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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락호락 도서관세운상가 4층 바열 431호에 있다 ⓒ 유채원
오디오 장비, 빈티지 카메라 같은 전자제품이 가득한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엔 의외의 공간이 있습니다. 바로 도서관입니다. 전선과 상자가 쌓인 복도를 지나면 작은 도서관이 나타납니다. 이름은 '호락호락 도서관'. 문 앞 칠판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응원의 문장이 반겨줍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너덧 명만 들어가도 꽉 찰 만큼 아담한 공간에 책이 촘촘히 꽂혀 있습니다.
호락호락 도서관은 비영리 임의 단체 '호락호락 감자'의 모임 공간입니다. 호락호락 감자는 진로 전환기 청년의 고립감을 해결하는 단체입니다. 고유한 재능을 기반으로 수입을 만들어내는 '상품화 실험', 관심사를 바탕으로 진로를 탐색해 보는 '미니 인턴' 등의 활동을 이어오고 있어요. 잦은 실패로 작아진 청년들이 고유한 재능과 쓸모를 찾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 이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돕기 위해서요. 지난해 6월 이후 131명이 호락호락 감자를 거쳐 갔습니다.
모임 공간인 도서관은 진로 고민을 해소하고픈 청년들이 주로 방문하지만, 모두가 책을 빌릴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인 이곳을 만든 사람은 호락호락 감자의 대표 임수연씨입니다. 수연씨는 어쩌다가 비영리 단체를 만들었을까요. 세운상가에 도서관을 연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난 20일 수연씨를 만나 물었습니다.
만만해 보여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일

▲호락호락 감자의 대표 임수연 씨비사이드클럽과의 인터뷰 장면 ⓒ 유채원
- 호락호락 감자를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 문제를 직접 해결해 보고 싶어서였어요. 대학을 중퇴하고 진로 고민이 길었어요. 아르바이트를 하고 비건 베이커리 카페를 창업해 3년간 운영하기도 하고 취업하기도 했죠. 모두 길게 버티지 못하고 그만뒀어요. 자꾸 적응을 못 하는 저를 보며 지겨움과 수치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잘난 것도 없는데 이거 하나 못하네' '이것도 못하면 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 무기력해졌죠.
그러다 가족과 친구에게서 저와 비슷한 모습을 보게 됐어요. 힘들어서 고통스러울 바에 더 존중 받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을 저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단체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시장에서 노동 지망생에게 요구하는 조건이 아닌, 대단하지 않지만 성격의 특성과 취향을 살려보자는 실험을 시작했어요. 불안함이 크지만, 누군가에게 맞춘 것이 아닌 나의 모습을 존중하는 일을 처음으로 만들어보고 싶었거든요."
- 단체의 이름에도 이런 경험이 반영된 걸까요?
"대학교를 자퇴하고 경력에서 제한되거나 여기저기서 거부 당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럴 때마다 주눅이 들었어요. 누구에게나 만만한 '감자'가 된 기분이었죠. 그런데 감자는 요리에 만능으로 쓰이는 재료잖아요. 겉보기엔 평범해 보여도 어디에든 어울리는 힘이 있어요. 그래서 '호락호락하지 않다'라는 뜻을 담아 호락호락 감자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 모임 공간을 도서관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을 만들고 싶어서 도서관을 만들었어요. 서점은 책을 꼭 사야만 할 것 같고 돈이 없으면 가기 망설여지니까요. 세운상가를 선택한 건 한때 기술로 번영했던 공간이기 때문이에요. 사장님들의 숙련된 손기술과 침체된 젊은 사람들을 위한 실마리를 찾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면 사장님들이 손기술로 번영하셨듯이, 우리도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보면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어요.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사장님들의 태도도 배우고 싶었습니다. 서로 다른 세대가 같은 공간을 쓰면 새로운 가능성이 생길 거라 믿었습니다."
- 호락호락 감자의 프로그램 중 가장 애착이 가는 모임이 있다면요?
"창업 스터디를 좋아해요. 좋아하는 일로 직접 돈을 벌어보는 진로 실험 모임이에요. 그 안에 '시급이 필요해'라는 활동이 있는데, 좋아하는 일로 적은 금액을 벌어보는 프로그램입니다. 첫 주에는 일주일에 5천 원을 목표로 하고, 다음 주에는 1시간에 5천 원을 벌어보는 것으로 기준을 바꿔요. 처음에는 참여자분들이 많이 막막해하세요. 아직 내세울 게 없다고 느끼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돈을 벌어본다는 게 쉽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다른 사례를 보여드리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기 시작해요. 프랑스어 모임이나 영상 챌린지를 기획해 보겠다는 분도 있었어요. 모임이 끝난 뒤에도 남아서 기획을 이어가고, 서로 아이디어를 보태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참여자 분들이 의욕 있을 때 나누는 대화가 좋거든요. 무기력한 모습이 익숙하던 분들께 의욕을 주는 매개가 되어서 뿌듯해요."
- 이 스터디를 통해 돈을 버는 일에 성공하신 분이 있었나요?
"카페에서 오래 일하다 퇴사한 바리스타 분이 기억에 남아요. '30만 원 감자단'에 참여해 가오픈 주간에 브루잉 원데이 모임을 열었고, 목표 금액을 넘겼습니다. 이후 정규 모임으로 이어졌고, 커피와 일상을 기록한 워크북도 출간했어요. 꼭 카페가 아니어도 좋아하는 일을 다른 방식으로 이어갈 수 있다는 걸 발견한 거죠. 그 과정을 구경하는 게 정말 좋았습니다."

▲커피 워크숍바리스타 무아솔의 커피 워크숍이 진행 중이다. ⓒ 임수연
"잘 안 될 리가 없다"는 말의 힘
- 비영리단체를 운영하는 일이 보람찰 때도 있지만 힘들기도 할 것 같아요.
"불안하죠. 그런데 돈이 되지 않는 일을 지속하는 게 무의미한 것 같진 않아요. 비영리단체를 열기 전에는 일단 나를 감추고 '나를 써줄 곳은 여기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안 맞는 일을 계속하다가 그만두고, 버티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패턴을 회복하지 못해서 힘들었어요. 급여를 받아도 불안하고, 급여를 받는 안정적인 삶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거고요. 그러니 '하고 싶은 거 할 때까지 하는 게 낫지' 생각하면서 지내요. 이제 더 이상 실패한 채로 괴로움을 반복하지 않아요. 내가 주체가 될 수 있는 일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 단체 운영을 시작한 지 반 년이 넘었는데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단체의 지속 가능한 운영이요. 그러려면 후원금이나 보조금, 혹은 수익 사업 중 하나는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야 해요. 장기적으로는 무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싶어요. 지금은 보조금과 후원금이 없어서 유료 사업을 여는데, 경력 단절 여성처럼 연령대가 높은 분들이나 생계 수단이 없는 분들일수록 스스로에게 소액도 투자하기 어려워하시거든요. 그래서 올해는 펀딩을 통해 보조금을 마련해 더 다양한 연령대의 소외감을 덜어주는 프로그램을 열고 싶어요."
-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자신감이 없어서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최근 익명으로 고민을 받는 웹사이트를 만들었어요. 퇴사 후 방황 중이라는 한 분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남기셨죠. '잘 될 거다'라고 답했어요. 어떤 일을 할 때 안 된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아요. 정말로 자신 있어서는 아니고요. 안 된다는 말도 미래를 확인하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왜 우리는 안 될 거라는 데는 그렇게 쉽게 확신을 가질까요?
대학을 중퇴한 뒤 '다음'을 상의할 사람이 없어 외로웠어요. 사람들이랑 이야기하고 싶어 책 모임에 가면 늘 제가 제일 어렸거든요. 어리니까 만나는 분들이 조언을 섣불리 하시는 거예요.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알바 오래 하다가 취업 시기 놓친다' 이런 말을 많이 들었죠.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제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됐습니다. 고립감을 느꼈죠. 안 된다고 그렇게 쉽게 말할 거면 잘 된다고도 쉽게 말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왜 사람들이 나한테는 그렇게 안 해줬을까? 이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저는 불안할 때 항상 잘 된다고 생각해요. 잘 안 될 리가 없다고요."
어떤 경험은 사람을 통째로 바꿔 놓기도 합니다. 변한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죠. 그렇게 내린 결정이 과거엔 상상도 못 했던 나를 만들기도 합니다. 수연님이 중퇴 이후 다양한 일을 경험하고 고민 끝에 단체를 만든 것처럼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실 줄 알았는데 수연님은 예상 밖의 이야기를 꺼내놓았습니다.
"그때 생각한 서른이랑 좀 달라요. 서른이면 더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불안하네요."
수연님은 그럼에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라도요. 어쨌든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고 있으니. 불안은 불쑥불쑥 머리를 내밀기 마련입니다. 두더지 게임을 하듯 숨 가쁘게 불안만 잠재우다 보면 정작 도전은 미뤄지기 쉽습니다. 불안을 뿌리 뽑을 수 없다면 미루는 대신 해보는 쪽을 택해보는 건 어떨까요. 더디더라도 엉금엉금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에 드는 버전의 자신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게 꿈꾸던 서른이 아닐지라도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비사이드클럽 인스타그램 계정(@bside_seoul)에도 실립니다.