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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설악산 입구의 한 작은 카페. 이곳에선 여느 카페와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커피 향을 따라 들어오지만, 이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벽면을 가득 채운 사진들이다. 바위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깎아지른 암벽과 거대한 암반, 깊은 계곡 위로 피어오르는 운무의 순간들이 생생하게 펼쳐져 있다.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산의 풍경이 이곳에서는 숨결처럼 살아 움직인다.
이 카페는 단순한 휴식 공간을 넘어선다. 산과 사진이 만나는 작은 전시관이자, 산을 사랑하는 이들이 잠시 머물러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가 된다.
이 특별한 공간은 한국 최초의 여성 클라이밍 사진작가, 강레아(59)씨의 손길이 깃든 곳이다. 설악산을 품은 작업실 겸 카페에서 그는 오늘도 바위와 바람, 그 속에 깃든 산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풀어낸다. 초록 기운이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4월 둘째 주, 그를 만나 그의 삶과 사진, 그리고 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카페 벽에 걸린 자신의 사진작품을 바라보는 강레아 작가 ⓒ 진재중
커피향을 넘어, 마음이 머무는 공간
이 카페의 시간은 조금 다르게 흐른다. 주인은 커피를 내리는 손보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더 익숙하다. 사진 한 장을 꺼내 들면 그 속에 담긴 산길의 굴곡과 촬영 순간의 긴장, 스쳐 지나간 바람과 빛의 결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손에 들린 커피는 자연스럽게 식어가고 사람들은 어느새 이야기 속 풍경에 깊이 빠져든다.
이곳의 사진은 단순한 풍경 기록이 아니다. 산을 사랑하지만 오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대신 걸어주는 길이 되고 바람을 맞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상상의 숨결이 된다. 방문객들은 사진 앞에 멈춰 서서 보이지 않는 바람과 들리지 않는 산의 소리를 마음속으로 그려본다.
흑백의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여백은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을 불러내고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장면들은 각자의 기억을 건드린다. 이곳에서는 커피보다 오래 남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진이 남긴 감정의 잔향이며 결국 스스로의 마음과 마주하게 되는 시간이다.
카페 내부는 작은 미술관을 떠올리게 한다. 벽면을 채운 다양한 사진과 곳곳에 놓인 식물 화분이 공간에 생기를 더한다. 사방의 통유리를 통해 설악산의 기암과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흑백 사진들은 설악의 장엄한 순간을 포착하며 공간 전체를 하나의 갤러리로 완성한다.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을 남긴다. 나무에 매달린 수많은 글귀들에는 "영원한 산악이여, 작가여 영원하라"는 경외와 응원이 담겨 있고, "산이 그리울 때 다시 오겠다"는 그리움과 약속도 함께 남아 있다.

▲방문객들이 남기고 간 추억의 글들이 모여, 그 공간을 지나간 사람들의 이야기와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 진재중

▲카페 벽면에는 따뜻한 격려와 찬사의 문구들이 가득 걸려 있어, 공간 전체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퍼지고 있다. ⓒ 진재중
여명 속에서 시작된 사진가의 꿈
작가는 스스로를 "검은색이 없는 눈꽃 세상에서 자란 사람"이라 칭한다. 전북 무주의 깊은산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겨울이면 늘 하얗게 눈 덮인 산속에서 자랐다. 그에게 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삶의 배경이자 뿌리였으며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안식처이자 힘들 때 기대는 버팀목이었다.
"저는 깊은 산골에서 자랐습니다. 사방이 산과 나무로 둘러싸인 마을이었죠. 숲의 냄새와 바람 소리 속에서 자연과 함께했던 어린 시절은 지금 돌아봐도 큰 축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그는 산골을 떠나 서울로 왔다. 비교적 여유 있는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자연스럽게 도시에서의 학업을 시작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고향의 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몸에 밴 자연의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해졌다. 서울은 새로운 기회를 열어준 동시에 자신의 뿌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공간이 되었다.
열아홉 살, 그는 산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산악회 활동을 하며 가야산에 올랐다. 겁 없이 나선 산행이었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과는 전혀 다른 깊이의 산을 처음 마주했다. 새벽 3시, 어둠을 뚫고 정상에 섰을 때 그는 극심한 체력 고갈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만큼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그러나 해가 떠오르기 직전, 능선을 따라 번져오는 여명의 풍경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어린 시절 늘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산은 정상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졌고 익숙했던 풍경은 낯설고도 신비로운 존재로 다가왔다.
"마치 무지개빛처럼 영롱한 색상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죠."
그는 그때의 기억을 또렷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단순한 풍경 이상의 경험이었다고 덧붙인다.
"그 순간, 산이 가진 기운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오묘함을 다시금 느끼게 됐어요. 자연이 주는 힘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달았죠."
짧은 순간이었지만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특별한 기억이었다. 그는 그날을 떠올리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새벽, 능선을 따라 스며드는 남빛과 주홍, 선홍의 기운이 황토의 결 속에서 군청과 귤빛, 붉은 빛으로 어우러지며 오묘하게 번져갔고 빛은 숨을 쉬듯 색을 바꾸며 신비롭게 피어났다. 그 장면 앞에서 그는 순간을 붙잡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고 이를 계기로 산의 찰나를 사진으로 기록하려는 마음이 내면에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강레아 작가가 렌즈에 담아내는 순간의 몰입은, 상상을 넘어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깊은 여정을 보여준다 ⓒ 강레아
셔터를 누르며 시작된 새로운 삶
산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던 시기, 그는 대학에서 의상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었다. 소재의 질감과 특성을 이해하고 디자인으로 미적 표현과 기능을 구현하는 과정 속에서 그의 관심은 점차 또 다른 형태로 확장되어 갔다. 재학 중 웨딩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처음 카메라를 잡은 그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 전혀 새로운 감각을 경험했다. 사람의 표정과 빛, 그날의 시간을 한 장에 담아내는 일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순간을 붙잡는 특별한 일이었다. 사진을 본업으로 삼으면서 일에 대한 그의 태도 역시 달라졌다. 소중한 순간을 기록하는 일의 무게를 깨달은 그는 더 깊이 배우기 위해 다시 공부를 결심했고, 결국 대학 사진학과에 진학했다.
이후 카메라는 그의 일상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그 인연은 지금의 그를 만들어냈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과정이 이어져서 지금의 작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나하나의 선택이 결국 지금의 저를 만든 셈이죠."
그는 자신의 길을 '우연처럼 시작된 필연'이라 표현하며 지나온 시간을 담담하게 들려준다.

▲카페 벽면을 채운 암벽과 소나무의 흑백사진이 하얀 벽과 어우러지며, 고요하면서도 깊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 진재중

▲벽면에 걸린 사진을 설명하는 작가강레아 작가는 산을 처음에는 우연히 마주한 대상처럼 느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반드시 마주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존재로 인식한다. ⓒ 진재중
암반등반의 위험과 추억
그리고 결국 그는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카메라의 무게를 짊어진 채 이어가는 등반 촬영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등반자들을 렌즈에 담는 순간, 그 모든 부담은 사라지고 깊은 몰입이 시작되었다. 매 순간 펼쳐지는 장면들은 그를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로 이끌고 있었다.
그에게 암반은 위협적이면서도 존엄한 존재였다. 거대한 바위벽 앞에서는 인간이 한없이 작아졌다. 그는 늘 긴장과 경외 사이에 서야 했다. 몸을 지탱해 주는 자일은 단순한 장비가 아니라 생명줄이었다. 그것을 놓는다는 것은 곧 허공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것과 같았다.
인수봉에서의 한 순간은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잠시 바위에 몸을 기대고 숨을 고르던 찰나, 마치 허공으로 떨어질 것 같은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 그는 문득 깨달았다.
"아, 지구가 살아있는 존재구나."
그는 말한다. 일에 대한 깊은 몰입이 없었다면 이미 등반을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누구보다 강하게 몰입했던 그는 아픔과 상처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선인봉 소나무험준한 암반에 깊이 뿌리내린 소나무, 그 곁에 몸을 맡긴 산악인. 자연의 강인함과 인간의 도전이 맞닿으며, 고요 속에 묘한 조화를 이루는 순간을 작가는 포착했다. ⓒ 강레아
암반 위에 뿌리내린 삶, 소나무에서 발견한 버팀의 의미
작가의 시선은 점차 사람에서 자연으로 옮겨갔다. 그 변화의 출발점에는 북한산 인수봉 오아시스 바위턱에 서 있던 한 그루 소나무가 있다. 흙 한 줌 없는 암반 위에서 뿌리를 내리고 바위를 뚫으며 살아가는 그 모습은 그에게 기적처럼 다가왔다. 그는 소나무를 통해 '환경'과 '버팀'이라는 의미를 발견했다. 척박한 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생을 이어가는 힘, 그리고 그 뿌리에 의지해 암벽을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소나무는 더 이상 식물이 아니라 극한을 견디며 누군가를 지탱하는 존재로 다가왔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끝내 살아남고 누군가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모습... 그게 바로 소나무였습니다."
이후 그의 시선 속에서 소나무는 점점 인간과 닮아가기 시작했다. 바람과 눈, 비를 견디며 절벽에 서 있는 모습은 마치 한계에 맞서 버티는 인간의 형상과 겹쳐졌다. 그는 사람을 대하듯 그 나무들을 사계절 내내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의 사진 속 소나무는 자연을 넘어 시간을 견딘 또 하나의 생명으로 자리 잡았다.
운무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소나무의 풍경은 더욱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장면은 혹독한 겨울을 견디는 존재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긴 고독의 시간을 버텨낸 뒤에야 비로소 맞이하는 봄, 그리고 그 시간을 지탱하는 힘은 결국 화려한 세상의 인정이 아니라, 나를 기억해 주는 단 한 사람의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소나무는 살아 있는 생명체였고, 저에게는 대화의 상대였어요."
깊이 몰입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그는 다시는 그만큼의 몰입을 경험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만큼 소나무와 마주한 시간은 특별했고 살아 있는 존재와 교감하는 순간들이었다.

▲인수봉 소나무사진 속 소나무는 단순한 자연을 넘어, 긴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또 하나의 생명처럼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깊은 존재감을 강레아 작가가 사진으로 담아냈다. ⓒ 강레아
고요 속에서 마주한 한 그루, 자연과의 깊은 교감
"입산 통제가 아니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오갔을 텐데, 그날은 오직 저 혼자였어요. 혼자서 소나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부여받은 게 정말 행운처럼 느껴졌죠."
그는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촬영지로 북한산 만경대를 떠올리며 그날의 고요와 특별한 시간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전날 밤 홀로 입산한 그는 차 안에서 잠을 청한 뒤 새벽에 산에 올랐다. 곧 눈이 쏟아지며 입산이 통제됐고 산에는 그 혼자만 남았다. 짙은 운무 속에서 오직 한 그루 소나무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다섯 시간 동안 그 나무 앞을 지키며 마치 대화를 나누듯 바라보았다. 그 순간, 사진가에게 기다림이란 기술이 아니라 태도임을 다시금 깨달았다고 회상한다.
"운무에 갇혔다가 사라지면 다시 나타나고 숨었다가 또 모습을 드러내는 그 모습이... 마치 저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어요.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듯한 느낌이었죠."
그는 운무 속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것이 마치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깊은 교감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는 그 순간을 단순한 기억이 아닌 자연과의 깊은 교감으로 기억한다. 고요 속에서 마주한 그 시간은 지금도 그의 작업 세계에 잔잔한 울림으로 남아 있다.

▲만경대 소나무오랜 시간을 견디며 포착한 찰나의 순간이 작품으로 승화된 장면, 그 안에 기다림의 미학이 고요히 드러난다. ⓒ 강레아
경계 위의 기록, 기다림으로 완성된 순간들
안개, 눈, 암벽은 그의 사진에서 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대부분의 작품은 악천후 속에서 탄생했다. 암벽 위 좌우로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다른 요소를 배제하고 장면을 정리하는 방법은 오직 눈, 비, 구름뿐이었다. 날씨가 자연스러운 장막이 되어줄 때까지 그는 같은 장소를 수십 번씩 찾았다. 결국 그의 사진 작업은 단순한 등반이 아니라 긴 시간 견디며 기다리는 행위에 가까웠다.
"죽을 고비를 정말 많이 넘겼습니다. 어제의 일을 잊게 하는 '망각'이라는 병 덕분에 오늘까지 암벽 사진을 계속 찍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는 환하게 웃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 속에서 사진을 찍는 경험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가 암벽등반을 시작한 이유는 바로 찰나의 순간을 담기 위해서였다. 암벽에 매달린 사람들, 기댈 곳 없이 바위에 뿌리내린 소나무, 그 위를 스치는 안개의 풍경까지. 그는 암벽에 몸을 맡긴 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후 산악 전문지에서 약 15년 동안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수많은 클라이머들의 순간을 기록해왔다.

▲설악의 숨결폭포와 안개, 암반이 어우러져 설악의 숨결처럼 다가오는 순간을 담은 장면이다. ⓒ 강레아
우연에서 시작된 길, 동반자와 함께한 예술의 여정
사실 그의 삶의 방향은 화백인 남편을 만나면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림으로 삶을 이어가던 남편은 어느 날 조용히 제안했다.
"사진작가로서 한 번 살아보는 게 어떨까."
그 말은 거창한 권유라기보다 함께 삶을 만들어가자는 다정한 제안에 가까웠다. 그렇게 그는 사진작가의 길에 들어섰고 낯설기만 하던 카메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점차 삶이 되었다. 이후 그녀는 두려움 없이 사진 전시에 나서며 자신만의 길을 본격적으로 펼쳐가기 시작했다.
"처음 전시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습니다. 제대로 된 패널 하나 없이, 정말 초라하게 시작했거든요. 그때는 오직 용기 하나로 시작했죠."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준비가 부족하고 미숙했음에도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격려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때의 용기가 지금의 자신을 만든 밑거름이 되었다고 말한다.
남편은 단순한 배우자가 아닌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서로의 예술을 이해하고 응원하며 다른 방식으로 같은 세계를 탐구하는 동반자였다. 화폭 위에 빛과 선을 담는 화백과 순간을 카메라에 기록하는 사진작가, 표현 방식은 달랐지만 그들이 주목하는 대상은 같았다. 그 공통의 시선은 자연, 특히 산으로 이어졌다. 화가는 산의 선과 빛을 화폭에 옮겼고 그녀는 산에서 마주한 순간을 사진에 담았다. 산은 두 사람의 예술을 연결하는 매개가 되었으며 삶과 예술 사이에서 남편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함께 길을 걷는 동반자로 남았다.

▲카페에서 사진을 정리하는 강레아 작가, 또 다른 사진 속 세계를 찾아 나서기 위한 준비를 이어가고 있다. ⓒ 진재중

▲카페 벽을 장식한 소나무와 암반 사진들에는 고요함 속에서도 단단한 긴장이 흐르며, 강인한 생명력이 담겨 있다. ⓒ 강레아
설악을 향한 여정, 끝내 찾아낸 하나의 자리
작가는 한때 북한산이 바라다보이는 집에 머물며 꾸준히 산을 촬영해왔다. 그 시간은 자연스럽게 작업으로 이어졌고 북한산을 배경으로 두 차례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새로운 작업을 위해 그는 시선을 설악산으로 옮겼다. 설악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서울과 설악을 오가며 촬영에 나섰지만 그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설악산은 좀처럼 자신의 모습을 내어주지 않았다. 서울에서 서둘러 달려와도 산은 늘 구름과 안개에 가려 있었고 기대했던 풍경은 번번이 모습을 감췄다. 그의 작업은 어느새 촬영보다 기다림의 시간이 더 길어지는 과정이 되어갔다.
그에게 설악산은 단순한 촬영 대상이 아니었다. 30여 년 동안 오르내리며 마주해 온 '살아 있는 존재'였다. 암벽과 안개가 빚어내는 설악만의 풍경을 담기 위해 그는 산 가까이에서 촬영 지점을 찾고자 했다. 인제에서 양양에 이르기까지 설악 일대를 샅샅이 살폈지만 마음에 드는 장소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설악산 입구의 한 카페를 알게 되었고 결국 그곳으로 전시 공간을 옮기게 되었다. 안개에 휩싸인 설악산의 장엄한 암벽과 은밀한 순간들을 온전히 담아내기에 더없이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설악산 입구에서 바라본 설경, 하얀 눈이 내려앉은 풍경 속에 고요하게 숨 쉬는 설악의 겨울이 담겨 있다. ⓒ 진재중

▲설악의 숨결운무와 암반, 흑백의 대비가 묘한 기운을 남긴다. 설악의 숨결이 고요히 스며든 순간을 담은 장면이다. ⓒ 강레아
렌즈에 담긴 설악의 숨결
카페 창가에 서면 설악산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창밖의 설악은 벽에 걸린 사진보다 더 생생하다. 그러나 사진 속에서 포착된 깎아지른 바위 위의 순간들은 또 다른 설악의 얼굴을 보여준다.
강레아 작가가 담아낸 장면들에는 설악산이 품고 있는 가장 깊고 장엄한 야성이 스며 있다. 설악의 기운이 스며드는 창밖 풍경과 카페 안의 따뜻한 공기, 그리고 바위와 소나무를 오래 바라봐 온 사진작가의 섬세한 시선이 이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그래서 이곳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카페가 아니라 설악을 매일 마주하며 삶과 예술을 나누는 작은 산의 방과도 같다.
강레아 작가는 자신의 작품과 산을 향한 시선을 통해 인간이 자연 속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끊임없이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소나무와 바위, 그리고 자연의 침묵 속에서 인간의 겸손함과 생명의 경이로움을 다시금 깨닫는다며, 사진을 통해 그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곳에서 날마다 산을 느끼고 산과 함께 부대끼며 사진으로 설악산을 노래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친 그는 조용히 자신이 쓴 시 한 편을 건넸다.
소나무-바위에 깃들다
산다는 건
들숨 날숨
사랑한다는 건
포기하지 않고 하나가 되는 길
하나가 된다는 건
내 숨과 네 숨이 한걸로 흐른다는 것
어느 늦가을 찬바람에 실린 솔씨 하나 바위에 내려앉는다.
그곳에 가만히 앉아 들숨날숨, 꿈쩍도 않은 채 포기하지 않고 들숨날숨...
단단한 바위 틈이 열리고, 그 사이로 씨앗손이 살며시 깃든다.
연하다 연한 손길이 차디찬 가슴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함께 들숨날숨... 둘은 깊이 하나가 된다.
어느새 씨앗은 바위의 자태를 품은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솔씨가 길을 낸 바위 틈으로 뭉클한 흙바람이 인다.
글: 강레아

▲방문객들이 떠난, 그 여운이 남아 있는 자리에서 강레아 작가는 사진 속 메시지에 깊이 몰입한다 ⓒ 진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