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인권 365 ? 아동권으로 읽는 동화와 질문〉은 익숙한 동화를 아동의 문제가 아닌,어른과 사회의 책임을 묻는 텍스트로 다시 읽는 연재입니다.

▲<벌거벗은 임금님> AI이미지.우리는 아이에게 용기를 가르치는 이 동화를 읽어주며, 정작 현실에서는 눈치를 보라고 속삭이고 있지는 않은가. ⓒ 서정은
어린 티를 이제 막 벗은 듯한 세 명이 들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식사 마칠 때를 기다렸다가 말을 걸었다. 요즘 관심사가 무엇인지, 지금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물었다. 대화 말미에 "혹시, 어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나요?"라 묻자, 한 아이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딱히 할 말이 없어요." 어째서인지 되묻자 다른 아이가 답한다. "제가 말한다고 어차피 바뀌지 않을 거 알고 있으니까요."
3월이면 중학교 2학년이 되는 아이들이라 했다. 아이들은 자신의 발언이 영향력이 없다는 사실을 내게 말해 주었다. 너무 비관적인 것 아니냐는 반문에 아이는 도리어 나를 교정해 주었다. "아니에요. 이건 현실적인 거예요." 또박또박 말하는 아이들 얼굴엔 냉소조차 없다. 진지하고 건조한 대답이다. 무엇이 이 아이들로 하여금 침묵을 '현실적'이라 믿게 했을까.
침묵은 무능이 아니라 '계산된 전략'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을 다시 펼쳐보자. 이 동화는 어리석은 임금과 이를 속여먹는 사기꾼 중심이다. 우리는 거짓말과 위선에 대한 교훈으로 이 동화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눈여겨 봐야 할 점은 따로 있다. 신하와 백성들의 '계산된 침묵'이다. 그들은 임금의 알몸을 보고도 진실 앞에서 침묵한다. 이들은 "알면서도 왜 고(告)하지 않았을까?" 이 글은 그 질문에서 시작하였다.
흔히 생각하듯이, 이들이 입을 닫은 것은 상황을 몰라서도 어리석어서도 아니다. 진실을 말하는 순간 잃게 될 지위와 안전을 계산하였다. 결국 불이익이 발생하는 구조에서 침묵은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 봐야 한다. 그 결과 다수가 침묵하는 순간 말도 안되는 권위라도 권위는 강화된다. 권위는 설득이 아니라 계산된 침묵으로 유지된다.
혹자는, "왜 아무도 말하지 않았는가?"라며 신하와 백성(군중)의 비겁함을 탓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침묵의 원인을 개인의 용기 부족으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은 이 침묵이 발생하게 된 '구조'를 우리가 볼 수 없도록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따로 있다. "왜 말하면 위험한가"와 "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가"이다.
동화속 아이는 용감한 것이 아니라 규칙을 모를 뿐이다.
벌거벗은 채 임금님이 가두행렬을 했을 때 한 아이만이 진실을 말한다. 아이가 특히 용기가 많고 특별한 성품을 가져서인가. 아니다. 동화 속 아이가 '벌거벗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공동체가 공유하던 침묵의 규칙을 아직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언제 말해야 손해인지, 언제 침묵해야 안전한지, 언제 모른 척해야 살아남는지 말이다. 동화 속 아이의 외침은 위대한 용기라기보다, 아직 사회적 손익 계산에 익숙해지지 않은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이즈음 되면, 우리는 갈등해야 마땅하다. 이 아이처럼 용기내어 외치라 할지, 아님 침묵하라고 할지 말이다.
아이가 사회적 손익 계산을 익히는 구조는 가정, 학교와 사회다. 사회적 규칙은 아주 사소한 순간에 전수되고 완성된다. 최근 다시 불붙은 학생 교복 자율화 논쟁은 이 부분을 정확히 보여준다. 학생 교복 논쟁은 수년 전부터 있어왔다. 아이들도 불편함을 호소하고 인권위가 권고할 때는 요지부동이던 사회였다. 그러나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교복은 등골 브레이커'라는 발언에 비로소 정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 현상에서 어떤 것을 배울까. 당사자들이 수만 번 "그게 아니다, 벌거벗었다"라고 외쳤고 그것을 무시하며 침묵하던 행렬이다. 하지만 권력자의 말에 비로소 술렁이는 장면을 목격한다. 당사자의 반복된 요구가 구조를 움직이지 못하고, 권력자의 발언이 변화의 계기가 되는 장면이다. 그럼으로 아이들에게 영향력의 위계를 학습시킨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권력)구조 뒤로 묻힌다. 이러한 과정은 아이들에게 "너희의 외침은 가성비가 없으니, 돈과 권력을 가질 때까지 침묵하라"는 교훈을 학습하게 만든다.
'
말의 가성비'가 떨어진 민주주의
유엔 아동권리협약(CRC) 제12조는 아동의 참여권을 명시한다. 특히 일반논평 제12호(2009)는 아동의 의견이 단순히 청취되는 것을 넘어 결정에 '정당한 비중(due weight)'을 가지고 반영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마이크 쥐여줬고 네 의견 말할 기회 줬으니 됐지?"가 아니다. 말할 기회만 주고 정작 결과에 반영하지 않는 것은 참여권의 본질적 훼손이라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정치심리학에서 말하는 '정치적 효능감'과 관련지을 수도 있다. 아이들의 언어로 바꾸면 '말의 가성비'다. 내가 한 말이 현실적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데 기여했다는 확신이 있을 때 사람들은 입을 열어 말을 한다. 반대로 참여가 형식에 머물고 의견이 허공에서 흩어질 때, 아이들은 '민주주의의 부도'를 경험한다. 효능감이 무너진 개인은 참여를 중단하고 참여가 중단되면 민주주의는 형식만 남는다. 올 초 우리나라 아동의 79.5%가 정부의 아동정책기본계획이 아동·청소년의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안 되거나 모르겠다고 응답했다(세이브더칠드런, 2026). 굳이 멀리 갈 것도 없다. 식당에서 만난 아이들이 보여준다. 아이들은 개인적 체념이 아니라, 말해봐야 투자해도 돌아올 것이 없다는 냉정한 경험치의 결과를 갖고 있다..
용기를 요구하는 사회는 이미 안전하지 않다.
이런 아이들에게 우리는 용기를 내어 말하라고 한다. 교실에서는 교사의 지시 앞에, 가정에서는 보호와 통제 아래서 말이다. 우리는 아이가 권리를 주장하면 '버릇없다'고 치부한다. 입을 다물고 분위기를 살피면 '철들었다'며 안도한다. 우리는 아이에게 진실을 말할 용기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눈치'를 미덕으로 강요한다. "분위기 좀 봐가면서 말해", "맞는 말이지만 굳이?"라는 말들은 아이들에게 낄끼빠빠(낄때끼고 빠질때 빠져)를 유능함으로 믿게 만든다. 하지만 눈치가 진실을 압도하는 순간 권리는 흩어진다. 아이는 내용보다 결과를 먼저 계산하며 손을 들어 말하기 전에 평가와 관계에 미칠 영향부터 따진다.
말할 자유는 개인의 성품이나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롭게 말할 조건이 없는 사회에서 말하는 용기는 곧 위험을 홀로 감내하라는 말이다. 말할 자유는 반드시 '보호 조건'과 함께 존재해야 한다. 현실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다.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맞선 공익제보자를 보며 박수치고 한편으로는 그의 앞날을 걱정한다. 우리가 가진 이중적 시선은, 아이가 교실에서 손을 들 때 느끼는 불안과 정확히 겹친다.
이제 멈춰서 다시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의 용기를 칭찬하면서, 용기가 필요 없는 조건을 만들 책임은 회피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용기를 말하면서도, 용기가 필요한 비정상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동화를 다시 읽는 이유는 아이에게 교훈을 주기위해서라기보다 어른이 어떤 질문을 멈춰야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아닐까 싶다. 아이에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혹은 "왜 아이만 용감했을까"를 묻기 전에, 우리는 먼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사회는, 이 교실은 그리고 이 집은 아이가 말해도 정말 괜찮은 곳인가. 아이의 말로 조금이라도 변했는가"
동화는 '벌거벗었다'고 말한 아이의 이후를 말하지 않는다. 난 그 다음이 궁금하다. 그 아이는 다음 날에도 손을 들었을까? 주변 어른들은 그를 보호했을까, 아니면 "눈치 없는 아이"로 기억했을까? 침묵에 익숙한 어른들이 박수치는 임금님의 행렬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행렬은 지금도 3월의 교실과 가정 그리고 우리 사회의 한복판을 유유히 지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사단법인 3P아동인권연구소와 개인SNS페이지와 개인 SNS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