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성학교가 자랑하는 3.1운동 기념탑과 과거교사동 모습(현재는 기념관 및 박물관으로 쓰인다). 기념탑에는 당시 만세시위를 벌이다 옥고를 치른 동문들의 이름이 빼곡하다. ⓒ 서부원
우리나라 근대 교육은 개신교에 빚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교사들은 전국 각지에 학교를 세웠고, 신학문의 세례를 받은 졸업생들은 이후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이끈 주역이 됐다. 그곳이 일제강점기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산실이었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지난달 21일, 영남 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됐다는 개신교 학교를 찾았다. '대구 시민 주간'이 시작된 날이어서, 도심 곳곳이 시민들과 외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대구 시민 주간'은 대구를 대표하는 역사적 사건인 국채보상운동(2월 21일)과 2.28 민주운동의 일자에 맞춰 제정되었다.
흔히 '대한민국 보수의 심장'이라는 대구 서문시장 주변은 기실 우리나라 초기 개신교 선교의 중심지였다. 서문시장을 감싸듯 개신교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와 병원이 자리하고 있다. 계명대학교 의대와 부속병원, 계성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담장을 마주하고 있다. 나란히 자리했던 계성고등학교는 지난 2016년 도심의 외곽으로 이전했다.
초창기 계성학교는 지난 1906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인 제임스 애덤스(한국명은 안의와)에 의해 설립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그 이듬해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근대 교육과 의료 사업은 선교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고, 대부분의 선교사는 교사와 의사의 역할을 겸하였다.
훗날 제중원과 세브란스로 이름을 바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도 선교사인 알렌이 세운 것이다. 그가 갑신정변 당시 급진개화파의 공격으로 크게 다친 민씨 척족들을 치료해 준 대가였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등 수많은 학교 역시 개신교 선교 사업의 일환이었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로서의 역사적 위상

▲계성학교 출신 독립운동가들과 서훈 내용을 새겨 벽에 걸어놓았다. 맨 오른쪽 위는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김단야이고, 맨 왼쪽 아래는 조선공산당 초대 비서를 역임한 김재봉이다. 이곳에 당연히 걸려 있어야 할 이여성은 보이지 않는다. ⓒ 서부원
교문에 들어서면 서문시장의 왁자지껄함이 거짓말처럼 잦아든다. 담쟁이넝쿨이 흘러내린 붉은 벽돌의 오래된 건물이 고풍스러움을 더하고, 도심 속 공원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과거 교사(校舍)로 쓰였지만, 지금은 기념관으로 탈바꿈해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대구읍성의 성벽을 허물어낸 돌을 초석으로 사용했다는데, 거기에 건물의 건립 연도를 새겨놓았다.
기와지붕을 얹은 서양식 건물 앞 '3.1운동 기념탑'이 가장 먼저 여행객을 맞는다. 당시 교사와 학생 대부분이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학교의 자랑으로 삼고 있다. 대구 지역 3.1운동의 거점으로서, 지금도 기념일인 3월 8일 전교생이 모여 성대한 행사를 연다고 한다.
기념탑은 월계관을 든 예수상을 돋을새김한 네모기둥 위에 횃불 모양의 아담한 청동상을 얹어놓은 형상이다. 기념탑 앞 표지판에는 당시 만세 시위에 참여한 교사와 학생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 뒤 열린 재판에서 선고된 형량까지 적어놓은 게 특이하다.
옛 본관은 온전한 서양식 건물이다. 형태로만 보면, 옛 경남도청이나 충남도청, 전남도청 등 일제강점기 지방의 관공서 건물과 흡사하다. 원래 2층으로 지었다가 해방 후 3층으로 증축했다는데, 그 흔적이 남아있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로서 역사적 위상이 느껴진다.
정면 계단 옆에는 계성학교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한 병풍 모양의 안내판이 서 있다. 그들이 수훈한 건국 훈장과 포장의 격을 사진과 함께 동판에 새겨 걸어 놓았다. 거기엔 모스크바에서 일제의 첩자로 내몰려 희생당한 공산주의 혁명가 김단야(본명 김태연)와 조선공산당 초대 비서로 추대된 김재봉도 만날 수 있다.
흥미로운 건, 김단야는 한국인을 차별하는 선교사와 일본인 교사의 행태에 맞서다 일찌감치 퇴학당했고, 김재봉은 국권 피탈 전인 1908년에 졸업해서 계성학교의 3.1 운동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데도 이름을 올렸다는 점이다. 그저 학교와 관련된 독립운동가를 그러모은 느낌이다.
반면에 계성학교의 3.1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이여성은 아예 빠져 있다. 그는 서울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시위를 구체적으로 계획한 핵심 인물이다. 그가 태극기를 복사하고 배포할 유인물을 준비한 학교 지하실이 그대로 남아있다.
계성학교의 역사에서 첫손에 꼽는 3.1운동의 공적을 기준 삼는다면, 이여성의 이름을 꼭 올려야 합당하다. 이여성을 뺀 건, 해방 후 월북해서 건국 훈장을 수훈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짐작된다. 공산주의 혁명가였던 김단야와 김재봉은 해방 전에 사망했다.
불세출의 독립운동가라도 월북한 자는 안 된다는 것일까. 일제의 식민 지배를 두둔한 미국인 선교사들과 해방 후 반공을 국시로 내건 독재 정권의 '합작품'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예나 지금이나 공산주의는 개신교와 독재 정권 '공동의 적'이다.
그래서일까. 계성중고등학교 교가 속 '반공에 우뚝이'라는 노랫말이 괜한 오해를 사기도 한다. 여기서 '반공'이란,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말로, '절반쯤의 허공'이라는 의미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당시 음악 교사로 근무한, '동무 생각'의 작곡가 박태준이 만든 노래로 알려져 있다.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건 삭제된 이여성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달 25일, 계성고등학교와 경북 영덕군이 6.25 전쟁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에 '호국 교육 교류'를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장사상륙작전 당시 희생된 계성학교 출신 학도병을 기리기 위한 행사였다.
전몰 희생자를 추모하는 일은 마땅한 일이지만, 거기에 '호국 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인 건 다소 유감이다. 알다시피,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감행된 성동격서의 전략이었다. 거칠게 말해서, 애꿎게 동원된 어린 학생들이 죽임을 당한 전투였다.
하물며 '전승'을 입에 담을 순 없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린 학생들의 희생도 불가피하다는 인식, 그리고 그들의 희생을 '호국'으로 포장해 짐짓 정당화하는 건 부적절하다. 학교와 지방정부가 공동 추진하겠다는 체험형 교육 프로그램의 취지가 선뜻 내키지 않는 이유다.

▲계성학교 운동장 입구에 세워진 '국군 제2군 창설지' 표지석. 군사 기념물이 학교 교정에 버젓이 세워져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 서부원
돌아 나오는 길, 올라갈 때 못 본 기념물 하나가 발길을 붙잡았다. 운동장 입구에 '국군 제2군 창설지' 표지석이 수문장처럼 서 있었다. 정전 협정 체결 이듬해인 1954년 이곳에서 창설되었다는 사실을 부대 표식과 함께 새겨놓았다. 순간 선교사가 세운 학교의 운동장이 마치 군부대의 연병장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턴가 개신교 하면 반공과 극우라는 단어부터 떠올리는 이들이 생겼다. 전국적으로 5만 개를 헤아린다는 교회 중에 반공과 극우를 표방하는 곳은 분명 '소수'일 텐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의 목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다.
일부 극우적 개신교에 대한 불신은 윤석열의 내란 사태를 겪으며 더욱 강화되었다. 헌법적 가치마저 조롱하는 몇몇 목사들의 악다구니에 대다수 국민은 혀를 끌끌 찼다. 구속된 윤석열이 독방에서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에 코흘리개 아이들조차 헛웃음을 보내고 있다.
일제강점기 숱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계성학교의 교정에서 불경스럽게도 극우라는 단어가 떠오른 건 다 '윤석열' 때문이다. 누가 교사 아니랄까 봐, 꼬리를 문 상념은 최근 더욱 기승을 부리는 10대 아이들의 극우화 현상으로 수렴됐고 생각이 많아졌다. 오늘도 그들이 즐겨 찾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윤 어게인'을 외치는 목소리가 잦아들지 않고 있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