폭로 단죄)'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시민들의 끈질긴 요구는 결국 사법 체계를 움직여, 2005년 가해자들에게 투표권과 공직 취임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박탈하는 '이나빌리타시온(Inhabilitación absoluta y perpetua, 자격 박탈)'을 끌어냈습니다.
이처럼 시민들이 공론장에서 발휘하는 성찰의 힘은 단순한 비판을 넘어 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교정하고 발전시키는 핵심 동력이 되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정수는 사법부의 오만과 남용을 시민의 힘으로 교정해온 바로 우리 자신의 기록입니다. 1995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사법부가 스스로 정의를 회피했을 때, 시민의 힘으로 끌어낸 5·18 특별법 제정과 1996년의 역사적 단죄가 그 증거입니다. 2017년 사법부 내부의 폐쇄적 권력 남용을 성찰적 개혁의 대상으로 끌어올린 '사법농단 고발' 역시 궤를 같이합니다.
역사는 법정보다 준엄한 판결을 준비합니다
성찰적 공론장이란 법과 제도가 멈춰 선 자리에서 시민들이 비판적 담론을 통해 시스템의 결함을 교정해 나가는 역동적인 자정 기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특정 진영의 이익을 위해 사법부의 정의를 부정하는 도구가 되어서도 안 되거니와, 될 수도 없습니다. 성찰의 준거점은 오로지 헌법적 보편성과 객관적 사실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편성이란 '우리 편에게 유리한가'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헌법적 원칙인가'를 묻는 태도이며, 객관성이란 선동적 구호가 아닌 증명된 사실의 토대 위에서만 비판의 칼날을 세우는 이성적 절제입니다.
내란과 같이 민주공화국의 심장을 겨누는 반헌법적 중죄는 물론, 법치 시스템이 시민의 상식과 유리되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모든 규범적 공백의 순간에, 사법부가 담아내지 못하는 사회적·역사적 무게를 시민사회의 비판적 이성이 공론장에서 보완하고 재확인하는 것이 성찰적 공론장의 기능입니다. 따라서 성찰적 공론장은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법치주의가 권력이나 진영 논리에 휘둘리지 않도록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이자 가장 강력한 방어기제입니다.
이번 판결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사법부가 내린 형벌이 우리의 집단 이성과 조응하지 못할 때, 시민사회는 실천적 공론을 통해 규범적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법정의 판결을 역사적 정의로 승화시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내일을 써가는 주인공은 결국 성찰하고 행동하는 우리, 공론장의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 은재호/정치행정학자 |
| 은재호는 프랑스 고등사범학교(ENS-Paris Saclay)에서 프랑스 정책변동 연구로 정치학(정책학 전공)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국무총리 소속 한국행정연구원에 재직하며 한국갈등학회장과 다수 정부 부처의 갈등관리심의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현재는 국가교육위원회와 국민통합위원회 위원, 한국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로 일하며 연구 현장과 정책 현장을 이어주는 정책 중개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디자이너'를 참칭하는 그의 저서로는 <사회갈등 해소를 위한 국민통합 전략과 실행방안 연구>(2017), <혁신적 포용국가의 국가론적 지위와 이행전략>(공저, 2019), <공론화의 이론과 실제>(2022), <경세제민의 공공리더십>(공저, 2024) 등이 있습니다. |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은재호는 정치행정학자입니다. 이 기사는 굿모닝충청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